거장과 마르가리따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75
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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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고전문학 중 하나인 <거장과 마르가리따>. 저는 미하일 불가꼬프라는 작가를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됐는데 작가 소개를 읽어보니 굉장히 유명한 작가더라구요. 무려 솔제니친에 버금가는 작가라는 평이! 살아생전에도 유명했지만 <거장과 마르가리따>가 사후 26년만에 발표되면서 러시아 문학권은 물론이고 서구권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대요. 그런데 그런 소개가 없었어도 충분히 통할 만큼 소설 자체가 엄청 재밌었어요!


 소설은 1) 악마 볼란드가 그 수하들과 함께 모스크바에 나타나서 사회를 혼란시킨다, 2)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를 만나고 심판하고 고뇌한다, 3) 본디오 빌라도를 가지고 소설을 쓴 '거장'이 위기에 처하자 그의 연인 마르가리따가 악마와 거래를 해서 거장을 구한다, 이 세 가지 큰 줄기가 서로 교차하면서 진행됩니다. 이 과정에서 1·2·3이 서로 겹쳐지면서 당대 러시아의 사회문제를 은근슬쩍 드러내요. 하지만 이 소설이 살아생전 발표되지 못했던 이유는 그게 아닐 겁니다. 아마 이 소설 전체가 어쨌거나 '악마', '사탄'의 존재를 인정하고 시작한다는 게 결정적이었겠구나 싶어요. 초반부터 누누히 얘기하지만, 당시 러시아는 유물론적인 가치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무신론만이 정답으로 여겨졌으니까요. 불가꼬프와, 누가 봐도 불가꼬프를 나타내고 있는 거장 캐릭터가 엄청나게 공격을 받았던 것도 이해가 됩니다. 교회만이 정답인 세계에서 '신은 없다!'고 외치는 거나 매한가지였겠죠. 이건 누가 봐도 '신앙인'의 원고거든요.


 역사 속에서 예수와 본디오 빌라도를 불러와 현대 러시아의 모습을 풍자했다- 이렇게만 말하면 엄청 딱딱할 것 같은데, 은근히 웃기고 캐릭터성이 강해서 금방 스르륵 읽혀요! 상·하 두 권으로 나누어져 분량이 꽤 있는 편인데 마음 먹고 읽기 시작하니까 하루도 안 걸렸어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인공은 거장과 마르가리따지만, 의외로 둘의 비중은 크지 않고 오히려 악마인 볼란드와 그의 수하 꼬로비요프-아자젤로-베게모뜨 3인방의 비중이 큽니다. 악마 쪽 캐릭터가 워낙 확실하고 매력적이라 이쪽이 진주인공 같기도 해요. 표지에 나오는 고양이가 바로 베게모뜨입니다. 고양이 주제에 악마의 하수인 노릇을 톡톡히 하고 다니는 녀석이에요. 상권에서는 그냥 평범한 악마구나 싶은데 하권 가면 악마들 언제 나오나 계속 기다리게 된다니까요~ (아자젤로랑 베게모뜨랑 둘이 사격실력 가지고 내기하는 장면 정말 뭔가 기묘하고 웃기고 귀엽습니다.) 실제로 불가꼬프도 제목을 붙일 때 <대제상>이나 <사탄>, <검은 사도, 그가 나타나다> 같은 후보를 고려했다는 걸 보면 처음에는 분명 이쪽을 더 부각시키려고 했던 것 같아요.


 특히 환상문학 특유의 '외부인이 볼 때는 전혀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되지만, 내부인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플롯이 좋았습니다. 예를 들어 정신병동에 환자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각자의 헛소리를 지껄이는데, 맥락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게 무슨 일인가 싶겠지만 독자는 약간의 힌트만으로도 그 사람이 누구이고, 앞서 무슨 일을 겪었다는 걸 다 알게 되는 식으로 전개되거든요. 다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진실을 말하는데 제3자가 들으면 미친 놈의 헛소리가 따로 없죠! 등장인물은 다들 어리둥절 혼란 속에 상황을 제대로 모르고, 독자는 안다는 것. 이게 은근히 매력포인트에요. 게다가 "오늘 저녁에 회의는 열리지 않을 겁니다. 안누쉬까가 벌써 해바라기 기름을 샀고 그것을 쏟았거든요" 이런 식으로 아무렇게나 툭 던진 것들이 나중에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건, SF나 시간여행에서 자주 만나볼 수 있는 장치라 더 흥미롭고요.


