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이별 열린책들 세계문학 252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김진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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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리소설에도 여러 가지 하위장르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하드보일드'이다. 거칠고 비열하고 냉혹한 남자들의 세계에서, 외로운 한 마디 늑대처럼 홀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거리를 걷는 주인공. 술과 담배와 여자와 권력의 유혹이 끊임없이 들어오지만, 그 모든 것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뒷모습. 경찰과 검찰, 깡패와 범죄자가 뒤섞여 선과 악이 분명히 않은 세계의 구도자. 레이먼드 챈들러는 바로 그 '하드보일드'한 세계의 창조자이고, 탐정 필립 말로는 그 대표 격이다.


 <기나긴 이별>은 탐정 필립 말로가 우연찮게 만난 테리 레녹스라는 남자에게 우정과 호의를 느끼기 때문에 사건에 말려들게 된다. 필립 말로 시리즈의 거의 마지막 작품이기 때문에 (후속작이 있지만 챈들러가 완성시키기 전에 사망했다) 그 이전에 필립 말로 시리즈를 충실히 따라온 독자가 아무래도 좀 더 주인공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를 사랑하기가 쉽다. 만약 이 소설로 처음 필립 말로를 만났다? 그래도 물론 상관은 없다. 시리즈물이 으레 그렇듯,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난 독자를 위해서 작가는 묘사를 충분히 해주니까.


 하지만 그런 노력과 별개로, 이 작품 내에서 필립 말로의 심리를 이해하는 건 조금 어렵기도 하다. 나만 그럴 수도 있지만. 왜냐면 처음 만난 낯선 남자에게 느끼는 무조건적인 호의를 이해할 수가 없거든. 그냥 흔한 알콜중독자 술주정뱅이처럼 보이는데 왜 말로는 그렇게까지 테리 레녹스를 챙기는 걸까? 잘 모르는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질 않나, 총을 들고 집 앞에 나타난 그를 해외로 도피시키는 데 도움을 주질 않나, 그를 위해 온갖 협박과 수모를 감당하질 않나. 그저 '괜찮은 사람'을 만났다는 이유만으로는 좀 과한 것 같다. 하지만 이게 바로 하드보일드겠지.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데 이유는 필요없는 장르. 물론 동성애는 아니다. 그건 하드보일드의 세계에서 용납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정'으로 퉁쳐지는 그 무조건적인 호의와 헌신과 의리에는 이유가 필요 없다.


 여자 독자로서 하드보일드를 읽는 건 조금 서글픈 일이다. 이 세계에서 여자는 팜므파탈 아니면 투명인간이거든. 007 시리즈를 생각하면 된다. 본드걸은 제임스 본드와 썸을 타고 그의 이성애적 매력을 빛내주기 위해 존재할 뿐이잖아. 하드보일드 내의 모든 여성 캐릭터들이 딱 그렇다. <기나긴 이별>에서도 예외는 아니라서, 실비아 레녹스/린다 로링/에일린 웨이드 모두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이성애적인 매력을 뿜어대면서 남자를 홀리는 존재들이다. 나쁜 짓을 했든 하지 않았든 똑같다. 진정으로 필립 말로의 세계에서 호의와 애정을 받기는 글렀달까. 이 비열한 세계에서 비열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권리는 오직 남자들에게만 주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하드보일드가 매력적일 수 있는 건, 폭력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세상에서 거기 기대지 않고 정의를 추구하는 주인공이 뿜어내는 어떤 아우라 덕분이다. 뛰어난 사건 트릭도 물론 한 몫 하고! <기나긴 이별>에서는 두 가지 사건이 번갈아가면서 나오는데, 당연히 두 사건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걸 눈치챈다고 해도, 그 두 가지 사건이 어디서 어떻게 엮였으며 진실은 무엇일까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고. 그 외에도 소소한 수수께끼나 트릭이 꽤 있어서, 필립 말로가 속임수를 간파하고 위기를 헤쳐나가는 걸 보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예전에 비해 늙고 약해진 (물론 그 와중에도 타협은 하지 않는) 말로가 만약 계속 시리즈로 등장했다면 어떻게 변해갔을까 상상하는 건 덤! 아마 조금은 말랑해지지 않았을까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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