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관자 효과 - 당신이 침묵의 방관자가 되었을 때 일어나는 나비 효과
캐서린 샌더슨 지음, 박준형 옮김 / 쌤앤파커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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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관자'라는 말에는 항상의 죄책감과 비난이 따라다닙니다. 무언가를 방관한다는 말은, 그것이 잘못인 줄 알면서도 내버려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니까요. 누군가의 선행이나 배려를 방관한다는 말은 없잖아요. 누군가의 악행이나 차별, 잘못을 방관한다는 말은 있어도 말이에요. 살다보면 크고 작은 일에 목격자가 되기 마련입니다. 그때 방관자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내가 행동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방관자 효과>는 그 고민을 하시는 분들에게 딱 맞는 책이에요.


 저는 심리학 실험을 볼 때마다 '우리가 뻔히 다 아는 걸 사회적인 실험으로 증명한다'는 느낌을 종종 받곤 했습니다. 뻔히 보이는 결과를 데이터로 증명하기 위해 실험을 한다는 느낌이랄까요? 종종 연구자들의 예측과 정반대되는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어요. 이미 결과를 알고 있으니 더 뻔하게 느껴지는 거겠죠. 그리고 그런 심리가 있더라~ 하는 걸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무고한 타인을 해치라는 권위자의 명령에 저항하지 못한다' 하는 명제가 있고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걸 어떻게 요리조리 분석해서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 같은 사람이 많아서일까요? 이 책은 아주 친절하게 마지막 장에 '내가 지금까지 증명한 것처럼 인간이 이따위로 생겨먹었으니까!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행동하는 양심이 될 수 있는지 알려줄게!' 하고 ABC부터 알려줍니다. 나는 데이터나 숫자나 아무튼 증명 같은 건 됐고 그래서 뭘 할지 방향이나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분들은 마지막 장부터 읽어보셔도 무방할 정도에요. Part.1과 Part.2는 주로 왜 평범한 사람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침묵하는지, 왜 아무도 행동하지 않는지를 사회심리학적으로,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거든요. 인간은 침묵하는 방관자가 되기 쉽게끔 뇌가 설계되어 있다는 거죠. 그런 본성에도 불구하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점이 다를까?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자존감이 높을수록,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높을수록, 군중의 압박에 순응하려는 욕구가 적을수록,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어른을 보고 자랄수록 '도덕 저항가'가 되어 목소리를 낼 확률이 높아집니다. 실험과 뇌파를 통해 관찰한 이런 특성은 어느 정도 타고나는 측면이 있지만, 반대로 교육이나 계발을 통해 기를 수 있기도 합니다. 자존감이나 공감 능력을 키우는 것도 일종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걸 생각해보면, 사실 우리 모두는 도덕 저항가가 될 가능성을 이미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단지 아직까지는 훈련이 좀 더 필요할 뿐인 거예요.


