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슬블로어 - 세상을 바꾼 위대한 목소리
수잔 파울러 지음, 김승진 옮김 / 쌤앤파커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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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가끔 제가 (사회적 계급과 상관없이) 정말 온실 속 화초처럼 범죄에 노출되지 않고 곱게 자랐구나, 나는 정말 꽃길만 걸은 사람이구나, 싶어요. 수많은 나라에서, 수많은 일터에서, 수많은 가정에서 여성들이 범죄 혹은 범죄에 가까운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을 때 적어도 저는 그 당사자가 되지 않았으니까요. 저는 미투운동 촉발 이후에 터져나온 수많은 사건사고가 30년 전, 50년 전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 세대에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런 건 몇 세대 전에서나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 아닌가? 어떻게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날 수가 있지?


 심지어 수전 파울러는 밑바닥에서 (정말 말도 안되는 노력과 천재성으로) 아이비리그까지 아득바득 올라온 여성입니다. 정규 교육도 한 번도 받은 적 없던 사람이, 거듭되는 온갖 '더 이상은 방법이 없는' 상황을 온 생을 걸고 뚫고 나가는 과정을 보는 건 경이로울 지경이었습니다. 1)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음악 외의 다른 과목을 신청했다는 이유만으로 날아갔을 때, 2) 중요한 오디션을 앞두고 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며 평생 꿈이었던 음악가의 길이 닫혀 버렸을 때, 3) 자살사고에 빠진 동기생을 도우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동기생의 담당 보호자가 되어 그의 자살을 막는 미션을 받고 모든 수업과 연구에서 배제되었을 때, 4) 학교의 부당한 대처에 항의했기 때문에 수천 달러를 들여가며 이미 취득한 학위를 박탈당했을 때, 5) 실리콘 밸리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자마자 성차별과 성희롱을 일삼는 직장 내 문화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받아야 했을 때 등등... 저라면 절망하고 포기해버렸을 순간들이 끝도 없이 등장하더라고요. 드라마도 이렇게 쓰면 욕 먹을 것 같아요. 너무 심한 불행 몰빵 서사라고요! 이건 실화라는 점만이 다를 뿐이죠.


 실리콘밸리의 성차별 문화가 그렇게 심각하고 만연한 줄 몰랐어요. 수전이 상사의 성차별을 들으면서 굉장히 공포스러워 하는 부분이 있는데, 정말 공감되더라고요. 자기가 퀴어인 건 (수전은 양성애자입니다) 숨길 수 있다, 자신의 조상 중에 유대계가 있다는 것도 숨길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여성이라는 건 숨길 수 없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숨길 수 없는 속성을 저 사람은 혐오한다. 어떻게 이걸 극복할 수 있단 말인가? 당연히 극복할 수 없죠. 잘못하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차별'이라고 하는 거고요. 우버 이전에 수전이 도대체 왜 그렇게 직장을 빨리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자꾸 옮겼는지 너무 절절하게 이해가 됩니다. 두 직장 다 도저히 멀쩡한 곳이 아니었잖아요.


 우버. 아, 우버. 한국에서는 비록 이미 독과점 되어있는 시장에 진입을 실패해서 망해버렸지만, 전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성공한 기업인 우버! 이미 대학+전직장1+전직장2에서 혹독한 경험을 한 수전은 우버에 입사하기 전에 나름대로 열심히 기업에 대해 알아보고 '여기라면 안심해도 되겠다' 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첫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대놓고 여자를 차별하는 임원을 만나게 되죠. 입사 첫날부터 자기랑 섹스하자는 암시를 끊임없이 메신저로 던지는 X 같은 상사놈을 인사과에 고발해보지만, 돌아오는 건 부당한 대우 뿐. 정말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다 주옥 같지만, 그 중에서도 전사 엔지니어에게 가죽 자켓을 사주면서 여성 엔지니어만 쏙 빼놓은 건... 뭐랄까, 치졸을 넘어서서 그냥 너무 없어보이지 않아요? 우버 정도 되는 대기업이 여성 엔지니어 가죽 자켓 하나를 못 사주는데 그 이유가 '여성 옷은 할인을 못 받아서'라니, 이게 말입니까 방구입니까.


 저는 이 책을 통해서 미국의 대부분의 기업들이 입사 계약서에 '비밀유지조항'을 넣고 있으며, 그래서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직장 내에서 겪는 범죄 및 부당상황을 외부에 알릴 수 없다는 걸 처음 알게 됐어요. 수전 파울러의 우버 고발글을 계기로 그 조항이 입사 계약서에서 빠지게 되었다는 것도요. 우버를 그만두고 나와서 해당 고발글을 쓰기 전까지의 갈등이 생생하게 나와 있는데, 솔직히 저 같아도 용기가 안 났을 것 같아요. 고발글이 엄청나게 이슈화되어 터지고 나서, 임원이나 주주처럼 나름 힘 있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우버의 범죄적인 내부 문화를 알고 (비난하거나 바꾸려고 노력한 경우도 있었지만) 어쩄거나 외부에는 모두 침묵했다는 게 밝혀집니다. 거기서 다시 한 번 내부고발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했습니다. 개인이, 그것이 아무리 힘 있는 개인이라고 해도, 기업을 상대로 싸우는 건 쉽지 않죠. 내부고발자가 되는 건 많은 고통을 치러야 하는 일이고, 그걸 알면서도 뛰어드는 사람들 덕분에 이 세상은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하죠!


 물론 수전 파울러 혼자만 해낸 건 아닙니다. 본인도 책에 썼지만 우버에 대한 고발글을 썼을 때 조용히 묻힐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세상이 내부고발을 한 여성들의 말을 들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실명을 걸고 자기 피해를 밝히며 실제로 피해자가 있다고 외쳤어야 했던가요. 심지어 이제 겨우 말을 들어주기 시작했을 뿐이지, 잘못을 바로잡고 차별하는 놈들이 오히려 핍박받고 멸시받고 손가락질받고 직업을 잃고 패가망신하는 시대는 아직 멀었다는 느낌입니다. 그나마 성차별에 대한 인식이 있는 미국에서 이럴진대 한국의 수많은 블랙기업에서 비슷한 일을 겪으며 고통받는 피해자는 또 얼마나 많을까요. 그 모두가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 말도 안 되는 고난을 끊임없이 뚫고 나가는 수전 파울러의 모습을 보면서, 엄청나게 임파워링 됐습니다.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그녀의 천재성과 노력이 있기야 하겠지만 (예를 들어 3개월만에 초6 수준에서 아이비리그 대학생 수준으로 수학을 마스터하는 건 보통 사람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겠죠) 어쨌든 그녀도 몇 번이나 고꾸라졌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있었고, 거의 포기해 손놓고 있었던 적이 있었잖아요. 정말 죽을 힘을 다해서 매달리면, 꿈꾸던 것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비스무리한 어떤 길이 생길 수도 있겠다, 나도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봐야겠다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다큐로 읽어도, 자기계발로 읽어도, 사회고발로 읽어도, 에세이로 읽어도 훌륭한 책입니다. 추천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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