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슬블로어 - 세상을 바꾼 위대한 목소리
수잔 파울러 지음, 김승진 옮김 / 쌤앤파커스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가끔 제가 (사회적 계급과 상관없이) 정말 온실 속 화초처럼 범죄에 노출되지 않고 곱게 자랐구나, 나는 정말 꽃길만 걸은 사람이구나, 싶어요. 수많은 나라에서, 수많은 일터에서, 수많은 가정에서 여성들이 범죄 혹은 범죄에 가까운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을 때 적어도 저는 그 당사자가 되지 않았으니까요. 저는 미투운동 촉발 이후에 터져나온 수많은 사건사고가 30년 전, 50년 전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 세대에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런 건 몇 세대 전에서나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 아닌가? 어떻게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날 수가 있지?


 심지어 수전 파울러는 밑바닥에서 (정말 말도 안되는 노력과 천재성으로) 아이비리그까지 아득바득 올라온 여성입니다. 정규 교육도 한 번도 받은 적 없던 사람이, 거듭되는 온갖 '더 이상은 방법이 없는' 상황을 온 생을 걸고 뚫고 나가는 과정을 보는 건 경이로울 지경이었습니다. 1)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음악 외의 다른 과목을 신청했다는 이유만으로 날아갔을 때, 2) 중요한 오디션을 앞두고 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며 평생 꿈이었던 음악가의 길이 닫혀 버렸을 때, 3) 자살사고에 빠진 동기생을 도우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동기생의 담당 보호자가 되어 그의 자살을 막는 미션을 받고 모든 수업과 연구에서 배제되었을 때, 4) 학교의 부당한 대처에 항의했기 때문에 수천 달러를 들여가며 이미 취득한 학위를 박탈당했을 때, 5) 실리콘 밸리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자마자 성차별과 성희롱을 일삼는 직장 내 문화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받아야 했을 때 등등... 저라면 절망하고 포기해버렸을 순간들이 끝도 없이 등장하더라고요. 드라마도 이렇게 쓰면 욕 먹을 것 같아요. 너무 심한 불행 몰빵 서사라고요! 이건 실화라는 점만이 다를 뿐이죠.


 실리콘밸리의 성차별 문화가 그렇게 심각하고 만연한 줄 몰랐어요. 수전이 상사의 성차별을 들으면서 굉장히 공포스러워 하는 부분이 있는데, 정말 공감되더라고요. 자기가 퀴어인 건 (수전은 양성애자입니다) 숨길 수 있다, 자신의 조상 중에 유대계가 있다는 것도 숨길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여성이라는 건 숨길 수 없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숨길 수 없는 속성을 저 사람은 혐오한다. 어떻게 이걸 극복할 수 있단 말인가? 당연히 극복할 수 없죠. 잘못하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차별'이라고 하는 거고요. 우버 이전에 수전이 도대체 왜 그렇게 직장을 빨리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자꾸 옮겼는지 너무 절절하게 이해가 됩니다. 두 직장 다 도저히 멀쩡한 곳이 아니었잖아요.


 우버. 아, 우버. 한국에서는 비록 이미 독과점 되어있는 시장에 진입을 실패해서 망해버렸지만, 전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성공한 기업인 우버! 이미 대학+전직장1+전직장2에서 혹독한 경험을 한 수전은 우버에 입사하기 전에 나름대로 열심히 기업에 대해 알아보고 '여기라면 안심해도 되겠다' 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첫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대놓고 여자를 차별하는 임원을 만나게 되죠. 입사 첫날부터 자기랑 섹스하자는 암시를 끊임없이 메신저로 던지는 X 같은 상사놈을 인사과에 고발해보지만, 돌아오는 건 부당한 대우 뿐. 정말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다 주옥 같지만, 그 중에서도 전사 엔지니어에게 가죽 자켓을 사주면서 여성 엔지니어만 쏙 빼놓은 건... 뭐랄까, 치졸을 넘어서서 그냥 너무 없어보이지 않아요? 우버 정도 되는 대기업이 여성 엔지니어 가죽 자켓 하나를 못 사주는데 그 이유가 '여성 옷은 할인을 못 받아서'라니, 이게 말입니까 방구입니까.