 개인적으로 행동하는 양심을 보고 자란 사람들이 행동하는 양심이 될 확률이 높다는,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가 정말 뭉클하고 좋았습니다. 르완다 학살이나 홀로코스트 사건에서 자기 목숨을 걸고 살해당하는 사람들을 숨겨주고 도왔던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부모나 조부모가 과거에 비슷한 처지의 사람을 도운 걸 보고 자랐다는 거, 정말 멋지지 않아요? 세상은 이런 평범하지만 위대한 영웅들 덕분에 어떻게든 꾸역꾸역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저 역시 이런 사람이 되고 싶고, 제 다음 세대가 그런 모습을 많이 보고 자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내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지만, 누군가가 정돈된 언어와 정확한 데이터로 짚어줬으면 하는 주제를 쉽고 명료하게 담고 있는 책입니다. 방관자 효과라는 제목에 끌리신 분들이라면, 이 책이 분명히 도움이 될 거예요!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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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목소리를 듣는 것이 우리의 정의다 - 버닝썬 226일 취재 기록
이문현 지음, 박윤수 감수 / 포르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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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닝썬 사건에 대한 기록을 보다보면 '대한민국이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인 나라였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상식이라고 믿었던 것이 상식이 아니었다는 게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잖아요. 저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소위 높으신 분들의 전횡을 보면 악역이 너무 납작하다고 불평하곤 했었는데, 현실이 그보다 더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서울 강남 한복판 대형클럽에서 버젓이 마약을 팔고, 여자들에게 약을 먹여서 강간하고, 미성년자가 출입하고, 그러면서도 경찰이나 정부는 거기에 손 놓고 있고... 무슨 무법천지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지금 이 목소리를 듣는 것이 우리의 정의다>는 버닝썬 사건을 제대로 보고했던 MBC 기자의 기록입니다. 서문에서부터 지적하고 있지만, 지난 2년간 버닝썬 사건은 빠르게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어요. 그리고 그 사이에 몸통들은 모두 빠져나가고, 형량을 받은 사람들도 정말 쥐꼬리만큼 받았습니다. 버닝썬과 유착 관계가 있었다고 의심되는 경찰 중 아무도 실형 선고받지 않았고요. 관련해서 법안 발의된 건 결국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폐기되었습니다. 그렇게 세상이 시끄러웠던 거에 비하면 그 결과물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실해요. 적어도 이만큼 큰 사건이 터져서 사회 전체가 들썩거렸으면, 앞으로는 똑같은 사건이 나오지 않도록 재발 대책이라도 확실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타임라인 보는데 정말 열이 확 뻗치더라고요.


 기자 본인이 그동안 억울하게 당할 뻔 했던 사건도 몇 가지 등장하는데, 버닝썬 사건과 별개로 그 사건 전개도 흥미로웠습니다. 그게 어떻게 버닝썬 사건 조사와 연결되는지도 잘 보이고요. 읽을수록 정말 증거가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기자가 예전에 택시를 잡다가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한 적이 있는데, 3명의 상대방이 입을 맞추어서 기자가 먼저 일행을 폭행했다고 주장을 했다나요? 나중에 근처 CCTV 확보해서 넘기니까 그제서야 '한 번만 봐주세요' 하면서 연락이 왔더래요. 기자는 만약 그때 자기가 흥분을 했거나 CCTV 확보를 못 했으면 가해자가 되었을 거라고 회상합니다. 버닝썬 게이트의 시작이었던 김상교 씨 폭행사건도 마찬가지인데, 김상교 씨가 폭행을 당한 게 아니라 휘둘렀다고 주장하는 클럽+경찰 사람들이 한 20명 되니까, CCTV 없이 사람 바보 만드는 건 순식간이었다고 해요. 그나마 나중에 확보한 CCTV도 일부러 제대로 안 찍힌 각도에서, 다 삭제하고 조작한 걸 피해자가 법원의 도움을 받아 겨우 받았던 거고요. 도대체가!