 완결이 되서 책으로까지 나왔는데 '미완성'이라고 해서 의아했는데, 작가가 수정을 하던 중에 사망했대요. 그래서 곳곳에서 앞뒤가 안 맞는 문장이나 상황들이 발견되곤 합니다. 각주로 친절하게 설명을 해줘서 바로 알 수 있어요. 한낮이랬다가 오전 10시도 안 된 시간이랬다가, 창문으로 날아갔다고 했다가 문을 닫고 바깥으로 나왔다고 했다가, 각자 자기 안식처에서 조용히 죽었다고 했다가 뒤에는 사라졌다고 했다가, 심지어는 악마 쪽 주요 캐릭터 하나가 앞에서는 활약하다가 마지막 장면에서는 사라져요. 이야기의 완결성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지만 진짜로 작가가 제대로 끝까지 다 손봤다면 어떤 작품이 나왔을까 궁금해집니다. 


 각주가 꽤 많아요. 저 같은 경우는 무심코 흘려버릴 수도 있었던 포인트를 번역자가 세세하게 짚어주는 느낌이라 각주를 좋아하는데, 흐름이 끊겨서 싫으신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지명이나 이름 같은 건 그냥 넘기셔도 무방할 듯 해요! 각주가 많다는 건 반대로 말하자면 글을 읽는 데 그만큼 필요한 배경지식이 많다는 말이잖아요. 그래서 확실히 러시아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이 읽으면 저보다 훨씬 많은 게 보이겠구나, 싶어서 좀 아쉽기도 했습니다. 고전 번역을 읽다보면 꼭 이렇게 깔려있는 문화적 코드들이 궁금해진다니까요! 각주로는 따로 설명되지 않은 부분인데, 소설 속에서 (악마가 주인공인 걸 감안해도) "알 게 뭐야? 악마나 알겠지!" 하는 식의 표현이 엄청나게 자주 등장하거든요. 볼란드가 악마인 걸 모를 때도 그냥 사람들이 숨쉬듯이 저렇게 말해서, 러시아에서는 일종의 관용구인가보다 하고 막연하게 짐작하고 있어요. 무신론이 대세였던 시절에도 언어에 남아있는 종교의 흔적이라니, 재밌지 않아요?!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사탄의 무도회 장면에서 약간의 인종차별적인 부분입니다. 러시아 작가가 만들어낸 사탄은 러시아의 문화와 역사의 영향을 받는다는 증명이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죽은 자들이 찾아오는 무도회에, 온갖 인종이 다 있다고 묘사가 분명히 되고는 있지만, 이름을 가지고 중요도 있게 등장하는 건 전부 유럽-러시아 백인뿐이에요. 흑인들은 그저 까만색 피부를 가지고 스쳐지나간다고 나오거나 혹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름도 없이 그저 시중이나 들고 칵테일이나 나르고 있어요;;; 차라리 하인의 인종을 말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흑인이라고 명시가 되어 있어서 흠칫했습니다. 소설 통틀어 흑인이라고 제대로 나오는 게 딱 그 장면뿐이라니.. 너무했어요 따흑..


 러시아권 이름이 워낙에 헷갈려서 중간중간 혼란이 오는 것만 빼면, 굉장히 빠르게 쑥쑥 읽히는 책입니다. 저는 무신론자인데도 중간에 삽입된 거장의 소설도 성경 읽는 느낌으로 재밌게 잘 읽었어요. 오히려 이 소설 속 소설 부분은 성경과 다른 점이 많아 독실한 종교인이 읽으면 어떤 감상일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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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가든 - 초판본 비밀의 화원 - 1911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 지음, 박혜원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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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의 화원>은 굉장히 유명한 고전 아동문학이긴 하지만, 한국에는 상대적으로 <소공자>와 <소공녀>에 비해 덜 알려진 편인 것 같아요.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이라는 작가 이름도 안데르센이나 여타 다른 세계적인 아동문학 작가에 비해 좀 덜 익숙하고요. 하지만 덜 알려졌다고 해서 그 작품이 덜 좋다는 뜻은 아니죠! 지금 읽어보면 다소 부적절한 인종차별적 내용이 조금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당시 시대상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작가가 담고자 하는 메시지는 충분히 재미있게 잘 전달되는 작품입니다.


