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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과 마르가리따 - 상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75
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러시아 고전문학 중 하나인 <거장과 마르가리따>. 저는 미하일 불가꼬프라는 작가를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됐는데 작가 소개를 읽어보니 굉장히 유명한 작가더라구요. 무려 솔제니친에 버금가는 작가라는 평이! 살아생전에도 유명했지만 <거장과 마르가리따>가 사후 26년만에 발표되면서 러시아 문학권은 물론이고 서구권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대요. 그런데 그런 소개가 없었어도 충분히 통할 만큼 소설 자체가 엄청 재밌었어요!
소설은 1) 악마 볼란드가 그 수하들과 함께 모스크바에 나타나서 사회를 혼란시킨다, 2)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를 만나고 심판하고 고뇌한다, 3) 본디오 빌라도를 가지고 소설을 쓴 '거장'이 위기에 처하자 그의 연인 마르가리따가 악마와 거래를 해서 거장을 구한다, 이 세 가지 큰 줄기가 서로 교차하면서 진행됩니다. 이 과정에서 1·2·3이 서로 겹쳐지면서 당대 러시아의 사회문제를 은근슬쩍 드러내요. 하지만 이 소설이 살아생전 발표되지 못했던 이유는 그게 아닐 겁니다. 아마 이 소설 전체가 어쨌거나 '악마', '사탄'의 존재를 인정하고 시작한다는 게 결정적이었겠구나 싶어요. 초반부터 누누히 얘기하지만, 당시 러시아는 유물론적인 가치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무신론만이 정답으로 여겨졌으니까요. 불가꼬프와, 누가 봐도 불가꼬프를 나타내고 있는 거장 캐릭터가 엄청나게 공격을 받았던 것도 이해가 됩니다. 교회만이 정답인 세계에서 '신은 없다!'고 외치는 거나 매한가지였겠죠. 이건 누가 봐도 '신앙인'의 원고거든요.
역사 속에서 예수와 본디오 빌라도를 불러와 현대 러시아의 모습을 풍자했다- 이렇게만 말하면 엄청 딱딱할 것 같은데, 은근히 웃기고 캐릭터성이 강해서 금방 스르륵 읽혀요! 상·하 두 권으로 나누어져 분량이 꽤 있는 편인데 마음 먹고 읽기 시작하니까 하루도 안 걸렸어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인공은 거장과 마르가리따지만, 의외로 둘의 비중은 크지 않고 오히려 악마인 볼란드와 그의 수하 꼬로비요프-아자젤로-베게모뜨 3인방의 비중이 큽니다. 악마 쪽 캐릭터가 워낙 확실하고 매력적이라 이쪽이 진주인공 같기도 해요. 표지에 나오는 고양이가 바로 베게모뜨입니다. 고양이 주제에 악마의 하수인 노릇을 톡톡히 하고 다니는 녀석이에요. 상권에서는 그냥 평범한 악마구나 싶은데 하권 가면 악마들 언제 나오나 계속 기다리게 된다니까요~ (아자젤로랑 베게모뜨랑 둘이 사격실력 가지고 내기하는 장면 정말 뭔가 기묘하고 웃기고 귀엽습니다.) 실제로 불가꼬프도 제목을 붙일 때 <대제상>이나 <사탄>, <검은 사도, 그가 나타나다> 같은 후보를 고려했다는 걸 보면 처음에는 분명 이쪽을 더 부각시키려고 했던 것 같아요.
특히 환상문학 특유의 '외부인이 볼 때는 전혀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되지만, 내부인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플롯이 좋았습니다. 예를 들어 정신병동에 환자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각자의 헛소리를 지껄이는데, 맥락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게 무슨 일인가 싶겠지만 독자는 약간의 힌트만으로도 그 사람이 누구이고, 앞서 무슨 일을 겪었다는 걸 다 알게 되는 식으로 전개되거든요. 다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진실을 말하는데 제3자가 들으면 미친 놈의 헛소리가 따로 없죠! 등장인물은 다들 어리둥절 혼란 속에 상황을 제대로 모르고, 독자는 안다는 것. 이게 은근히 매력포인트에요. 게다가 "오늘 저녁에 회의는 열리지 않을 겁니다. 안누쉬까가 벌써 해바라기 기름을 샀고 그것을 쏟았거든요" 이런 식으로 아무렇게나 툭 던진 것들이 나중에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건, SF나 시간여행에서 자주 만나볼 수 있는 장치라 더 흥미롭고요.