 개인적으로 강간약물 GHB 관련한 조처도 너무 허술해서 많이들 관심 가져줬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그 정도로 유명하고 구하기 쉬운 약물에 대해서 국과수에서도 아는 게 없다니 말이나 됩니까? 몸을 못 가누고 쓰러지는 게 아니라, 그냥 기억만 잃게 하고 상대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하게 만드는 약물이라니... 이미 미국이나 독일에서는 관련 실험도 하고 캠페인도 벌이는 약물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정작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어서, 신고한 피해자들에게 "제 발로 들어갔으니 강간이 아니다" 같은 헛소리를 수사 담당자가 하고 있다니 너무 화가 나요. 상습적으로 강간을 하는 가해자들이 그게 어떤 효과가 있는지 경찰보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요. 게다가 정신이 돌아온 피해자한테 웃으면서 자기랑 같이 셀카를 찍어주지 않으면 집에 보내주지 않겠다고 막 협박하는 걸로 봐서는 경찰에게 어떤 포인트를 강조해야 자기가 빠져나갈 수 있을지 잘 아는 게 분명하고요. 이딴 범죄자들이 아무도 체포되지도, 처벌받지도 않는 시스템 아래서 살고 있다는 게.. 대한민국이 법치국가라면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죠. 정말 국회의원들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미 알고 있었던 사건이었지만, 하나하나의 조각이 아니라 전체적인 흐름을 따라가며 다시 한 번 짚어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처음에 김상교 씨가 클럽에서 일방적으로 폭행당한 사건이 불거지고, 경찰이 폭행 피해자를 가해자로 몰고 클럽을 아예 조사하지 않은 게 문제가 되고, 그걸 조사하는 기자에게 경찰과 클럽에서 어떻게 압박이 들어오고, 또 기사화되서 여론이 관심을 가지니 갑자기 피해자가 사실은 폭행이나 성추행의 가해자였다는 주장이 제시되고, 그런데 김상교 씨에게 성추행 당했다고 주장한 여성은 클럽 버닝썬에서 중국인 마약 딜러로 유명한 애나라는 여성이었고... 처음 사건을 인지했던 그 순간부터 어떤 식으로 조사를 했고 어떻게 사건이 커졌는지가 잘 서술되어 있어서 정리가 딱 되더라고요. 버닝썬 사건 여기저기 나오는 말이 너무 많아서 뭐가 뭔지 모르겠던데.. 하는 사람들에게 강력 추천합니다.


 버닝썬 게이트와 관련된 모든 범죄자들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을 때까지, 이런 기록이나 관련 이야기가 계속 끊임없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강남경찰서에서 일한다는 자부심 넘치시는 그 경찰 '강남맨'들도, 버닝썬 관계자도, 거기서 마약을 사고팔았던 마약사범들도, 약물로 여성들을 성범죄 피해자로 만든 강간범과 그 조력자들도... 재산 다 날리고 몇십 년 정도는 감옥에서 썩는, 그런 나라에서 살고 싶습니다. 제발 그렇게 되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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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의 정리 1 - 개정판
드니 게즈 지음, 문선영 옮김 / 자음과모음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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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정신없는 소설입니다. 사실 아직까지도 머릿속에서 내용 정리가 잘 되지 않고 있어요. 소설 자체의 미스터리도 3가지나 되는데, 거기에 이것저것 수학 공식과 수학자들 이야기가 껴 있거든요. 그 어떤 소설보다도 읽는 속도가 느렸던 소설이 아닐까 합니다. 수학 이야기가 나오기 전부터도 '내가 뭘 놓쳤나?' 하고 다시 돌아갔던 부분이 몇 부분이나 있었어요ㅋㅋㅋ 서술 자체가 순서대로 쭉 나오는 게 아니라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거든요.