 메리 레녹스는 인도에 살던 영국 부잣집 아가씨로, 아~~~~주 버릇이 없고 제멋대로에 무뚝뚝하고 심술궂은 10살짜리 꼬맹이입니다. 보통 아동문학 주인공은 어른의 눈으로 봤을 때 좀 이상해보여도 어린이들 세계에선 정말 선하고 매력적이기 마련인데, 메리는 아예 대놓고 성격이 나빠서 주변 아이들이 따돌리고 놀려먹는 것으로 나와요. 그리고 묘사를 봐도 전형적으로 '부모에게 방치되어 오냐오냐 키워진' 상류층 소황제입니다. 아무도 메리를 신경쓰지 않고, 메리 역시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아요. 이런 메리가 부모를 잃고 낯선 고모부네로 보내져, 서서히 변화한다는 게 주요 내용입니다. 메리는 처음에 영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누가 옷을 입혀주고 신발을 신겨주는 게 너무 당연해서 '마치 손발이 없는 사람처럼' 가만히 서서 누군가 시중을 들긴 기다리는 아이였지만, 하녀 마사의 솔직하면서도 능청스런 반응("즈 옷붙이도 혼차서 못 두르나요!")에 힘입어 점점 자기만의 세계를 깨고 나오게 돼요.


 동화다운 매력이 곳곳에 살아있습니다. 특히 식물을 키우시거나 정원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책 속에 펼쳐지는 생명력 넘치는 자연의 묘사가 마음에 쏙 드실 거예요! 메리는 아무 것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아이였는데, 혼자 방치된 채로 정원을 거닐면서 점점 이 신비한 세계 속으로 빠져들거든요. 그 와중에 정원을 돌보는 노인 벤 웨더스태프를 만나 이 무뚝뚝한 노인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점을 발견하고 친근함을 느끼기도 하고, 자연의 마법사나 마찬가지인 마사의 동생 디콘을 만나 동물과 식물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가기도 합니다. 인도에서는 늘 집 안에 처박혀 있기만 했는데 영국에서는 밖에 나와서 걷고 뛰고 놀고 먹으니 점점 더 건강해질 수 밖에요! 게다가 이 비밀 많은 집에서 '비밀의 화원'과 '비밀의 주인공', 그리고 '비밀의 방'을 탐구하면서 '비밀'을 쌓아가기고 하고요ㅋㅋㅋ


 마음이 병들어있던 크레이븐 백작가 부자(父子)가 정원을 가꾸고 자연을 거닐면서 점점 치유되고 덩달아 몸도 건강해지는 그 과정이 잘 그려져있어요. 다만 아들인 콜린이 치유되는 과정은 매우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메리와 디콘과 벤 노인과 함께 서서히 일어난다는 느낌인데 반해 아버지인 크레이븐 백작은 그렇게 어둠 속을 헤매다 어느 날 갑자기 문득 스스로 치유되어 돌아온다는 묘사가 좀 뜬금없긴 했어요. 저는 당연히 돌아와서 되살아난 콜린과 정원을 보고서 마음을 돌릴 줄 알았는데, 이미 그 전에 하루아침에 변한 채로 돌아온 거잖아요. '아내의 꿈을 꿨는데 그날 아침에 편지가 왔더라' 해서 돌아온 건 있을 법한 일 같긴 한데 말이에요. 그래도 봄의 물결 속에서 마침내 서로를 끌어안은 부모자식의 이야기는 여전히 참 달콤합니다.


