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점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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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야베 미유키처럼 작품이 끊이지 않는 작가를 좋아하는 건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게다가 미미여사는 연작시리즈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작가잖아요! 주인공에게 정이 담뿍 들어버려 '아 조금 더 만나고 싶은데' 하고 아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독자들과 함께 나이를 먹고 인생의 굴곡을 거치며 사건을 맴도는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미야베 월드 제2막이라고 불리는 '에도 시대 배경'의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화자와 청자가 1:1로 마주보고 괴담을 말하고 듣는, 조금은 별나고 이상한 자리로 유명한 미시마야 주머니 가게. <흑백>과 <안주>, <피리술사>와 <삼귀>에 이어 <눈물점>에서도 여전히 미시마야의 괴담 자리는 호황입니다. 다만 이번에는 놀랍게도 주인공이 바뀌었어요! 물론 그 전 시리즈에서부터 조금씩 조짐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동안 함께 괴담을 들으면서 든든한 동지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오치카가 없으니 조금은 쓸쓸하더라고요. 하지만 편집자 후기에서도 보이듯, 작가가 오치카에게도 사연에서 벗어나 행복을 거머쥘 기회를 주고 싶어했다니.. 오치카를 애정하는 팬으로서 기쁘게 보내줘야겠죠. 오치카 대신 청자로 앉게 된 이는 미시마야의 두번째 도련님 도미지로입니다. 집안을 이을 필요가 없어 유유자적하는 한량 둘째인데, 아무래도 괴담 자리에는 적당히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집안 살림에서는 적당히 거리가 있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낙점된 것 같아요.


 총 4개의 에피소드가 실려 있습니다. 확실히 에피소드의 성격이 좀 바뀌었어요. 만약 들어주는 상대방이 여자, 그것도 시집가지 않은 처녀였다면 상대가 차마 꺼내지 못했을 민망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자다운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나름 거칠게 살아온 남자가 여자에게 털어놓기 힘든 이야기도 있고요. 오치카가 '여자였기 때문에' 털어놓을 수 있었던 화자가 있었다면 반대로 도미지로가 '남자이기 때문에' 혹은 '한량이기 때문에' 털어놓을 수 있는 화자도 있다는 거죠. 괴담이 더 풍성해진 것 같아 좋기는 한데, 반대로 앞으로는 오치카에게만 말할 수 있었던 화자들은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다는 게 아닐까 싶어서 쓸데없는 걱정이 되기도 했어요. 


 [눈물점]이나 [시어머니의 무덤]은 조금 부조리하긴 하지만, 그래도 뒷맛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어쩄거나 듣고 버릴 수 있는 게 확실했거든요. [동행이인]은 상대적으로 무섭다기보다는 따뜻하고 다정한 괴담이었고요. 하지만 [구로타케 어신화 저택]은 여러모로 뒷맛도 개운치 않고 일본 내에서 종교를 다루는 태도 역시 신경이 쓰여서 계속 기억에 남아요. 여운이라기보다는 계속 곱씹어 생각하게 되는 맛이 있네요. 저도 특정 유일신 종교를 믿는 건 아니지만, 작품 속에서 일본인들이 그게 기복 신앙이라고 비난하는 태도는 좀 우습지 않나 싶었거든요. 일본인들이야말로 사방팔방 모든 신에 기복을 비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모든 곳에 다 기도를 올리고 참배를 드리잖아요;; 그리고 [구로타케 어신화 저택]의 화자는 시종일관 과거 회상 속에서 좀 밉살맞게 그려지고 있어서 읽으면서 저절로 한심한 마음이 들더라고요ㅋㅋㅋ 뭐, 반성하고 새사람이 됐다니 이제 된 건가 싶기도 하지만요.