 주인공 뤼슈 씨는 젊었을 적 '철학' 관련해서 꽤 날리던 노인장으로, 파리에서 조그마한 서점을 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수학'과 관련해서 또 한창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던 그로루브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로부터 갑작스럽게 엄청난 양의 수학 관련 장서를 넘겨받게 됩니다. 알고보니 이 친구는 그 직후에 바로 화재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마치 자신의 집에 화재가 나서 장서는 다 불타고 자신은 죽으리라는 것을 예감한 듯한 모양새죠. 이것이 첫 번째 미스터리입니다. 그로루브르 씨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또 한 편으로는 막스라는 꼬맹이가 있습니다. 뤼슈 씨네 가게에서 일하는 페테르 씨라는 여성의 열한 살짜리 막내아들입니다. 귀가 좀 불편해서 잘 들리지 않지만, 그 덕분인지 오히려 온 몸의 감각으로 상대의 말을 캐치하는 능력이 있어요. 이 아이는 벼룩시장을 쏘다니며 타고난 감각으로 보물을 발견하는 재능으로, 어느 날 벼룩시장 모퉁이에서 남자 둘에게서 폭행을 당하며 "살려줘!" 하고 외치던(?) 앵무새 한 마리를 구조합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앵무새는 보통 앵무새가 아니었고, 그래서 이 앵무새를 찾아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는 조직이 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미스터리입니다. 이들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마지막으로 페테르 씨의 아주 많이 생략된 가정사입니다. 페테르 씨는 어느 날 맨홀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맨홀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바로 결혼을 약속한 사람과 일방적으로 파혼을 했어요. 그 후 아홉 달이 지나 쌍둥이를 낳았고, 그리고 또 어느 날 갑자기 고아 소년 막스를 데려와서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저 이 부분에서 정말 이해가 안 되서 몇 번을 왔다갔다 하면서 읽었어요. 맨홀에 빠졌다가 나오고나서 파혼을 했고, 그 후 아홉 달이 지나서 쌍둥이를 낳았다- 이게 맨홀이 사실 물리적인 맨홀이 아니고 어디에 끌려가서 강간을 당했다는 걸 지금 은유한 걸까? 그래서 쌍둥이가 태어났고? 그런데 나만 그걸 못 알아들었나? 하고 혼란스러웠어요. 앞으로 돌아가봐도 '인부들이 뚜껑을 열어두고 깜빡 하고 안전 표지판을 안 세웠다' 같은 묘사가 있으니 진짜 맨홀인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이해를 접어두고 읽다 보니까 쌍둥이도 자기 출생의 비밀(?)을 궁금해하더라고요. 맨홀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자기들이 태어났냐면서요ㅋㅋㅋ 이것이 세 번째 미스터리입니다. 페테르 씨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2권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1권에서 세 가지 미스터리가 모두 해결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2권에서 어떤 식으로 해결이 될지 너무 궁금해요. 판타지스럽게 이어진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설 분위기 자체가 약간 빙글빙글 어리둥절 돌아가는 파리의 수학 수업 같은 느낌이거든요. 일단 앵무새부터가 범상치 않잖아요. 정말로 피타고라스 시대부터 살아온 수학의 메신저, 수학의 요정이라고 해도 아 그렇구나 할 것 같다니까요~ (진짜로 작가님이 그렇게 풀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뤼슈 씨가 해주는 철학과 교묘하게 합쳐진 수학과 수학자 얘기도 꽤 흥미로웠지만, 저는 일상에서 소소하게 수학 문제 내는 서술이 참 좋더라고요. 나도 풀 수 있는 퀴즈 같은 느낌? 그리고 수학 문제와 현실의 문제가 겹쳐지는 부분도 좋았습니다. 예를 들어 이등변 삼각형을 생각하면서 페테르 씨와 그의 두 쌍둥이, 그리고 막내아들을 생각하는 식으로요. 수학을 일상에 이런 식으로 겹쳐볼 수도 있구나, 이게 수학자의 감각이구나, 싶어서 재밌었어요. 읽는 내내 '수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정말 이런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한단 말이야?' 하면서 깜짝깜짝 놀라곤 했답니다. 탈레스 같은 사람들은 수학이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에 '삼각형의 내각'이라든지 '피라미드의 비례' 같은 걸 궁금해하고 있었다는 게 새삼 너무 신기했어요. 저는 평생 태어나서 수학 시간 외에는 수학적 고민을 해본 적이 없는데 말이죠.