 글을 읽다 보면 곳곳에 아주 인종차별적이고 계급주의적인 언사들이 녹아있어서, 만약 아이와 함께 책을 읽으시는 부모님이라면 주의하셔야 할 것 같아요. '아주 오래전에는 이렇게 나쁜 생각이 당연하다고 사람들이 믿었던 때가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납득시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예 대놓고 인도인을 노예로 부리는 영국인이 나오고, 흑인은 다 이상하니까 아가씨도 흑인인 줄 알았다는 차별적인 얘기를 하고, 거기에 또 발끈해서 화를 내는 주인공에, 곧 죽을 거라는 이유로 거의 집안에서 폭군으로 군림하던 도련님도 등장하거든요. 아동문학을 읽을 때 보통 아이가 주인공에 이입하는 걸 생각해보면, 이런 문제적인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는 게 보호자가 해야할 일 같아요!


 꽃과, 새와, 정원과, 녹음과, 바람과, 햇살과, 초록과, 정원으로 가득차 있는 이야기입니다. 읽다보면 저도 녹음을 거닐면서 꽃향기를 맡고 싶어지는데, 저에게는 거닐만한 정원이 없다는 게 애석할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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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걷는 여자들 - 도시에서 거닐고 전복하고 창조한 여성 예술가들을 만나다
로런 엘킨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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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를 걷는 여자들>은 제목부터 내용까지, 기대했던 바로 그 주제를 관통하는 책입니다. 다양한 시대와 다양한 도시에 살았던, 그리고 집 안에 머무르지 않고 거리로 뛰쳐나와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살았던 여성 예술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 여성들에 대해 설명하는 게 주된 목적은 아닙니다. 그들에 대한 단상이 들어가 있을 뿐, 어디까지나 작가 본인의 인생과 사상과 고민과 철학을 담고 있거든요. 물론 거기에는 앞서 걸었던 여성 선배들이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있긴 하죠.


 에세이가 으레 그렇듯, 특별하게 가지는 줄거리나 명확한 갈등이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끊임없는 사유가 둥둥 떠다녀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공감'하면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글은 아닙니다. 꽤나 많은 여성 예술가의 작품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쏟아지기 때문에, 한 줄 한 줄 신경써서 읽지 않으면 흐름을 놓치기 십상이에요. 책 뒤편에 소개된 참조문헌/이미지 출처만 30페이지가 넘어갈 정도거든요. 개인적으로 출처표기가 이렇게 잘 되어있는 책 오랜만에 봐서 좋았습니다. (한국은 이 부분에 엄청 소홀해서 번역하면서 일부러 삭제하는 곳도 있대요. 인용출처 뺀다고 부피에 별 차이도 없는데 그러지 말았으면..) 아무튼 설명을 꽤 열심히 해주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르주 상드'나 '소피 칼', ''아녜스 바르다' 같은 예술가에 대해 잘 모르면 쏟아지는 사유의 폭격에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 거예요. 알면 읽는 속도가 훨씬 빨라질 거구요.


 이 책은 어떤 면에서는 걷기에 대한 예찬입니다. '정처 없이 걸으면서 사유하는 자'라는 뜻의 프랑스 단어 '플라뇌르'를 여성형으로 바꾼 '플라뇌즈'에 대한 책이거든요. 산책자, 산보자, 걷는 사람. 플라뇌르는 길에서 대중에게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19세기 어느 순간까지는 길에서 여성은 너무 눈에 띄는 존재였고 동시에 보이지 않는 존재여서 플라뇌르가 될 수 없다고 배제당했습니다. 그렇지만 꾸준히 방에서 뛰쳐나와 걷기 시작하는 여성들이 있어왔고, 저자는 자신의 인생을 쭈욱 연장시켜 그들의 인생까지 가 닿게 만듭니다. 걷는 것에 대한 가치를 굉장히 높게 치는데, 이건 약간의 지리적 특권이 포함된 미학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프랑스처럼 산책하기 딱 좋은 기후에 자리잡은 나라가 아니라면, 플라뇌르가 되기는 쉽지 않겠다 싶거든요. 영하 30도에 가까운 추운 나라이거나 반대로 영상 40도에 가까운 더운 나라라면, 정처없이 쏘다니면서 인생과 철학에 대해 사유하는 게 자연스러운 선택지가 되지는 않겠죠. 이 부분에 대한 언급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없어서 좀 아쉬웠어요.