 저는 이 책을 통해서 미국의 대부분의 기업들이 입사 계약서에 '비밀유지조항'을 넣고 있으며, 그래서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직장 내에서 겪는 범죄 및 부당상황을 외부에 알릴 수 없다는 걸 처음 알게 됐어요. 수전 파울러의 우버 고발글을 계기로 그 조항이 입사 계약서에서 빠지게 되었다는 것도요. 우버를 그만두고 나와서 해당 고발글을 쓰기 전까지의 갈등이 생생하게 나와 있는데, 솔직히 저 같아도 용기가 안 났을 것 같아요. 고발글이 엄청나게 이슈화되어 터지고 나서, 임원이나 주주처럼 나름 힘 있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우버의 범죄적인 내부 문화를 알고 (비난하거나 바꾸려고 노력한 경우도 있었지만) 어쩄거나 외부에는 모두 침묵했다는 게 밝혀집니다. 거기서 다시 한 번 내부고발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했습니다. 개인이, 그것이 아무리 힘 있는 개인이라고 해도, 기업을 상대로 싸우는 건 쉽지 않죠. 내부고발자가 되는 건 많은 고통을 치러야 하는 일이고, 그걸 알면서도 뛰어드는 사람들 덕분에 이 세상은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하죠!


 물론 수전 파울러 혼자만 해낸 건 아닙니다. 본인도 책에 썼지만 우버에 대한 고발글을 썼을 때 조용히 묻힐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세상이 내부고발을 한 여성들의 말을 들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실명을 걸고 자기 피해를 밝히며 실제로 피해자가 있다고 외쳤어야 했던가요. 심지어 이제 겨우 말을 들어주기 시작했을 뿐이지, 잘못을 바로잡고 차별하는 놈들이 오히려 핍박받고 멸시받고 손가락질받고 직업을 잃고 패가망신하는 시대는 아직 멀었다는 느낌입니다. 그나마 성차별에 대한 인식이 있는 미국에서 이럴진대 한국의 수많은 블랙기업에서 비슷한 일을 겪으며 고통받는 피해자는 또 얼마나 많을까요. 그 모두가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 말도 안 되는 고난을 끊임없이 뚫고 나가는 수전 파울러의 모습을 보면서, 엄청나게 임파워링 됐습니다.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그녀의 천재성과 노력이 있기야 하겠지만 (예를 들어 3개월만에 초6 수준에서 아이비리그 대학생 수준으로 수학을 마스터하는 건 보통 사람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겠죠) 어쨌든 그녀도 몇 번이나 고꾸라졌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있었고, 거의 포기해 손놓고 있었던 적이 있었잖아요. 정말 죽을 힘을 다해서 매달리면, 꿈꾸던 것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비스무리한 어떤 길이 생길 수도 있겠다, 나도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봐야겠다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다큐로 읽어도, 자기계발로 읽어도, 사회고발로 읽어도, 에세이로 읽어도 훌륭한 책입니다. 추천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가의 편지 - 제인 오스틴부터 수전 손택까지
마이클 버드. 올랜도 버드 지음, 황종민 옮김 / 미술문화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는 글 쓰는 걸 별로 어려워하지 않고 그냥 쭉쭉 생각나는대로 써 내려가는 편인데, 이상하게 편지만큼은 그게 잘 되지 않더라고요. 누군가 특정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쓴다는 생각을 하면 뭔가 대화처럼 자연스럽고 흐름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쓰다보면 모든 문장이 다 제멋대로에 종잡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한때는 서간문 형식으로 된 소설을 열심히 탐독하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내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상대방이 자연스럽게 읽는 글을 쓰는지 궁금했거든요.