 온갖 요괴와 귀신과 신이 나타나는 나라여서 여기저기서 괴담을 짜깁기하는 게 더 쉬울 텐데, 모든 에피소드가 창작이라는 게 정말 놀라워요bb 다채롭고 부조리하면서도 또 나름대로 그 안에서는 논리와 체계를 가진 괴담이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역시 현상보다는 해석하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석을 어떤 각도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같은 괴담이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나타나기도 하니까요. [동행이인]의 눈코입 없는 남자의 얼굴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처럼요. 그런 의미에서 미야베 미유키는 정말 탁월한 해석자죠! 괴담에서 이만큼 현실 세계를 읽어낼 수 있다는 게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그동안 미시마야 주머니 가게를 사랑하셨던 독자라면, 좀 더 색다른 느낌의 에피소드를 즐기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미시마야 시리즈를 모르신다면, 반대로 <눈물점>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거슬러 읽어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괴담을 사랑하신다면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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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이별 열린책들 세계문학 252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김진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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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리소설에도 여러 가지 하위장르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하드보일드'이다. 거칠고 비열하고 냉혹한 남자들의 세계에서, 외로운 한 마디 늑대처럼 홀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거리를 걷는 주인공. 술과 담배와 여자와 권력의 유혹이 끊임없이 들어오지만, 그 모든 것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뒷모습. 경찰과 검찰, 깡패와 범죄자가 뒤섞여 선과 악이 분명히 않은 세계의 구도자. 레이먼드 챈들러는 바로 그 '하드보일드'한 세계의 창조자이고, 탐정 필립 말로는 그 대표 격이다.


 <기나긴 이별>은 탐정 필립 말로가 우연찮게 만난 테리 레녹스라는 남자에게 우정과 호의를 느끼기 때문에 사건에 말려들게 된다. 필립 말로 시리즈의 거의 마지막 작품이기 때문에 (후속작이 있지만 챈들러가 완성시키기 전에 사망했다) 그 이전에 필립 말로 시리즈를 충실히 따라온 독자가 아무래도 좀 더 주인공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를 사랑하기가 쉽다. 만약 이 소설로 처음 필립 말로를 만났다? 그래도 물론 상관은 없다. 시리즈물이 으레 그렇듯,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난 독자를 위해서 작가는 묘사를 충분히 해주니까.


 하지만 그런 노력과 별개로, 이 작품 내에서 필립 말로의 심리를 이해하는 건 조금 어렵기도 하다. 나만 그럴 수도 있지만. 왜냐면 처음 만난 낯선 남자에게 느끼는 무조건적인 호의를 이해할 수가 없거든. 그냥 흔한 알콜중독자 술주정뱅이처럼 보이는데 왜 말로는 그렇게까지 테리 레녹스를 챙기는 걸까? 잘 모르는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질 않나, 총을 들고 집 앞에 나타난 그를 해외로 도피시키는 데 도움을 주질 않나, 그를 위해 온갖 협박과 수모를 감당하질 않나. 그저 '괜찮은 사람'을 만났다는 이유만으로는 좀 과한 것 같다. 하지만 이게 바로 하드보일드겠지.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데 이유는 필요없는 장르. 물론 동성애는 아니다. 그건 하드보일드의 세계에서 용납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정'으로 퉁쳐지는 그 무조건적인 호의와 헌신과 의리에는 이유가 필요 없다.


 여자 독자로서 하드보일드를 읽는 건 조금 서글픈 일이다. 이 세계에서 여자는 팜므파탈 아니면 투명인간이거든. 007 시리즈를 생각하면 된다. 본드걸은 제임스 본드와 썸을 타고 그의 이성애적 매력을 빛내주기 위해 존재할 뿐이잖아. 하드보일드 내의 모든 여성 캐릭터들이 딱 그렇다. <기나긴 이별>에서도 예외는 아니라서, 실비아 레녹스/린다 로링/에일린 웨이드 모두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이성애적인 매력을 뿜어대면서 남자를 홀리는 존재들이다. 나쁜 짓을 했든 하지 않았든 똑같다. 진정으로 필립 말로의 세계에서 호의와 애정을 받기는 글렀달까. 이 비열한 세계에서 비열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권리는 오직 남자들에게만 주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하드보일드가 매력적일 수 있는 건, 폭력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세상에서 거기 기대지 않고 정의를 추구하는 주인공이 뿜어내는 어떤 아우라 덕분이다. 뛰어난 사건 트릭도 물론 한 몫 하고! <기나긴 이별>에서는 두 가지 사건이 번갈아가면서 나오는데, 당연히 두 사건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걸 눈치챈다고 해도, 그 두 가지 사건이 어디서 어떻게 엮였으며 진실은 무엇일까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고. 그 외에도 소소한 수수께끼나 트릭이 꽤 있어서, 필립 말로가 속임수를 간파하고 위기를 헤쳐나가는 걸 보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예전에 비해 늙고 약해진 (물론 그 와중에도 타협은 하지 않는) 말로가 만약 계속 시리즈로 등장했다면 어떻게 변해갔을까 상상하는 건 덤! 아마 조금은 말랑해지지 않았을까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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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의 범죄
요코제키 다이 지음, 임희선 옮김 / 샘터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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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들의 범죄>는 아주 신선하고 새로운 트릭으로 독자의 허를 찌르는, 그런 종류의 미스터리는 아닙니다. 시대적 배경도 쇼와에서 헤이세이로 넘어가는 1988년이 배경이라, 최근에 출간되었는데도 옛날 이야기라는 느낌도 살짝 있고요. 추리소설 쪽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트릭을 사용했기 때문에 눈치가 좀 있으신 분들이라면 중간부터 대충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끝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만드는 건, 이 소설의 주요 여성 캐릭터들이 뿜어내는 생생함 때문일 거예요.