 로런 엘킨이 걷고 싶어하는 도시는, 과거를 품고 역사를 드러내는 도시입니다. 읽다보면 이 사람이 왜 파리와 사랑에 빠졌는지 확실히 알겠어요. 어떤 도시를 원하는지도요. 단순히 풍광이 예쁘고, 깨끗하고, 깔끔한 도시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저자는 거리를 걸으면서 100년 전, 200년 전에 여기서 살고 저항하고 걷고 싸우고 외치고 죽어갔던 수많은 유령들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껴지는 도시를 원하거든요. 그게 바로 도시와 사랑에 빠지는 제1조건입니다. 그래서 본인이 태어나고 자란 미국 뉴욕이나, 천편일률적인 현대식 건물들로만 가득한 일본 도쿄에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어요. 천상 파리나 베네치아 같은 유럽의 도시에서 살아야 할 운명입니다. 파리를 걸으면서 68혁명을, 코뮈나르를, 1848년 혁명을 생각하고 그 흔적을 찾는 사람에게 모든 것이 그저 빠르게 현대화되고 흘러가는 도시는 별 매력이 없지 않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로런 엘킨이 서울에 왔으면 도쿄만큼이나, 아니 도쿄보다도 더 학을 떼고 싫어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서울도 딱히 걷기 좋은 도시가 아닐 뿐더러, 세계 어느 도시를 가도 비슷비슷한 빌딩숲으로 가득찬 느낌이 강하잖아요.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로런 엘킨의 눈으로 봤을 때입니다. 한국의 남쪽에서 태어나 성인이 되면서 서울로 흘러들어온 저 같은 사람이 보는 서울은 또 다르겠죠. 심리적 지리로만 따지면, 서울은 뉴욕과 비슷한 구석이 있어요. '모두가 무언가 야망을 품고 도망쳐오는 도시'. 그리고 외부에서 여기에 '살러' 왔지만 속한다고 느끼지는 못하는 인간이 걸으면서 체감하는 도시는 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꾸 운동화를 신고 거리로 뛰쳐나가서 이 획일화되고 무기질한 동네를 구석구석 돌아보고 싶어졌어요. 로런 엘킨이 바라보는 것처럼, 하지만 그녀는 절대로 바라볼 수 없는 방식으로, 나의 역사를 가진 채 둘러보는 서울은 어떨까? 그게 궁금해지더라고요. 


 요즘처럼 산책하기 딱 좋은 기온과 날씨일 때 이 책을 읽게 되어서 행운이었습니다. 자꾸 중간에 책을 덮고 '지금 동네 한 바퀴 돌고 올까' 하는 충동에 시달렸거든요. 실제로 몇 번 나갔다 오기도 했고요. 이 도시는 나에게 무엇인지, 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 내가 여기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머물고 어떻게 떠날 것인지, 이런저런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분명히 로런 엘킨에 대해 읽었는데, '내'가 새삼스레 궁금해지다니 정말 어떻게 된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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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부서지기 전에 에버모어 연대기 1
에밀리 킹 지음, 윤동준 옮김 / 에이치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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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이 부서지기 전에>는 우리와는 다른, 7개의 세계가 존재하는 어떤 가상의 세계에서 자기 가족을 죽인 원수를 쫓아 고군분투하는 어떤 고아 소녀의 복수극입니다. 책 뒷표지에는 분명 이렇게 적혀 있어요. '모두가 사랑하는 전설의 왕자를 죽여라!' 하지만 제가 장담하건데, 이 소설을 끝까지 다 읽은 독자라면 아무도 그 사이코패스 악마 같은 전설의 왕자를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정말 읽는 동안 몇 번이나 화가 치솟았는지 몰라요. 잠시 화를 식히기 위해 끊어 읽어야만 했답니다...ㅎ... 


 저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가상의 세계도 좋아하고, 한 가지 명확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복수극도 좋아하는 편인데, 생각보다 고구마 답답이 전개여서 책장이 시원하게 촥촥 넘어가지는 않더라고요. 이게 아무래도 시리즈물이다 보니 한 권 안에 복수가 완성되지 않아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주인공인 에벌리는 아직 자신의 능력(?)을 다 자각하지도 못했고 상황 파악도 덜 됐는데, 상대는 이미 모든 것을 다 꿰뚫어보고 일을 꾸미는 놈이라 번번히 계략에서 밀리는 부분도 있고요. 주인공 심장이 시계로 되어 있어서 물에 들어가서도 안 되고 조금만 무리해도 바로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해요.