 학창시절에 읽어봤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피타고라스의 정리 배울 때, 이 소설을 같이 읽었으면 훨씬 더 재밌게, 훨씬 더 오래 기억하지 않았을까요? 음.. 그때는 이 소설도 그냥 참고서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교과서에서 정해진 거, 원래 그런 거, 같은 느낌으로 배웠던 진리를 발견 당시로 돌아가 생각해보는 과정은 뭔가를 배우는 데 엄청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괜히 다시 한 번 수학교과서를 펼쳐보고 싶다는 충동 아닌 충동을 느끼게 해주는 소설입니다.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궁금하네요.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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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의 딸들, 여성 혐오의 역사 -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편견
잭 홀런드 지음, 김하늘 옮김 / ㅁ(미음)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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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백하건데, 저는 <판도라의 딸들, 여성 혐오의 역사>라는 제목의 책이라면 당연히 여성이 썼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고 여성 혐오에 맞서 싸우려는 사람이 남성인 경우를 주변에서 보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역시 세상은 넓고 예상을 뛰어넘는 사람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네요. 작가가 여성 혐오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고 하면, 당연히 여성 혐오를 정당화할 거라고 지레 짐작을 하며 말없이 윙크를 보내거나 고개를 끄덕였던 수많은 남성들이 이 책을 제발 꼭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차별과 편견은 자각과 반성 없이는 결코 무너지는 법이 없으니까요.


 여성 혐오의 기원을 파헤치고, 그게 어떻게 현재까지 이어지는지 살펴보는 과정이 뭐가 중요할까요? 저는 그 이유가 역사와 문화라는 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게, 공기처럼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완전히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끔 한국이 이렇구나, 나는 이렇구나, 하는 것을 다른 나라 다른 사람을 보고서야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생각해보지도 않은 문제에 대해서 말이에요. 딛고 선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보면 정말로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풀 수 있을지 막막해집니다. 여성 혐오는 인종 차별보다도 훨씬 더 자각하거나 인지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다못해 신화나 종교 속에서도 온갖 방법으로 여성을 하등하고 미천한 존재로 격하시키고 있잖아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살펴보면 '태초에 판도라가 있었다'나 마찬가지죠. 판도라가 상자를 열어서 인간에게 고통을 가져다줬다 이겁니다. 기독교를 보면 '하와가 아담을 타락시켰다' 하는 버전이 있고요. 기독교뿐만 아니라 같은 뿌리를 둔 유대교,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반대로 완벽한 성녀를 내세워 실존하는 모든 여성을 모두 비하시키는 방법도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처럼요. 저는 성당에 다녔으면서도 성모 마리아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신의 어머니'의 위치를 차지했는지 전혀 몰랐지 뭐예요. 마리아가 처녀인지 아닌지, 언제 어떤 순간에도 존재했던 신의 어머니가 어떻게 될 수 있는지, 모두 높으신 주교님들의 종교 회의를 거쳐 결정되었다는 거~ 만약 거기서 성모 반대론자 힘이 더 강했으면 지금쯤 마리아라는 '원죄 없이 태어난 유일한 여성'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거~


 그리스-로마를 거쳐 기독교-중세-마녀사냥을 짚어보고, 문학과 철학에서 내재화된 여성 혐오를 들여다보면서 그에 영향을 받고 자란 온갖 독재자들이 여성을 어떻게 자궁 취급했는지를 연결시키는 솜씨가 정말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서 놀라울 지경입니다. 게다가 이런 끔찍한 역사가 지금 전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논쟁 중 하나인 여성의 '신체적 선택권', 즉 낙태에 대한 이슈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볼 수 있어요. 한마디로, 지금 낙태 논쟁은 생명에 대한 논쟁이 전혀 아닌 거죠. 낙태 반대론자들이 주장하는대로 이게 생명에 대한 이슈가 되려면, 그들이 잉태중인 태아 이외에 다른 생명을 똑같이 존중해야 하거든요.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증거들이 눈만 돌리면 쏟아져 나오잖아요. 막상 태어나 존재하는 생명은 전혀 존중하지 않지만, 여성의 몸 안에 있을 때의 생명만은 존중합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어요? 어휴.


