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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 한 권으로 읽는 오리지널 명작 에디션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서상원 옮김 / 스타북스 / 2021년 7월
평점 :
품절
<안나 카레니나>는 첫 문장이 워낙 유명한데, 번역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느낌으로 달라지는 게 재미있습니다. 이 버전에서는 '행복한 가정은 살아가는 모습이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서로 다른 모양으로 괴로워하는 법이다.' 이렇게 번역되었네요. 저는 이 문장을 처음 만났을 때 정말 거장의 표현력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무릎을 쳤답니다. 주변을 봐도 그렇잖아요. 행복한 가정은 보통 경제적인 문제도 없고, 다들 서로 사랑하고, 구성원들이 건강하고.. 뭐 이런 식으로 '큰 문제가 없는 상태'인 경우가 많죠. 반면에 불행한 가정은 경제적인 문제로, 배우자가 바람을 피워서, 아이가 학교에 적응을 못해서, 누가 큰 병을 얻어서, 서로 성격이 맞지 않아서.. 등등 온갖 방면에서 다양한 문제들이 튀어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보통 대부분의 가정은 행복한 잠깐을 빼면 불행해요. 문제가 없는 상태가 유지되는 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니까요.
거장의 작품이라는 게 으레 그렇지만, 사실 작가 자체는 옛날 가치관을 가진 옛날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여성 인물이 살아있음을 느낄 때 정말 신기합니다. 통찰력을 발휘하다보니 뜻밖에 인물이 입체적이고 생생해지곤 하잖아요. <맥베스>에서 레이디 멕베스가 그렇고,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도 그렇죠. 전형성을 탈피하다보니, 현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 그때 그 시절 사람들의 판단과는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게 되곤 합니다. 마지막에 안나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걸 누군가는 '사랑을 택해 가정을 뛰쳐나간 여자의 종말'로 보기도 하고, 누군가는 '브론스키에 대한 안나의 복수'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저는 안나의 오락가락하는 심리를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세상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톨스토이가 결코 자살을 미화한 게 아닌데도 그렇게 느껴졌어요.
제가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워하는 부분은, 남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속마음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면 세상 모두가 모순투성이에 지저분하고 불쾌한 감정의 찌거기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는 겁니다. 주인공인 안나와 그 주변인물인 브론스키, 카레닌은 물론이고 심지어 작가가 굉장히 긍정적인 남성상으로 그리는 레닌마저도 그래요. 자신의 청혼을 거절한 여성이 괴로워했으면, 불행했으면 하는 마음을 한구석에 품고 있으면서도 그 이유가 다른 남성이 그녀를 거절해서라는 사실에는 모욕감을 느끼는 모습 같은 것만 봐도 그렇죠.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아무도 내 마음을 몰랐으면 하는 그런 '깔끔하지 못한' 부분이 여과없이 드러납니다. 모두가 서로의 속마음을 여과없이 들여다볼 수 있다면, 세상은 정말 지옥이 될 것 같아요ㅋㅋㅋ 제 안에서 발견해도 싫은데, 남에게서 발견하는 그런 찌꺼기들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어요?
소설이 아니라 2차 창작된 작품에서는 이만큼 자세하게 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할 수가 없어서, 브론스키나 카레닌이 좀 미화되는 면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브론스키는 안나를 사랑하고 또 진심이지만, 동시에 안나가 자신의 자유를 전혀 제한할 수 없고 그런 기미가 보이면 안나를 내심 귀찮아하기도 하거든요. 안나와 함께하게 되길 너무나 바랐지만, 막상 그게 이루어지자 별로 행복하지도 않아서 떨떠름해 하고요. 결혼 생각이 전혀 없었고 그냥 밀회를 즐기는 상태가 계속 지속되리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도 있고요. 그래서 안나가 임신을 고백했을 때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한번도 생각도 안 해봤던 일을 덜컥 입 밖에 내고 나서는 어어, 하고 상황에 이끌려 갑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면 솔직히 좀 한심해요. 게다가 안나 이전에 키티를 가지고 적당히 장난치던 걸 생각하면 더더욱 '나를 사랑한다고 해서 덜컥 그 말을 믿고 인생을 내맡기면 안되는 남자'다 싶어집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심리를 하나하나 입 밖에 꺼내놓는 게 아닌 만큼, 영상이나 무대로 바꾸다보면 상대적으로 낭만성이 더 강화되는 것 같아요. 문장을 읽다보면 환멸감이 들 정도라니까요!
안나가 막판에 의부증 비스무리한 상태로 브론스키를 닥달하게 되는 것도, 브론스키가 믿음직스럽지 못한 남자라는 자각이 있어서겠죠. 물론 사회문화적으로 안나가 설 자리가 너무나 없었다는 게 제일 중요한 이유겠지만요. 안나에게는 브론스키 외에 아무런 사회적 관계라는 게 없잖아요. 여자라서 직업을 따로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상류층 여성으로서 남은 건 사교계 활동뿐인데 거기서는 지금 아예 배척당하는 상태고, 브론스키 집에서는 아예 브론스키한테 다른 백작 영애 소개시켜줘서 안나 버리라고 압박 넣고... 브론스키 역시 안나를 선택함으로써 잃은 게 있지만 (안나를 계속 만나기 위해 상사 눈 밖에 나면서까지 승진을 거절한다든가) 아직 얼마든지 돌아갈 구멍이 많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안나는 정말이지 브론스키가 떠나면 남는 게 없어요. 그런 상황이다보니 자기가 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닥달해놓고 또 뒤돌아서서 후회하고, 스스로를 미워하게 되고요.
안나가 기차에 뛰어든 게 브론스키에 대한 복수심이 어느 정도 작용한 건 맞아요. 브론스키가 안나의 시신을 보고 '당신 후회할 거야' 하고 경고했던 안나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기도 하고요. 하지만 워낙에 안나가 이런저런 사회적 시선과 오락가락하며 통제되지 않는 스스로의 마음에 고통받으며 '끝'을 바랐던 걸 생각하면, 역시 스스로를 자유롭게 풀어주고 싶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방식이 옳았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정신적으로 쇠약한 상태의 사람에게 건강한 사람이 하듯 '이겨내!' 하고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버티고, 버티고, 버티고, 버텼지만... 그 누구라도 어느 순간에는 끊어집니다. 그 순간이 오기 전에 붙잡아주는 게 주변 사람의 할 일이겠죠.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요.
아마 톨스토이가 지금 다시 태어나 <안나 카레니나>를 썼다면 결말이 바뀌었겠죠? 지금은 여성에게 19세기보다는 많은 기회가, 많은 관계가, 많은 가능성이 부여된 사회니까요. 언젠가는 안나가 카레닌도, 브론스키도, 죽음도 떨치고 일어나 홀로 서 있는 버전도 한 번 보고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