 <작가의 편지>의 소개를 봤을 땐 이거다! 싶었어요. 세계적으로 글 좀 쓴다~ 하는 작가들이 남긴 편지를 수십장 넘게 볼 수 있는 기회잖아요! 도대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자연스럽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지, 그러면서도 억지로 꾸며낸 티가 안 나는지를 중점으로 열심히 봤습니다. 읽는 내내 즐거웠어요. 제가 절대로 쓰지 않을 문장이나 표현이 신기하기도 했고, 유명한 작가들이 남긴 사생활을 살짝 엿보면서 뭔가 좀 더 그 작가에 대해 많이 알게 된 기분도 들더라고요~ 좋아하는 작가님들이 여기저기서 출몰(?)하실 때마다 괜히 살짝 설레기도 했어요.


 편지라는 건 발신인도, 수신인도 명확하다보니 배경지식이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아무 맥락 없이 읽었으면 '이게 뭐야' 싶었을 내용이 꽤 있어요. 그래서인지 편집자는 친절하게도 왼쪽에는 실물 편지 사진을, 오른쪽 위에는 꼭지로 간략한 정보를, 오른쪽 아래에는 편지 번역을 배치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정보 꼭지가 맘에 들었어요. 몇 년도에 쓴 편지인지, 그때 이 작가의 상황이 어땠는지, 누구에게 무슨 목적으로 쓴 편지인지, 그리고 이 편지에서 눈여겨봐야 할 포인트는 뭔지 짚어주는데 그게 참 좋았어요. 사실 편지가 100% 진실은 아닌 경우가 꽤 있는데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거짓말을 하니까요) 그걸 알고 보니까 더 재밌더라고요.


 읽기 전에는 사실 러브레터를 제일 기대했는데, 의외로 제일 인상깊었던 건 아첨과 술수였어요. 역시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청탁도 잘 하는군... 같은 생각이 절로 들어요. <걸리버 여행기> 작가인 조너선 스위프트가 평생 궁정에서 한 자리 얻어보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안된 것까지는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최선을 다하는 과정을 막상 글로 만나니까 어쩐지 제가 다 민망한 기분이에요. 물론 굉장히 세련되고 재치 있는 유머로 가득찬 편지이긴 했지만, 목적이 너무 분명하니까 별로 멋져보이지 않더라고요. 실라 딜레이니가 한껏 자기를 '연극을 2주 전에 처음 보고 단숨에 새로운 희곡을 써내려간 순진한 천재 극작가'를 꾸며내는 것도 그렇고요. 뭐, 사람은 누구나 다 치졸하고 교묘한 짓을 할 때가 있으니까, 비난할 수만은 없지만요. 


 이건 좀 다른 소린데 <작가의 편지>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편집자가 고려시대 이규보의 편지를 알았다면 분명히 여기 실어줬을 거라고 생각해요. '금림의 버들에 의탁하길 기대하오니, 원컨대 긴 가지 하나를 빌려주소서' 어쩜 청탁을 해도 저렇게 멋들어지게 해서 후세에 길이길이 남았을까요. 문인들이란.