 총 3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부 그녀들의 사정, 2부 그녀들의 거짓말, 3부 그녀들의 비밀. 처음부터 사건이 이미 시작되고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1부에서 '진노 유카리'라는 주부와 '히무라 마유미'라는 독신녀가 어떻게 얽히게 되는지 보여주고, 2부에서는 시체가 발견되서 경찰이 수사를 하기 시작하며, 3부에서는 계속 오리무중이던 진실이 밝혀지는 식이에요. 소제목에 굉장히 충실한 편이라 좋기도 하고 아쉽기도 합니다. 2부 제목에 '거짓말'이 들어가다보니 여기서 진실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은 다 아니겠구나~ 하는 게 확 보여서 긴장감이 좀 떨어져요. 대신 구성이 어떻게 될지 딱 감이 잡히니까 더 편하게 술술 읽히는 건 있죠.


 한 사람의 어엿한 동반자가 아니라 그저 시댁의 하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아가는 유카리 심리묘사가 특히 좋았어요. 마유미 같이 결혼에 안달난 독신녀 여성은 일본 미디어나 대중매체에서 자주 보여주는 편인데, 결혼이 결코 정답이 될 수 없으며 결국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걸 깨닫고 실천하는 기혼 여성은 상대적으로 덜 보이는 것 같아요. 다른 나라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본이나 한국은 여성이 모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구조잖아요. 집 안에서 일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도 없고요. 아니, 주부 역시 직업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잡혀있지 않아요. 그러니 이미 결혼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면, 남들 눈에는 완벽해보이는 결혼생활 속에서 당사자가 어떤 막막한 '벽'을 느끼는 게 자연스럽죠.


 "내가 보기에 지금 자기는 그냥 진노 집안의 하녀야. 아내, 아니면 며느리라는 이름의 하녀. 도모는 자기 엄마한테 잘 맞춰 줄 수 있는 몸종이 필요했던 거 아냐?"

 하녀. 그 호칭이 지금의 유카리에게 제일 잘 들어맞는 것 같았다. 얘, 오늘은 욕실 청소를 해야겠더라. 얘, 오늘 조림은 간이 너무 짜게 되었구나. 여보, 이 와이셔츠 얼룩 좀 빼줘. - p.112


 읽으면 읽을수록 이 모든 여성들의 공통분모가 되는 남자, 진노 도모아키가 싫어집니다. 극혐이에요 진짜! 아내인 '진노 유카리'의 시선으로 봤을 때도 영 별로였는데, '히무라 마유미'의 범죄 목격담에서 분노했고, 거기에 소꿉친구 '다마나 미도리'의 기억까지 합쳐지니까... 정말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는 생각만 들더라고요. 거짓말은 또 어찌나 잘하는지! 그런데도 손꼽히는 명문가 집안에, 의사라는 직업에, 잘생기고 눈치빠르고 운동까지 잘하는 요령좋은 남자니 앞으로도 겉모습과 조건에 혹해 속아넘어가는 여자들이 많겠구나 싶어서 짜증나요ㅠ 이런 놈이 망해버리는 세상이 와야 하는데.. 언제쯤 올까요?ㅠ


 산뜻하게 책을 덮으며 쾌감을 느끼기엔 여러 가지로 걸리는 게 많아서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결국 정의가 실현된 것인가? 하면 그렇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진실이 밝혀지긴 하겠지만 그게 제가 바라던 결말은 아니라서 괜히 쓸쓸해져요. 이런 아수라장(?) 속에서 관련된 여자 모두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게 어불성설이긴 하지만요. 결국 모든 게 다 '돈'으로 귀착되는 게 현실적이면서도 좀 안타까워요..


