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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목소리를 듣는 것이 우리의 정의다 - 버닝썬 226일 취재 기록
이문현 지음, 박윤수 감수 / 포르체 / 202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버닝썬 사건에 대한 기록을 보다보면 '대한민국이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인 나라였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상식이라고 믿었던 것이 상식이 아니었다는 게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잖아요. 저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소위 높으신 분들의 전횡을 보면 악역이 너무 납작하다고 불평하곤 했었는데, 현실이 그보다 더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서울 강남 한복판 대형클럽에서 버젓이 마약을 팔고, 여자들에게 약을 먹여서 강간하고, 미성년자가 출입하고, 그러면서도 경찰이나 정부는 거기에 손 놓고 있고... 무슨 무법천지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지금 이 목소리를 듣는 것이 우리의 정의다>는 버닝썬 사건을 제대로 보고했던 MBC 기자의 기록입니다. 서문에서부터 지적하고 있지만, 지난 2년간 버닝썬 사건은 빠르게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어요. 그리고 그 사이에 몸통들은 모두 빠져나가고, 형량을 받은 사람들도 정말 쥐꼬리만큼 받았습니다. 버닝썬과 유착 관계가 있었다고 의심되는 경찰 중 아무도 실형 선고받지 않았고요. 관련해서 법안 발의된 건 결국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폐기되었습니다. 그렇게 세상이 시끄러웠던 거에 비하면 그 결과물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실해요. 적어도 이만큼 큰 사건이 터져서 사회 전체가 들썩거렸으면, 앞으로는 똑같은 사건이 나오지 않도록 재발 대책이라도 확실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타임라인 보는데 정말 열이 확 뻗치더라고요.
기자 본인이 그동안 억울하게 당할 뻔 했던 사건도 몇 가지 등장하는데, 버닝썬 사건과 별개로 그 사건 전개도 흥미로웠습니다. 그게 어떻게 버닝썬 사건 조사와 연결되는지도 잘 보이고요. 읽을수록 정말 증거가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기자가 예전에 택시를 잡다가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한 적이 있는데, 3명의 상대방이 입을 맞추어서 기자가 먼저 일행을 폭행했다고 주장을 했다나요? 나중에 근처 CCTV 확보해서 넘기니까 그제서야 '한 번만 봐주세요' 하면서 연락이 왔더래요. 기자는 만약 그때 자기가 흥분을 했거나 CCTV 확보를 못 했으면 가해자가 되었을 거라고 회상합니다. 버닝썬 게이트의 시작이었던 김상교 씨 폭행사건도 마찬가지인데, 김상교 씨가 폭행을 당한 게 아니라 휘둘렀다고 주장하는 클럽+경찰 사람들이 한 20명 되니까, CCTV 없이 사람 바보 만드는 건 순식간이었다고 해요. 그나마 나중에 확보한 CCTV도 일부러 제대로 안 찍힌 각도에서, 다 삭제하고 조작한 걸 피해자가 법원의 도움을 받아 겨우 받았던 거고요. 도대체가!
개인적으로 강간약물 GHB 관련한 조처도 너무 허술해서 많이들 관심 가져줬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그 정도로 유명하고 구하기 쉬운 약물에 대해서 국과수에서도 아는 게 없다니 말이나 됩니까? 몸을 못 가누고 쓰러지는 게 아니라, 그냥 기억만 잃게 하고 상대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하게 만드는 약물이라니... 이미 미국이나 독일에서는 관련 실험도 하고 캠페인도 벌이는 약물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정작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어서, 신고한 피해자들에게 "제 발로 들어갔으니 강간이 아니다" 같은 헛소리를 수사 담당자가 하고 있다니 너무 화가 나요. 상습적으로 강간을 하는 가해자들이 그게 어떤 효과가 있는지 경찰보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요. 게다가 정신이 돌아온 피해자한테 웃으면서 자기랑 같이 셀카를 찍어주지 않으면 집에 보내주지 않겠다고 막 협박하는 걸로 봐서는 경찰에게 어떤 포인트를 강조해야 자기가 빠져나갈 수 있을지 잘 아는 게 분명하고요. 이딴 범죄자들이 아무도 체포되지도, 처벌받지도 않는 시스템 아래서 살고 있다는 게.. 대한민국이 법치국가라면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죠. 정말 국회의원들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미 알고 있었던 사건이었지만, 하나하나의 조각이 아니라 전체적인 흐름을 따라가며 다시 한 번 짚어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처음에 김상교 씨가 클럽에서 일방적으로 폭행당한 사건이 불거지고, 경찰이 폭행 피해자를 가해자로 몰고 클럽을 아예 조사하지 않은 게 문제가 되고, 그걸 조사하는 기자에게 경찰과 클럽에서 어떻게 압박이 들어오고, 또 기사화되서 여론이 관심을 가지니 갑자기 피해자가 사실은 폭행이나 성추행의 가해자였다는 주장이 제시되고, 그런데 김상교 씨에게 성추행 당했다고 주장한 여성은 클럽 버닝썬에서 중국인 마약 딜러로 유명한 애나라는 여성이었고... 처음 사건을 인지했던 그 순간부터 어떤 식으로 조사를 했고 어떻게 사건이 커졌는지가 잘 서술되어 있어서 정리가 딱 되더라고요. 버닝썬 사건 여기저기 나오는 말이 너무 많아서 뭐가 뭔지 모르겠던데.. 하는 사람들에게 강력 추천합니다.
버닝썬 게이트와 관련된 모든 범죄자들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을 때까지, 이런 기록이나 관련 이야기가 계속 끊임없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강남경찰서에서 일한다는 자부심 넘치시는 그 경찰 '강남맨'들도, 버닝썬 관계자도, 거기서 마약을 사고팔았던 마약사범들도, 약물로 여성들을 성범죄 피해자로 만든 강간범과 그 조력자들도... 재산 다 날리고 몇십 년 정도는 감옥에서 썩는, 그런 나라에서 살고 싶습니다. 제발 그렇게 되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