완결이 되서 책으로까지 나왔는데 '미완성'이라고 해서 의아했는데, 작가가 수정을 하던 중에 사망했대요. 그래서 곳곳에서 앞뒤가 안 맞는 문장이나 상황들이 발견되곤 합니다. 각주로 친절하게 설명을 해줘서 바로 알 수 있어요. 한낮이랬다가 오전 10시도 안 된 시간이랬다가, 창문으로 날아갔다고 했다가 문을 닫고 바깥으로 나왔다고 했다가, 각자 자기 안식처에서 조용히 죽었다고 했다가 뒤에는 사라졌다고 했다가, 심지어는 악마 쪽 주요 캐릭터 하나가 앞에서는 활약하다가 마지막 장면에서는 사라져요. 이야기의 완결성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지만 진짜로 작가가 제대로 끝까지 다 손봤다면 어떤 작품이 나왔을까 궁금해집니다.
각주가 꽤 많아요. 저 같은 경우는 무심코 흘려버릴 수도 있었던 포인트를 번역자가 세세하게 짚어주는 느낌이라 각주를 좋아하는데, 흐름이 끊겨서 싫으신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지명이나 이름 같은 건 그냥 넘기셔도 무방할 듯 해요! 각주가 많다는 건 반대로 말하자면 글을 읽는 데 그만큼 필요한 배경지식이 많다는 말이잖아요. 그래서 확실히 러시아 문화권에서 자란 사람이 읽으면 저보다 훨씬 많은 게 보이겠구나, 싶어서 좀 아쉽기도 했습니다. 고전 번역을 읽다보면 꼭 이렇게 깔려있는 문화적 코드들이 궁금해진다니까요! 각주로는 따로 설명되지 않은 부분인데, 소설 속에서 (악마가 주인공인 걸 감안해도) "알 게 뭐야? 악마나 알겠지!" 하는 식의 표현이 엄청나게 자주 등장하거든요. 볼란드가 악마인 걸 모를 때도 그냥 사람들이 숨쉬듯이 저렇게 말해서, 러시아에서는 일종의 관용구인가보다 하고 막연하게 짐작하고 있어요. 무신론이 대세였던 시절에도 언어에 남아있는 종교의 흔적이라니, 재밌지 않아요?!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사탄의 무도회 장면에서 약간의 인종차별적인 부분입니다. 러시아 작가가 만들어낸 사탄은 러시아의 문화와 역사의 영향을 받는다는 증명이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죽은 자들이 찾아오는 무도회에, 온갖 인종이 다 있다고 묘사가 분명히 되고는 있지만, 이름을 가지고 중요도 있게 등장하는 건 전부 유럽-러시아 백인뿐이에요. 흑인들은 그저 까만색 피부를 가지고 스쳐지나간다고 나오거나 혹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름도 없이 그저 시중이나 들고 칵테일이나 나르고 있어요;;; 차라리 하인의 인종을 말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흑인이라고 명시가 되어 있어서 흠칫했습니다. 소설 통틀어 흑인이라고 제대로 나오는 게 딱 그 장면뿐이라니.. 너무했어요 따흑..
러시아권 이름이 워낙에 헷갈려서 중간중간 혼란이 오는 것만 빼면, 굉장히 빠르게 쑥쑥 읽히는 책입니다. 저는 무신론자인데도 중간에 삽입된 거장의 소설도 성경 읽는 느낌으로 재밌게 잘 읽었어요. 오히려 이 소설 속 소설 부분은 성경과 다른 점이 많아 독실한 종교인이 읽으면 어떤 감상일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