 +) 작가가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새삼스레 비혼의지를 강화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ㅋㅋㅋ 진노 같은 놈팽이한테 속으면서 눈 먼 장님으로 가짜 행복을 누리면서 사느니 이 각박한 세상 혼자 어떻게든 악착같이 헤쳐나가 보겠습니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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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단어의 결정적 뉘앙스들 영어의 결정적 시리즈
케빈 강.해나 변 지음 / 사람in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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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에서 나고자라 영어를 공부한 지 대략 10년이 넘어가다 보면, 아무리 영어를 못한다고 해도 단어나 독해는 어느 정도 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주입식으로 달달 외운 탓인지 비슷비슷해 보이는 단어들이 참 헷갈려요. 국어도 마찬가지고, 모든 언어가 그렇겠지만, 영어에도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다른 뉘앙스를 가진 말들이 있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비영어권에서 캐치하기가 참 힘들더라고요. 영화나 드라마, 각종 컨텐츠를 보면서 그냥 '감'으로 때려맞출 수밖에 없죠. 그런 고민을 요즘 하고 있었던지라 이 책이 참 반가웠습니다. 제목부터 맘에 쏙 들어요ㅎㅎ

 


 중요도와 격식에 따라 1~4 챕터로 나누어져 있는데, 저는 특히 섬세하게 단어를 구분해야 하는 챕터 1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사실 중고등학교 수준을 뛰어넘을 정도로 어려운 고급 단어도 없거든요. 보면 다 아는 것들인데 미묘하게 어감이 차이가 나는 부분을 짚어줘서 좋았어요. 예를 들자면 Belive와 Trust는 둘 다 '믿다'라는 뜻이 있는데, 각각 어떨 때 쓸 수 있을까? 신을 믿는다고 할 때는 둘 중에 어떤 걸 써야 할까? 하는 거요.


 위에 크게 써져 있는 제목을 보고 본문을 보기 전에 잠깐 한 10초 정도 멈춰서 짐작해보면 더 재밌더라고요. 콕 짚어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가 미묘하게 차이를 느끼고 있던 단어들도 있었습니다. 워낙에 달달 외워놔서 용례가 입에 붙어버린 단어가 있잖아요. 'TV를 보다'고 할 때 자연스럽게 see 대신 watch를 쓰지만, 왜 그런지 설명할 수는 없었죠. 근데 그 이유를 설명해주니까 명확해져서 한결 더 쉽게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각 장마다 오른쪽 위를 보시면 QR코드가 있어서, 해당 장에 나오는 단어와 예문들이 어떻게 발음되는지 들어볼 수 있어요! 


 챕터 2~4는 헷갈리는 유의어인 만큼, 각 페이지마다 헷갈리는 상황에서는 이 단어부터 먼저 써라! 하고 아예 큼직하게 표시해줘서 좋았습니다. 뉘앙스를 캐치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벌어지는 다양한 상황에서 따라잡기 힘들 때가 많잖아요. 은근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뒷쪽에 인덱스도 있어서 책에 나오는 단어를 찾기 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냥 심심할 때 사전 뒤져보듯이 or 그냥 잡지에 실린 꼭지 기사 읽듯이 내키는 대로 하루에 몇 장씩 꾸준히 읽어나가면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이 책을 펼쳐보면서 내심 있겠거니~ 하고 기대했던 단어가 있는데 없어서 좀 아쉬웠습니다. 제가 마침 딱 궁금해하고 있던 단어였거든요. '의심하다'는 뜻의 doubt와 suspect의 차이! 왜 드라마에서 용의자를 의심하면서 doubt라고는 안 할까 궁금했거든요. 아마 생각만큼 자주 쓰이는 단어가 아니라서 책에는 빠졌나봐요. 결국 인터넷에서 찾아봤는데, doubt는 ~하지 않을 거라고 의심하는 거고, suspect는 ~했을 거라고 의심하는 거래요. 보통 드라마에서는 범죄를 했을 거라고 의심하기 때문에 suspect가 되는 거죠! 이건 책이랑은 전혀 상관없지만 혹시 저랑 비슷한 의문을 가지신 분이 계실까봐 달아둡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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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선 수학 - 수학이 판결을 뒤바꾼 세기의 재판 10
레일라 슈넵스.코랄리 콜메즈 지음, 김일선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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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에 선 수학>의 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수학이 판결을 뒤바꾼 세기의 재판 10'. 하지만 이건 상황을 아주 거칠게 요약한 것이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수학을 알았다면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세기의 범죄 10' 정도에 가까운 것 같아요. 제일 첫 장에 나와있는 폰지 사건의 경우 수학이 판결을 뒤집었다기보다는, 수학을 알았다면 애초에 그런 다단계 사기에 걸려들지 않을 수 있었다는 쪽에 가깝거든요. 다른 장에서도 어떤 사건의 경우 피해자와 가해자가 아주 명백하지만, 어떤 사건의 경우는 수학을 알고 정확한 확률을 계산해도 여전히 의문점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책 홍보를 위해 문구를 부러 강렬하게 선정한 것 같아요.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지?