 하지만 무엇보다 주인공이 상황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간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게 답답함의 최고 원인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질질 끌려 다니는 것 같거든요. 초반에 섬으로 끌려가는 부분도 선택이라고 하기엔 애초에 재판에 선 것부터 계산이 어긋나서 함정에 빠진 느낌이고, 나는 복수 외에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거야! 해놓고 남자 때문에 이용당하고, 가족을 죽인 사람 옆에서 그를 위해 일하고 있는 오빠를 결국에는 받아들이고.. 이런 게 전체적으로 좀 제가 원하는 주인공 상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로맨스는 차라리 그냥 없는 게 더 좋았을 것 같아요. '누군가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퀸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을지..?


 중간에 전설의 왕자 너무 싫어서 아 그냥 다 때려쳐 에벌리 없으면 너도 망한다는 거잖아? 내가 에벌리였으면 나 네 말 안 듣고 죽어버릴 테니까 너도 그냥 망해버려라! 나 없으면 네가 뭘 할 수 있어? 또 300년 기다릴거야 뭐야 할텐데 싶었는데ㅋㅋㅋㅋ 뭐 판타지 주인공이 그렇게 쉽게 자기 목숨을 포기하면 이야기 진행이 안 되겠죠ㅋㅋㅋ 근데 진짜 에벌리 죽어버리면 복수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버렸다는 점에서, 약간 저랑 이 소설은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주인공이 싫어서가 아니라 빌런 엿먹이고 싶어서 주인공이 죽었으면 하는 독자.. 음.. 좋지 않네요..


 전설의 왕자가 너무 싫기 때문에, 그 자식 망하는 거 보려고 뒷 시리즈까지 계속 볼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자기만 너무 아프고 자기만 너무 불쌍해서 남들이야 죽든 말든, 불행하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놈을 정말 극혐하는데 딱 이런 놈이거든요. 어떻게 망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볼 거예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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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아이 백천수 씨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80
손서은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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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성장소설을 무척 좋아하는 편인데, 읽다보면 주인공과 함께 제 자신도 훌쩍 큰 것 같은 착시를 일으키잖아요~ㅋㅋㅋ 비록 제가 직접적으로 한 경험은 아니지만 책 속에서 주인공과 함께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던 간접 경험도 차곡차곡 제 안에 쌓여서 뭔가 아주 조금씩, 0.01mm씩이라고 변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누군가는 그 숫자가 의미 없다고 하겠지만, 그건 살면서 두고 봐야 할 일이죠. 아무튼! 저는 그래서 청소년 소설도 무척 좋아합니다. <착한 아이 백천수 씨>를 집어든 이유도 제목과 표지에서 강하게 풍기는 그 '성장'의 느낌 때문이었어요.


 제목에서 착하다고 상정된 아이는 보통 실제로 착하다기보다 착해야 한다고 몰아붙여진 케이스가 많은 것 같은데, 백천수는 정말로 착한 아이입니다. '착하다'의 정의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남을 쉽게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는 의미라면요. 백천수의 엄마인 강미숙은 착하다는 걸 그걸 욕으로 받아들일 거예요. 요즘 세상에 착하다는 말은 어리숙하고 멍청하다는 말과 동의어라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작가도 말했듯이, 선의는 언제나 필요합니다. 백천수 본인은 좀 고달플지 몰라도 저는 백천수가 정말로 착한 아이라서 정말 좋았어요.


 시작부터 폭탄을 터뜨리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아예 처음부터 '한국의 청소년들이 케냐의 아이를 죽였다' 하고 전세계적으로 보도가 되고, 아이들이 체포되는 모습을 보여줘요. 그리고 과거로 돌아가면 백천수도, 고승아도, 전혀 그런 사고를 칠 만한 아이들이 아닌 게 보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하고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에는 마거릿이 도대체 왜 등장하는지 몰랐는데, 보다보니 자연스럽게 인물들이 접점으로 모여들면서 사건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보이더라고요.


