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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편지 - 제인 오스틴부터 수전 손택까지
마이클 버드. 올랜도 버드 지음, 황종민 옮김 / 미술문화 / 2021년 10월
평점 :
저는 글 쓰는 걸 별로 어려워하지 않고 그냥 쭉쭉 생각나는대로 써 내려가는 편인데, 이상하게 편지만큼은 그게 잘 되지 않더라고요. 누군가 특정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쓴다는 생각을 하면 뭔가 대화처럼 자연스럽고 흐름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쓰다보면 모든 문장이 다 제멋대로에 종잡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한때는 서간문 형식으로 된 소설을 열심히 탐독하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내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상대방이 자연스럽게 읽는 글을 쓰는지 궁금했거든요.
<작가의 편지>의 소개를 봤을 땐 이거다! 싶었어요. 세계적으로 글 좀 쓴다~ 하는 작가들이 남긴 편지를 수십장 넘게 볼 수 있는 기회잖아요! 도대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자연스럽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지, 그러면서도 억지로 꾸며낸 티가 안 나는지를 중점으로 열심히 봤습니다. 읽는 내내 즐거웠어요. 제가 절대로 쓰지 않을 문장이나 표현이 신기하기도 했고, 유명한 작가들이 남긴 사생활을 살짝 엿보면서 뭔가 좀 더 그 작가에 대해 많이 알게 된 기분도 들더라고요~ 좋아하는 작가님들이 여기저기서 출몰(?)하실 때마다 괜히 살짝 설레기도 했어요.
편지라는 건 발신인도, 수신인도 명확하다보니 배경지식이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아무 맥락 없이 읽었으면 '이게 뭐야' 싶었을 내용이 꽤 있어요. 그래서인지 편집자는 친절하게도 왼쪽에는 실물 편지 사진을, 오른쪽 위에는 꼭지로 간략한 정보를, 오른쪽 아래에는 편지 번역을 배치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정보 꼭지가 맘에 들었어요. 몇 년도에 쓴 편지인지, 그때 이 작가의 상황이 어땠는지, 누구에게 무슨 목적으로 쓴 편지인지, 그리고 이 편지에서 눈여겨봐야 할 포인트는 뭔지 짚어주는데 그게 참 좋았어요. 사실 편지가 100% 진실은 아닌 경우가 꽤 있는데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거짓말을 하니까요) 그걸 알고 보니까 더 재밌더라고요.
읽기 전에는 사실 러브레터를 제일 기대했는데, 의외로 제일 인상깊었던 건 아첨과 술수였어요. 역시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청탁도 잘 하는군... 같은 생각이 절로 들어요. <걸리버 여행기> 작가인 조너선 스위프트가 평생 궁정에서 한 자리 얻어보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안된 것까지는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최선을 다하는 과정을 막상 글로 만나니까 어쩐지 제가 다 민망한 기분이에요. 물론 굉장히 세련되고 재치 있는 유머로 가득찬 편지이긴 했지만, 목적이 너무 분명하니까 별로 멋져보이지 않더라고요. 실라 딜레이니가 한껏 자기를 '연극을 2주 전에 처음 보고 단숨에 새로운 희곡을 써내려간 순진한 천재 극작가'를 꾸며내는 것도 그렇고요. 뭐, 사람은 누구나 다 치졸하고 교묘한 짓을 할 때가 있으니까, 비난할 수만은 없지만요.
이건 좀 다른 소린데 <작가의 편지>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편집자가 고려시대 이규보의 편지를 알았다면 분명히 여기 실어줬을 거라고 생각해요. '금림의 버들에 의탁하길 기대하오니, 원컨대 긴 가지 하나를 빌려주소서' 어쩜 청탁을 해도 저렇게 멋들어지게 해서 후세에 길이길이 남았을까요. 문인들이란.
여러모로 재밌는 책이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작가라도 '일상'을 살고 견뎌야 했다는 건, 당연하지만 여전히 위안이 되는 사실이에요. 친구랑 싸우고 난 뒤에 화해를 청하고, 싫은 사람 뒷담화도 좀 하고, 자기가 잘못을 고해성사하면서 괜히 앓는 소리를 내고, 명절이라고 친척들 선물 사러 순회하고... 그저 그런 보통의 하루가 이들에게도 끊임없이 펼쳐졌다는 게 새삼 와 닿아서 좋았습니다. 저도 이런 일상들을 이렇게 재밌게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 참, 여기 서문에 뭔가 편집이 잘못된 것 같은 부분이 있습니다. 8페이지에서 9페이지로 넘어가는 문장이 이상해요. 뭔가 그 사이에 있던 문장을 실수로 날려버린 것 같은? 몇 번을 읽어봐도 이어지지 않더라고요. 출판사에서 이거 확인해줬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