 제가 읽으면서 가장 신기했던 건 2장 UC 버클리대학교 성차별 사건에 나왔던 '심슨의 역설'이었어요. 모든 인종의 학생 성적이 높아졌는데, 전체적으로는 평균이 그대로 계속 유지되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뒷부분을 읽기 전에 왜 그런지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역시나 잘 모르겠더라고요. 언뜻 생각했을 때는 전혀 말이 안 되는 일이 왜 벌어지는 걸까요?


 2002년 SAT 독해 부문의 평균 점수는 1981년과 똑같았다. 그러나 평가 위원회가 분류한 인종별 점수는 동일 기간 동안 백인 8점, 흑인 19점, 아시아계 27점, 푸레르토리코계 18점, 미국 인디언계 8점씩 상승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어떻게 각 집단의 점수는 향상되었는데 전체 평균은 21년간 변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 p.42


 책에 소개된 재판으로 바꿔 말하자면, 뽑을 수 있는 모든 학과에서 여학생을 많이 더 많이 뽑고 있는데  어떻게 전체적으로 여학생 합격률이 현저하게 더 낮을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통계를 내 접근하려고 하다 보니까 오히려 그 계산 안에 미처 넣지 못한 외부의 요소를 놓친다는 지점이 흥미로웠어요. 수학은 결코 만능 열쇠가 아니고, 모든 요소를 제대로 다 고려하지 않으면 엉뚱한 결론으로 우리를 안내할 수밖에 없다는 증거잖아요. 그리고, 만약 그런 맹점을 잘 알고 있는 누군가가 중간에서 교묘하게 장난을 친다면, 심지어 완전히 왜곡된 결과를 '팩트'로 믿게 될 수도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고요.


 '생일 문제' 같은 확률론은 은근히 많은 대중수학서에서 다루고 있는 부분이라 알고 있었는데, 그걸 뒤집으니까 또 새로운 문제가 되어서 재밌었습니다. '생일 문제'는 사람이 여러 명 있을 때, 생일이 같은 사람이 있을 확률이 50퍼센트가 되려면 도대체 몇 명이 모여야 할까? 하는 고전 수수께끼에요. 많은 사람들이 365명이나 그 절반인 183명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23명만 있으면 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직관이 사실 수학적으로는 어긋나는 대표적인 사례인데, 정작 생일 문제를 알아도 그 비슷한 현실 사례를 가져오면 저도 모르게 잘못 생각하게 되는 게.. 정확하게 생각하는 훈련이라는 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는 걸 다시 한 번 느끼게 됐어요.



직관은 정답이 아니다

 '생일 문제'를 뒤집은 건, 특정 날짜를 지정해놓고 - 1월1일이나 12월25일 같은 임의의 날짜 - 이 사람과 생일이 똑같을 확률이 50퍼센트인 사람이 방 안에 있으려면 몇명이 필요할까? 하는 문제입니다. '생일 문제'의 정답이 23으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 숫자였다면, 반대로 이건 23은 물론이고 183보다도 더 큰 253이 정답이에요.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아무 날짜나 생일이 같은 두 사람과, 특정한 날짜를 가진 생일이 같은 두 사람은 이렇듯 확률적으로 큰 차이를 보입니다. 이걸 현실에 적용한 게 바로 DNA 문제였어요. 범죄자의 DNA가 어떤 사람과 일치했을 때, 그 정확도는 얼마나 될까? 하는 문제요!


