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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의 범죄
요코제키 다이 지음, 임희선 옮김 / 샘터사 / 2020년 8월
평점 :
<그녀들의 범죄>는 아주 신선하고 새로운 트릭으로 독자의 허를 찌르는, 그런 종류의 미스터리는 아닙니다. 시대적 배경도 쇼와에서 헤이세이로 넘어가는 1988년이 배경이라, 최근에 출간되었는데도 옛날 이야기라는 느낌도 살짝 있고요. 추리소설 쪽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트릭을 사용했기 때문에 눈치가 좀 있으신 분들이라면 중간부터 대충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끝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만드는 건, 이 소설의 주요 여성 캐릭터들이 뿜어내는 생생함 때문일 거예요.
총 3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부 그녀들의 사정, 2부 그녀들의 거짓말, 3부 그녀들의 비밀. 처음부터 사건이 이미 시작되고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1부에서 '진노 유카리'라는 주부와 '히무라 마유미'라는 독신녀가 어떻게 얽히게 되는지 보여주고, 2부에서는 시체가 발견되서 경찰이 수사를 하기 시작하며, 3부에서는 계속 오리무중이던 진실이 밝혀지는 식이에요. 소제목에 굉장히 충실한 편이라 좋기도 하고 아쉽기도 합니다. 2부 제목에 '거짓말'이 들어가다보니 여기서 진실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은 다 아니겠구나~ 하는 게 확 보여서 긴장감이 좀 떨어져요. 대신 구성이 어떻게 될지 딱 감이 잡히니까 더 편하게 술술 읽히는 건 있죠.
한 사람의 어엿한 동반자가 아니라 그저 시댁의 하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아가는 유카리 심리묘사가 특히 좋았어요. 마유미 같이 결혼에 안달난 독신녀 여성은 일본 미디어나 대중매체에서 자주 보여주는 편인데, 결혼이 결코 정답이 될 수 없으며 결국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걸 깨닫고 실천하는 기혼 여성은 상대적으로 덜 보이는 것 같아요. 다른 나라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본이나 한국은 여성이 모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구조잖아요. 집 안에서 일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도 없고요. 아니, 주부 역시 직업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잡혀있지 않아요. 그러니 이미 결혼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면, 남들 눈에는 완벽해보이는 결혼생활 속에서 당사자가 어떤 막막한 '벽'을 느끼는 게 자연스럽죠.
"내가 보기에 지금 자기는 그냥 진노 집안의 하녀야. 아내, 아니면 며느리라는 이름의 하녀. 도모는 자기 엄마한테 잘 맞춰 줄 수 있는 몸종이 필요했던 거 아냐?"
하녀. 그 호칭이 지금의 유카리에게 제일 잘 들어맞는 것 같았다. 얘, 오늘은 욕실 청소를 해야겠더라. 얘, 오늘 조림은 간이 너무 짜게 되었구나. 여보, 이 와이셔츠 얼룩 좀 빼줘. - p.112
읽으면 읽을수록 이 모든 여성들의 공통분모가 되는 남자, 진노 도모아키가 싫어집니다. 극혐이에요 진짜! 아내인 '진노 유카리'의 시선으로 봤을 때도 영 별로였는데, '히무라 마유미'의 범죄 목격담에서 분노했고, 거기에 소꿉친구 '다마나 미도리'의 기억까지 합쳐지니까... 정말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는 생각만 들더라고요. 거짓말은 또 어찌나 잘하는지! 그런데도 손꼽히는 명문가 집안에, 의사라는 직업에, 잘생기고 눈치빠르고 운동까지 잘하는 요령좋은 남자니 앞으로도 겉모습과 조건에 혹해 속아넘어가는 여자들이 많겠구나 싶어서 짜증나요ㅠ 이런 놈이 망해버리는 세상이 와야 하는데.. 언제쯤 올까요?ㅠ
산뜻하게 책을 덮으며 쾌감을 느끼기엔 여러 가지로 걸리는 게 많아서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결국 정의가 실현된 것인가? 하면 그렇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진실이 밝혀지긴 하겠지만 그게 제가 바라던 결말은 아니라서 괜히 쓸쓸해져요. 이런 아수라장(?) 속에서 관련된 여자 모두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게 어불성설이긴 하지만요. 결국 모든 게 다 '돈'으로 귀착되는 게 현실적이면서도 좀 안타까워요..
+) 작가가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새삼스레 비혼의지를 강화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ㅋㅋㅋ 진노 같은 놈팽이한테 속으면서 눈 먼 장님으로 가짜 행복을 누리면서 사느니 이 각박한 세상 혼자 어떻게든 악착같이 헤쳐나가 보겠습니다..!!!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