 여러모로 재밌는 책이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작가라도 '일상'을 살고 견뎌야 했다는 건, 당연하지만 여전히 위안이 되는 사실이에요. 친구랑 싸우고 난 뒤에 화해를 청하고, 싫은 사람 뒷담화도 좀 하고, 자기가 잘못을 고해성사하면서 괜히 앓는 소리를 내고, 명절이라고 친척들 선물 사러 순회하고... 그저 그런 보통의 하루가 이들에게도 끊임없이 펼쳐졌다는 게 새삼 와 닿아서 좋았습니다. 저도 이런 일상들을 이렇게 재밌게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 참, 여기 서문에 뭔가 편집이 잘못된 것 같은 부분이 있습니다. 8페이지에서 9페이지로 넘어가는 문장이 이상해요. 뭔가 그 사이에 있던 문장을 실수로 날려버린 것 같은? 몇 번을 읽어봐도 이어지지 않더라고요. 출판사에서 이거 확인해줬으면 좋겠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의 은밀한 취향 - 왕과 왕비의 사적인 취미와 오락
곽희원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괜히 제목에 '은밀한'이 붙으니까 뭔가 숨어서 해야 하는 취향에 대한 것 같은데, 제목에 살짝 노이즈 마케팅 느낌이 있습니다. 읽어보면사실 놀라울 정도로 건전한 취향들이거든요ㅋㅋㅋ 꽃이나 식물 보는 걸 즐겨서 정원을 가꿨다거나, 고양이나 원숭이 같은 동물을 아꼈다거나, 판소리나 당구 같은 취미에 열을 올렸다거나... 술이나 마약, 도박에 빠진 것도 아니고 이만하면 그냥 평범한 취미생활이죠. 다만, 조선의 왕족들이 즐겼던 유희를 따라가다 보면 그 시대의 생활상이나 역사적 흐름이 보이는 게 꽤 신기하고 재밌는 지점이에요.


 예를 들자면, 조선 시대는 청자보다는 백자를 더 사랑하고 아꼈다! 이건 역사 시간에도 배우는 기초적인 내용입니다. 그런데 세조 시대에 중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전반에서 백자가 크게 유행했고, 조선 전반에 백자에 대한 선망과 수요가 커졌으며, 세조 또한 백자를 아꼈기 때문에 아예 백자 제작장이 설치되면서 아예 국가적인 사업으로까지 확대되었다는 건 몰랐어요. 또 세조는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만큼 정통성에 민감했기 때문에, 신하는 물론이고 세자와 같은 그릇을 쓰는 것조차 싫어했고 그로 인해 조선 왕실에서 계급에 따라 그릇을 달리 쓰는 일이 엄격하게 지켜졌다는 것도요!


 이런 식으로 전반적으로 '어떤 왕/세자/공주/부마는 무엇무엇을 좋아했다더라~'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취미가 언제 조선에 들어왔고 어떻게 유행하게 되었는지, 이게 취미인지 아님 고도의 정치적 제스쳐였는지 하는 걸 꼼꼼하게 훑어줍니다. 개인적으로 영조가 지난 시대의 충신들 초상화를 좋아해서 수소문해서 봤다는 게 좀 웃겼어요. 그냥 딱 들어도 그림 때문이 아니라 그림을 빙자해서 '너네도 이런 충신 되라 알았지?!' 하는 의도가 다분히 느껴지잖아요. 숙종처럼 그림 자체를 좋아해서 이것저것 모으고 즐기다 보니 정치랑 연관되더라 하는 것도 아니고ㅋㅋㅋㅋ


 취미와 놀이라는 것도 꽤나 시대와 문화를 많이 탄다는 느낌이에요. 예를 들자면, 음악을 즐기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지금은 힙합이나 랩이 유행이라면 그때는 판소리가 유행하는 그런 거요. 예술은 시대마다 문법이 있으니, 즐기는 데에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증거 아닐까요?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판소리가 있지만, 우리는 판소리를 흥선대원군이나 고종처럼 온전히 '재미'로 즐기지는 못하잖아요. 그때는 정말 세상 재밌는 놀이였을 텐데 말이에요. 우린 과거의 왕족들이 누렸던 모든 사치들을 고스란히 일상으로 누리고 있는 복 받은 세대라는 생각도 듭니다. 