 과연 어느 쪽이 옳을까? 범인이 아닌 무고한 사람의 DNA를 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할 때 결과가 일치할 확률은 110만분의 1인가, 3분의 1인가? 핵심은 이 확률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있다. 둘 다 논리적이긴 하지만 어느 쪽도 푸켓이 범인인지 아닌지를 확실히 알려주진 못한다. 이 두 값은 서로 다른 값을 의미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 p.161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5장 다이애나 실베스터 사건에서 검사가 주장한 110만분의 1과 변호사가 주장한 3분의 1은 모두 틀린 확률이라고 합니다. 둘 다 용의자와 범죄 현장에 남겨진 DNA가 일치할 확률로 보기는 어렵다고 하네요. 164~167페이지에는 좀 더 정확하고 다양한 요소를 분석한 확률이 실려 있습니다. DNA 유전자 자리가 일치할 확률+그 사람이 백인일 확률+캘리포니아(범죄현장)에 거주하거나 출신일 확률+65세 이상의 성범죄자일 확률 등등을 모두 고려해서 계산을 해요. 누군가는 반드시 범인이 될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저자는 반대로 이 조건을 만족하는 또 다른 진범이 있을 확률을 계산해봅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70분의 1이라는 확률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건 말하자면 지금 잡힌 용의자가 범인이 아닐 확률이 최대 70분의 1이라는 거죠. 


 존 푸켓이 범인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가 받을 판결이 어떤 것이건 그가 무죄일 확률 이외의 다른 확률에 근거해서 판결이 내려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재판에서 수학이 활용된다면 올바르게 쓰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재판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셈 밖에는 되지 않는다. - p.167


 재판 과정에 쓰이는 수학을 대하는 저자의 대표는 시종일관 이렇습니다. 과학의 시대에 수학을 적극적으로 재판에 끌여들여야 한다면, 분명하고 정확한 계산과 확률과 숫자만 근거로 내세워야 한다는 것. 맞는 말이죠. 어떤 사람이 무죄일 확률이 110만분의 1이라는 것과 3분의 1이라는 것과 70분의 1이라는 건, 정말이지 하늘과 땅 차이잖아요. 우리는 좀 더 훈련받은, 섬세한, 정확한 분석을 할 줄 아는 눈을 필요로 해요! 




 사람들은 복잡해보이는 수식이 나오면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나오는 숫자가 뭐야?' 하고 그 과정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기 마련입니다. 책에서도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간 확률론이 굉장히 많이 나와요. 아예 대놓고 증거 조작을 했던 드레퓌스 사건은 제외하더라도, '범인처럼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성일 확률이 10분의 1이다' 같은 말도 안 되는 전제를 놓고 계산하는 콜린스 부부 사건 같은 케이스도 있습니다. 도대체 저 10분의 1이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알 수조차 없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재판 당시에는 저기에 딴지를 건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게 놀랍죠;;; 아마 다들 복잡해보이니까 일단 결론만 듣자고 생각한 게 아닐까 싶어요;;;


 책을 읽으면서 반성을 좀 했습니다. 전문가가 나와서 (사실은 수학 쪽 전문가가 아닐 확률이 상당히 높음) 이러이러할 확률은 몇분의 몇입니다~ 하고 선언하는 순간, 배심원들이나 법조계 사람들은 그 숫자를 의심없이 믿어버린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뭔가 복잡해보이고, 전문가가 계산했으니 어련히 맞겠지 하고 안일하게 생각한다는 거죠. 만약 저도 책에 나오는 사건들 중 하나에 배심원으로 들어갔다면 아마 똑같은 실수를 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어서 섬뜩했습니다. 좀 더 주의깊게 살피고, 특히! 특히! 특히! 전제가 되는 기본 확률이 어떤 식으로 선정되고 산출되었는지, 거기서 빠진 요소 혹은 인위적으로 더해진 요소는 없는지 다시 한번 내 머리로 생각해보는 과정을 꼭 훈련해야겠다 싶었어요.


 대중이 알아듣기 쉬우면서도 중요한 문제를 많이 다루고 있어서 좋았습니다. 저자가 법과 수학의 연계에 엄청나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앞으로도 꾸준히 책을 내줄 것 같은데, 앞으로 나올 다른 저서도 기대가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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