 혐오와 차별과 편견의 역사는,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인식하고 분쇄하기 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고대부터 굴려온 여성 혐오의 눈덩이가 엄청난 크기로 불어나 우리를 덮치고 있어요. 사실 읽고 나면 좀 막막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촘촘하게 짜여진, 고대 신화부터 일상의 종교까지 온갖 곳을 파고든 여성 혐오를 어떻게 벗겨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고민이 되거든요. 책을 읽기 전에도 알긴 했지만 그래도 눈앞에서 야 잘 봐봐 이건 이런 줄기에서 이렇게 생긴 차별이야, 이걸 극복하려면 인식 자체를 바꿔야 돼, 하고 짚어주는 거랑 그 무게감이 달라요ㅠ 뭐 계속해서 차별해봐라 인류 다함께 멸절밖에 더 하겠냐 싶은 생각도 들지만요ㅋㅋㅋ


 지금 이 후기를 쓰고 있는 순간에..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해버렸네요.. 책 속에 묘사된 탈레반의 정책과 사상을 되짚어봅니다. 그 사상이 탄생하게 된 과정도요.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제발 무사하기를, 살아남기를, 해방되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현대에도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 빌어 먹을 여성 혐오로부터 우리 모두가 탈출할 수 있기를.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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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 한 권으로 읽는 오리지널 명작 에디션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서상원 옮김 / 스타북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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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나 카레니나>는 첫 문장이 워낙 유명한데, 번역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느낌으로 달라지는 게 재미있습니다. 이 버전에서는 '행복한 가정은 살아가는 모습이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서로 다른 모양으로 괴로워하는 법이다.' 이렇게 번역되었네요. 저는 이 문장을 처음 만났을 때 정말 거장의 표현력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무릎을 쳤답니다. 주변을 봐도 그렇잖아요. 행복한 가정은 보통 경제적인 문제도 없고, 다들 서로 사랑하고, 구성원들이 건강하고.. 뭐 이런 식으로 '큰 문제가 없는 상태'인 경우가 많죠. 반면에 불행한 가정은 경제적인 문제로, 배우자가 바람을 피워서, 아이가 학교에 적응을 못해서, 누가 큰 병을 얻어서, 서로 성격이 맞지 않아서.. 등등 온갖 방면에서 다양한 문제들이 튀어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보통 대부분의 가정은 행복한 잠깐을 빼면 불행해요. 문제가 없는 상태가 유지되는 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니까요. 


 거장의 작품이라는 게 으레 그렇지만, 사실 작가 자체는 옛날 가치관을 가진 옛날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여성 인물이 살아있음을 느낄 때 정말 신기합니다. 통찰력을 발휘하다보니 뜻밖에 인물이 입체적이고 생생해지곤 하잖아요. <맥베스>에서 레이디 멕베스가 그렇고,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도 그렇죠. 전형성을 탈피하다보니, 현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 그때 그 시절 사람들의 판단과는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게 되곤 합니다. 마지막에 안나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걸 누군가는 '사랑을 택해 가정을 뛰쳐나간 여자의 종말'로 보기도 하고, 누군가는 '브론스키에 대한 안나의 복수'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저는 안나의 오락가락하는 심리를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세상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톨스토이가 결코 자살을 미화한 게 아닌데도 그렇게 느껴졌어요. 


 제가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워하는 부분은, 남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속마음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면 세상 모두가 모순투성이에 지저분하고 불쾌한 감정의 찌거기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는 겁니다. 주인공인 안나와 그 주변인물인 브론스키, 카레닌은 물론이고 심지어 작가가 굉장히 긍정적인 남성상으로 그리는 레닌마저도 그래요. 자신의 청혼을 거절한 여성이 괴로워했으면, 불행했으면 하는 마음을 한구석에 품고 있으면서도 그 이유가 다른 남성이 그녀를 거절해서라는 사실에는 모욕감을 느끼는 모습 같은 것만 봐도 그렇죠.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아무도 내 마음을 몰랐으면 하는 그런 '깔끔하지 못한' 부분이 여과없이 드러납니다. 모두가 서로의 속마음을 여과없이 들여다볼 수 있다면, 세상은 정말 지옥이 될 것 같아요ㅋㅋㅋ 제 안에서 발견해도 싫은데, 남에게서 발견하는 그런 찌꺼기들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어요?