 전반적으로 글이 깔끔하고, 정말 딱 교양서적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글쓴이들이 전부 역사 전공자에 관련 일을 하시는 분들이라, 사료도 꼼꼼하고 지금 실존해 남아있는지 아닌지도 짚어주시는 편입니다. 사극 보면서 역사 속 인물들의 뒷얘기 같은 거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재밌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미니즘 리포트 - 탈코르셋부터 소수자 차별 금지까지, 기자 4인이 추적한 우리사회 변화의 현장들
김아영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는 어릴 때부터 스스로를 '좀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제가 볼 때는 문제가 있는 많은 것들이, 세상에서는 굉장히 로맨틱하거나 멋진 일로 포장되곤 했거든요. 예를 들어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마다 저는 남자 주인공이 폭력성에 놀라곤 했는데 그게 많은 경우에 사랑에 빠지는 장치로 활용이 되더라고요. 주변에 말해도 별로 공감을 받지 못해서, 한국 사회에선 그냥 평생 좀 이상하게 살아야보다 하고 생각했었어요. 그러다 2016년, 미투운동으로부터 불어닥친 페미니즘의 바람으로 인해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저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아니, 사실 제가 정말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면 오래 전부터 훨씬 더 많이 이상했어야 하는 거였습니다! 유레카!


 <페미니즘 리포트>는 요 몇년 동안 끊임없이 우리 사회에서 문제제기가 되어온 페미니즘을 크게 4가지 이슈로 나누어 정리한 책입니다. 사실 그동안 나온 논의들을 얘기하면 정말 끝도 없는데, 큰 이슈들을 잘 뽑은 것 같아요. 탈코르셋/디지털 성범죄/임금격차/소수자 차별.  모두 지금의 페미니즘을 말할 때 뺴놓을 수 없는 주제들이잖아요? 게다가 전체적으로 굉장히 '읽기 쉽게' 쓰였기 때문에 흐름을 한번에 정리해서 보고 싶다 하시는 분들에게 꽤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아무래도 제일 눈이 가는 건 3장 임금격차였습니다. 요즘 제가 가장 관심있는 문제거든요. 남자가 100을 받을 때 저는 64밖에 받을 수 없다면, 앞으로 1인 가구로서 미혼 여성인 제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남녀차별은 이제 더 이상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취업 시장에 나와보면 그런 소리를 안 하게 되는 이유가 있잖아요ㅋㅋㅋ 결혼과 육아를 포기하고 커리어에 올인한다고 해도, 같은 일을 하는 남자보다 덜 받는다면 희망이 없어요. 억울하기도 하고요. 이런 식의 불합리한 임금 격차를 도대체 어떻게 좁힐 수 있을지...ㅠ


  개인적으로 앞장에 몇년간의 사건을 시간의 순서대로 나열해놓은 구성이 좋았습니다. 얼마 전 버닝썬 사건을 따라간 책을 읽으면서도 생각한 건데, 현재진행형의 사건을 계속 따라가다보면 어느 순간 흐름이 헷갈릴 때가 있거든요. 제 생각보다 더 오래되기도 하고 혹은 더 빠르게 뭔가 바뀌기도 했더라고요. 그럴 때 연대기가 짧게나마 앞부분에 있으면 중요사건과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서 도움이 되더라고요.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차별금지법으로 마무리하는 것도 제법 멋집니다. 우리는 우리가 차별하는 쪽에 서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는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려고 싸우고 있고, 차별금지법은 모두가 차별받지 않는 세상에 꼭 필요한 법이니까요.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법과 제도가 바뀌면 곧 사람들의 인식도 바뀌게 될 것이라고 믿어요. 때론 시스템이 사고방식을 결정하기도 하잖아요.


 이제는 한국 여성이면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는 게 너무나 당연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를 일으킨 아주 큰 파동의 이슈를 묶어서 잘 정리해 보고 싶다면, <페미니즘 리포트>는 꽤 괜찮은 선택이 될 거예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의 심장을 쳐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에는 엄마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명언이나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를 만들었다" 같은 문구는 모성이라는 게 신의 사랑과 맞먹는다고 말하고 있죠. 주변을 둘러봐도 가족이란, 그 중에서도 특히 어머니라는 존재는 무한한 사랑을 주는 특별한 존재인 경우가 많고요. 하지만 세상 모든 어머니가 자식을 그렇게 무한정 사랑하는 것은 아니죠. 무관심한 것은 차라리 낫습니다. 자식을 미워하고, 경멸하고, 질투하고, 괴롭히고, 결국은 죽게 하는.. 그런 어머니도 생각보다 흔해요. <너의 심장을 쳐라>는 그렇게 자식을 지옥으로 밀어넣는 어머니 아래에서 자기 자신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딸의 투쟁기입니다.


