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시를 걷는 여자들 - 도시에서 거닐고 전복하고 창조한 여성 예술가들을 만나다
로런 엘킨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0년 7월
평점 :
<도시를 걷는 여자들>은 제목부터 내용까지, 기대했던 바로 그 주제를 관통하는 책입니다. 다양한 시대와 다양한 도시에 살았던, 그리고 집 안에 머무르지 않고 거리로 뛰쳐나와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살았던 여성 예술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 여성들에 대해 설명하는 게 주된 목적은 아닙니다. 그들에 대한 단상이 들어가 있을 뿐, 어디까지나 작가 본인의 인생과 사상과 고민과 철학을 담고 있거든요. 물론 거기에는 앞서 걸었던 여성 선배들이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있긴 하죠.
에세이가 으레 그렇듯, 특별하게 가지는 줄거리나 명확한 갈등이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끊임없는 사유가 둥둥 떠다녀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공감'하면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글은 아닙니다. 꽤나 많은 여성 예술가의 작품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쏟아지기 때문에, 한 줄 한 줄 신경써서 읽지 않으면 흐름을 놓치기 십상이에요. 책 뒤편에 소개된 참조문헌/이미지 출처만 30페이지가 넘어갈 정도거든요. 개인적으로 출처표기가 이렇게 잘 되어있는 책 오랜만에 봐서 좋았습니다. (한국은 이 부분에 엄청 소홀해서 번역하면서 일부러 삭제하는 곳도 있대요. 인용출처 뺀다고 부피에 별 차이도 없는데 그러지 말았으면..) 아무튼 설명을 꽤 열심히 해주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르주 상드'나 '소피 칼', ''아녜스 바르다' 같은 예술가에 대해 잘 모르면 쏟아지는 사유의 폭격에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 거예요. 알면 읽는 속도가 훨씬 빨라질 거구요.
이 책은 어떤 면에서는 걷기에 대한 예찬입니다. '정처 없이 걸으면서 사유하는 자'라는 뜻의 프랑스 단어 '플라뇌르'를 여성형으로 바꾼 '플라뇌즈'에 대한 책이거든요. 산책자, 산보자, 걷는 사람. 플라뇌르는 길에서 대중에게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19세기 어느 순간까지는 길에서 여성은 너무 눈에 띄는 존재였고 동시에 보이지 않는 존재여서 플라뇌르가 될 수 없다고 배제당했습니다. 그렇지만 꾸준히 방에서 뛰쳐나와 걷기 시작하는 여성들이 있어왔고, 저자는 자신의 인생을 쭈욱 연장시켜 그들의 인생까지 가 닿게 만듭니다. 걷는 것에 대한 가치를 굉장히 높게 치는데, 이건 약간의 지리적 특권이 포함된 미학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프랑스처럼 산책하기 딱 좋은 기후에 자리잡은 나라가 아니라면, 플라뇌르가 되기는 쉽지 않겠다 싶거든요. 영하 30도에 가까운 추운 나라이거나 반대로 영상 40도에 가까운 더운 나라라면, 정처없이 쏘다니면서 인생과 철학에 대해 사유하는 게 자연스러운 선택지가 되지는 않겠죠. 이 부분에 대한 언급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없어서 좀 아쉬웠어요.
로런 엘킨이 걷고 싶어하는 도시는, 과거를 품고 역사를 드러내는 도시입니다. 읽다보면 이 사람이 왜 파리와 사랑에 빠졌는지 확실히 알겠어요. 어떤 도시를 원하는지도요. 단순히 풍광이 예쁘고, 깨끗하고, 깔끔한 도시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저자는 거리를 걸으면서 100년 전, 200년 전에 여기서 살고 저항하고 걷고 싸우고 외치고 죽어갔던 수많은 유령들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껴지는 도시를 원하거든요. 그게 바로 도시와 사랑에 빠지는 제1조건입니다. 그래서 본인이 태어나고 자란 미국 뉴욕이나, 천편일률적인 현대식 건물들로만 가득한 일본 도쿄에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어요. 천상 파리나 베네치아 같은 유럽의 도시에서 살아야 할 운명입니다. 파리를 걸으면서 68혁명을, 코뮈나르를, 1848년 혁명을 생각하고 그 흔적을 찾는 사람에게 모든 것이 그저 빠르게 현대화되고 흘러가는 도시는 별 매력이 없지 않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로런 엘킨이 서울에 왔으면 도쿄만큼이나, 아니 도쿄보다도 더 학을 떼고 싫어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서울도 딱히 걷기 좋은 도시가 아닐 뿐더러, 세계 어느 도시를 가도 비슷비슷한 빌딩숲으로 가득찬 느낌이 강하잖아요.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로런 엘킨의 눈으로 봤을 때입니다. 한국의 남쪽에서 태어나 성인이 되면서 서울로 흘러들어온 저 같은 사람이 보는 서울은 또 다르겠죠. 심리적 지리로만 따지면, 서울은 뉴욕과 비슷한 구석이 있어요. '모두가 무언가 야망을 품고 도망쳐오는 도시'. 그리고 외부에서 여기에 '살러' 왔지만 속한다고 느끼지는 못하는 인간이 걸으면서 체감하는 도시는 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꾸 운동화를 신고 거리로 뛰쳐나가서 이 획일화되고 무기질한 동네를 구석구석 돌아보고 싶어졌어요. 로런 엘킨이 바라보는 것처럼, 하지만 그녀는 절대로 바라볼 수 없는 방식으로, 나의 역사를 가진 채 둘러보는 서울은 어떨까? 그게 궁금해지더라고요.
요즘처럼 산책하기 딱 좋은 기온과 날씨일 때 이 책을 읽게 되어서 행운이었습니다. 자꾸 중간에 책을 덮고 '지금 동네 한 바퀴 돌고 올까' 하는 충동에 시달렸거든요. 실제로 몇 번 나갔다 오기도 했고요. 이 도시는 나에게 무엇인지, 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 내가 여기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머물고 어떻게 떠날 것인지, 이런저런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분명히 로런 엘킨에 대해 읽었는데, '내'가 새삼스레 궁금해지다니 정말 어떻게 된 일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