 소설이 아니라 2차 창작된 작품에서는 이만큼 자세하게 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할 수가 없어서, 브론스키나 카레닌이 좀 미화되는 면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브론스키는 안나를 사랑하고 또 진심이지만, 동시에 안나가 자신의 자유를 전혀 제한할 수 없고 그런 기미가 보이면 안나를 내심 귀찮아하기도 하거든요. 안나와 함께하게 되길 너무나 바랐지만, 막상 그게 이루어지자 별로 행복하지도 않아서 떨떠름해 하고요. 결혼 생각이 전혀 없었고 그냥 밀회를 즐기는 상태가 계속 지속되리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도 있고요. 그래서 안나가 임신을 고백했을 때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한번도 생각도 안 해봤던 일을 덜컥 입 밖에 내고 나서는 어어, 하고 상황에 이끌려 갑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면 솔직히 좀 한심해요. 게다가 안나 이전에 키티를 가지고 적당히 장난치던 걸 생각하면 더더욱 '나를 사랑한다고 해서 덜컥 그 말을 믿고 인생을 내맡기면 안되는 남자'다 싶어집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심리를 하나하나 입 밖에 꺼내놓는 게 아닌 만큼, 영상이나 무대로 바꾸다보면 상대적으로 낭만성이 더 강화되는 것 같아요. 문장을 읽다보면 환멸감이 들 정도라니까요!


 안나가 막판에 의부증 비스무리한 상태로 브론스키를 닥달하게 되는 것도, 브론스키가 믿음직스럽지 못한 남자라는 자각이 있어서겠죠. 물론 사회문화적으로 안나가 설 자리가 너무나 없었다는 게 제일 중요한 이유겠지만요. 안나에게는 브론스키 외에 아무런 사회적 관계라는 게 없잖아요. 여자라서 직업을 따로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상류층 여성으로서 남은 건 사교계 활동뿐인데 거기서는 지금 아예 배척당하는 상태고, 브론스키 집에서는 아예 브론스키한테 다른 백작 영애 소개시켜줘서 안나 버리라고 압박 넣고... 브론스키 역시 안나를 선택함으로써 잃은 게 있지만 (안나를 계속 만나기 위해 상사 눈 밖에 나면서까지 승진을 거절한다든가) 아직 얼마든지 돌아갈 구멍이 많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안나는 정말이지 브론스키가 떠나면 남는 게 없어요. 그런 상황이다보니 자기가 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닥달해놓고 또 뒤돌아서서 후회하고, 스스로를 미워하게 되고요.


 안나가 기차에 뛰어든 게 브론스키에 대한 복수심이 어느 정도 작용한 건 맞아요. 브론스키가 안나의 시신을 보고 '당신 후회할 거야' 하고 경고했던 안나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기도 하고요. 하지만 워낙에 안나가 이런저런 사회적 시선과 오락가락하며 통제되지 않는 스스로의 마음에 고통받으며 '끝'을 바랐던 걸 생각하면, 역시 스스로를 자유롭게 풀어주고 싶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방식이 옳았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정신적으로 쇠약한 상태의 사람에게 건강한 사람이 하듯 '이겨내!' 하고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버티고, 버티고, 버티고, 버텼지만... 그 누구라도 어느 순간에는 끊어집니다. 그 순간이 오기 전에 붙잡아주는 게 주변 사람의 할 일이겠죠.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요.


 아마 톨스토이가 지금 다시 태어나 <안나 카레니나>를 썼다면 결말이 바뀌었겠죠? 지금은 여성에게 19세기보다는 많은 기회가, 많은 관계가, 많은 가능성이 부여된 사회니까요. 언젠가는 안나가 카레닌도, 브론스키도, 죽음도 떨치고 일어나 홀로 서 있는 버전도 한 번 보고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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