 <착한 아이 백천수 씨>는 굳이 따지자면 청소년 문학이겠지만, 읽다보면 이 안의 어른들도 모두 아직까지 질풍노도의 시기를 힘겹게 통과하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주인공인 백천수를 비롯해 아프리카로 함께 해외연수(?)를 떠난 고승아, 그리고 갈등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라몬 타사피는 모두 아직 10대인 미성년자들이지만 정작 이 모두를 연결시키고 사건의 중심이 되는 마거릿 부인과 그의 남편 존, 그리고 해리는 성년을 애저녁에 지나친 어른들입니다. 하지만 이 중 누구도 제대로 된 길을 찾지 못했고, 그래서 우왕좌왕하면서 실수하고 후회하는 걸 반복해요.


 이 작품은 누군가의 사소한 선의가 사람을 살릴 때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그 선의를 지지하고 싶어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누군가를 구원할 것이라는 오만한 믿음을 가지고 행동하는 건 절대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강조합니다. 비행 청소년을 구원하고 싶다는 마거릿의 열망이 사실은 얼마나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골칫거리가 되는지, 혹은 아프리카에 봉사를 오는 외국인들이 사실은 얼마나 아프리카를 망치고 있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보여줘요.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적선하는 건 정말 자기만족에 불과하다는 게 잘 보여서 좋았습니다. 받는 사람은 기가 막히게 그 시혜적인 오만함을 캐치하기 마련이거든요.



 부유한 나라 사람들은 배에 지방이 너무 꼈고 생각이 지나쳤다. 그러더니 아프리카 판타지에 시달렸다. 그들은 상상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을 가졌다고. 한데 몸은 나약하고 병들어 경제적인 도움이 필요하다고. 그들은 코흘리개 어린아이들의 콧물을 닦아 주려고 막무가내로 달려들었고, 자기들보다 날씬한 아프리카 여인들에게 버터와 과자와 온갖 정크푸드를 먹이고 싶어 안달했고, 곡괭이를 들고 땅을 파며 흉측한 건물을 지으러 몰려들었다. 또 있다. 세계 곳곳에서 몰려온 대학생들은 어린 학생들에게 수학을, 영어를, 세계사를 가르치고 싶어 했다. 배움만이 살길이라고 가르쳤다. 그들 또한 그렇게 배웠으니 똑같이 따라했다. 대학 때 딱히 야망을 펼칠 일이 없어서 그러기도 했다. 외국 대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가면 현지 교사들은 뒤처진 진도 때문에 애를 먹었다. - p.89 


 이런 태도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나요? 우리나라에도 흔하잖아요. 기초생활수급자 애들 밥 못 먹는 건 안쓰럽다고 하면서도, 걔네가 조금이라도 좋은 밥 먹고 좋은 거 쓰면 노발대발해서는 구청에 항의전화 넣는다는 사람들이 딱 이 짝이에요. 마거릿은 계속해서 대상만 바꿔가면서 이런 태도를 고집하는데, 그러다가 케냐에서 엄청난 사고를 저지른 후에야 비로소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착한 사람이 아니었어' 하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솔직히 저는 여기서 마거릿이 좀 더 나아가 무슨 행동을 할 줄 알았어요. 하지만.. 마거릿은 백천수와 고승아 대신 라몬 타사피를 찾아가더라고요. 정말 끝까지 기만적이다 싶어서 혀를 찼습니다;; 


 모든 게 완전히 깔끔하게 해결되지는 않았다는 느낌이에요. 백천수는 확실히 이전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엄청난 사건에 휘말린 데 후폭풍을 온전히 무사히 견뎌낼 수 있을까? 한국으로 돌아가면 온갖 루머와 악의적인 언론에 시달리지는 않을까? 현지에서도 오해가 그대로 유지된 채로 그냥 얼렁뚱땅 넘어갔는데 이게 정말 해피엔딩일까? 뭐 이런 생각이 계속 들더라고요. 주인공이 이전보다 더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그 모든 걸 감당하고 살아야 한다면 좀.. 많이 억울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책 자체가 얇기도 하고, 전개에 속도감이 있어서 후루룩 읽혀요. 청소년 문학 좋아하시는 분들은 한번쯤 읽어보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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