 첫 장을 읽는 순간, 주인공의 어머니인 마리가 싫어졌어요. 마리는 타인의 선의나 칭찬에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불행과 질투, 시기와 험담에 삐뚤어진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에요. 마리의 부모님이나 언니를 살펴봐도 딱히 잘못된 양육으로 아이가 망가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데, 도대체 왜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는지 의문입니다. 아마 사회적인 분위기가 가정 환경보다 더 강력한 영향을 끼친 케이스인가 봐요. 아무튼 마리는 다른 여자들이 자신만큼 예쁘지 않고, 예쁠 수 없고, 그래서 불행할 것이라는 사실에 황홀해하는 사람입니다. 허영심으로 일단 마을에서 제일 잘 생기고 잘 나가는 올리비에와 사귀긴 했지만 진지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임신을 하게 되면서 미래를 향해 부풀었던 꿈은 무너집니다. 낙태를 할 수는 없었나봐요. 생명이 소중하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황에 놓여 불행하다는 걸 다른 사람이 눈치채는 게 죽기보다 싫었거든요;;; 마리는 그런 사람이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누구나 보고 감탄할 만한 아름다운 딸을 낳고는 '자신보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그 딸을 미친듯이 질투하기 시작합니다. 


 디안은 어렸지만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알고 있어요. 당연하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미움받는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감각을 예민하게 눈치채기 마련이잖아요. 다만 주인공 디안이 너무나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로 설정되어 있어서, 조숙하다 못해 4살짜리가 삶과 존재에 대해 철학적인 고민을 한다는 부분은 살짝 공감이 가지 않았습니다. 4살, 그러니까 우리나라 나이로 따지면 6살짜리도 '엄마는 딸을 질투해. 아들은 질투하지 않아. 그러니까 동생이 또 태어난다면 아들이었으면 좋겠어' 하는 마음을 가지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그걸 넘어서서 엄마가 여동생을 너무나 사랑하는 걸 봤을 때 고민하는 깊이가 너무 철학적이라, 정말 과연 그 어린 아이가 저렇게까지 생각할 수 있을까? 싶어서 살짝 튕겨 나왔습니다. 그 부분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몰입도가 높은 편이에요.


 이 작품에는 두 명의 어머니와 두 명의 딸이 나오는데, 읽으면서 정말 섬뜩했던 건 모녀 관계가 이렇게까지나 병적이고 뒤틀려 있는데 주변에서 눈치채는 사람도,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상황을 바꿔보려는 사람도 정말 극소수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자식을 그렇게 은밀하게 미워하고 학대하는 어머니가 워낙에 예외적인 존재라고 해도, 아이를 어머니로부터 보호하고 지켜줄 사람이 없다는 게... 자기 인생이 망가지기만을 바라는 어머니 옆에서 딸들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요. 이건 사회의 실패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특히 그 중에서도 아버지들의 무관심과 몰이해는 변명의 여지도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바로 옆에서 학대가 일어나고 있는데도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할 수가 있을까요? 


 끝끝내 자신을 지켜내고, 또다른 선택을 한 자신마저도 포용하는 디안의 모습은 경이로울 지경입니다. 아주 오랜 시간을 폐허가 되지 않기 위해 애써온 만큼, 앞으로 디안의 남은 생은 오롯이 자신의 기쁨과 성취로 빛났으면 좋겠어요. 또다른 디안도 마찬가지고요. 각자의 방식으로 비로소 어머니에게서 벗어난 두 딸이 땅에 발을 딛고 자유롭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절로 들게 하는 마무리였습니다. 


 앞으로도 결코 쉽지는 않을 것 같지만, 부디 두 사람 앞에 길이 있기를. 빛이 있기를. 평온이 있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