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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는 후기입니다. 스포일러가 싫으신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 주세요.
와.. 정말 너무 멋진 작품이에요!! 읽는 내내 어떻게 이렇게 자폐인의 시선으로 그의 세상을 그려낼 수 있는지 감탄에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습니다. 초반의 도입부부터 전개, 결말까지 독자에게 정말 끊임없이 '정상과 비정상'에 대해 생각을 하게 해요. 막 엄청난 과학 기술이 있는 미래 배경이 아니라서 SF라는 걸 잊어버리기도 하는데, 아직은 없는 특정한 기술을 통해 어떤 존재의 영속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정말 훌륭한 SF 소설입니다.
'글'이라는 형식이 아니라면 표현하기 어려울 것 같은 요소가 곳곳에 있습니다. 만약 이게 영상 매체였다면, 자폐인들끼리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언어를 통하지 않고 교류하는 부분을 표현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각자의 규칙과 리듬을 존중하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자연스럽게 이해합니다. 우리는 한번도 해보지 않은 방식으로요. 머릿 속에서 잘못된 음악이 떠올라 운전을 하기 어렵다든가, 지금 현재 필요한 음악이 몸에 스며들게 하기 위해서 체육관에서 뜀뛰기가 필요하다든가, 언어가 아니라 패턴과 규칙으로 대화한다든가, 쿠션어나 인사 치레 같은 것으로 서로에게 '해석'이 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요소들은 영상 매체로 가면 나레이션이 아닌 이상 처리하기가 굉장히 힘들 것 같아요. 글이기 때문에, 글이라서, 온전히 이해되는 지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작가가 자폐증이 있는 아들을 키웠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정말 자폐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 존중을 갖고 있구나 하는 게 곳곳에서 느껴져요. 자폐증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지켜야 하지만, 자폐증이 없는 사람은 지키지 않는 수많은 예의와 규칙에 관한 내용을 읽고 있으면 그게 너무 끔찍하게 느껴지거든요. 예를 들어 주인공인 루는 누군가에게 나쁜 일이 있어났을 때 "괜찮아?"라든가 "유감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꼭 해야 한다고 교육받았는데, 정작 루가 나쁜 일을 당했을 때 그의 상사는 빈말로라도 그런 말을 하지 않고 그래도 괜찮습니다. 왜냐면 그는 자폐증 환자가 아니고, 그게 본인을 낙인 찍는 데 사용되지 않기 떄문이죠. 하지만 자폐증이 있는 사람은, 그게 뭐가 됐든, 사람들은 모든 특성을 자폐증으로 연결시키고, 한 번 찍힌 낙인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곳곳에서 그런 부당함이 느껴질 때마다, 정작 루는 분개하지 않고 다만 이해하기 어려워할 뿐인데 저는 굉장히 분개하게 되더라고요. 마치 루를 사랑하는 톰이나 루시아, 마저리처럼요.
작품을 읽을수록 루라는 사람이 점점 더 좋아졌기 때문에, 결말 부분이 너무 슬펐습니다. 저는 사실 다른 사람은 다 치료를 선택해도 루만은 치료를 선택하지 않고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남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제 예상과 다른 길을 가고.. 심지어 루의 경우는 그게 꽤 잘 풀린 케이스라고 보이는데도 전혀 기쁘지 않은 거예요. 제가 톰이라도 된 것처럼 슬펐습니다. 우리가 사랑했던 그 사람이 아닌 거죠. 심지어 루 본인조차도 '예전의 루'라고 표현을 하잖아요. 누군가에게서 하나의 정체성을 떼어낸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거라는 게 너무 분명하게 보여요. 물론 '지금의 루'는 훨씬 더 만족하고 행복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예전의 루' 역시 만족하고 행복해진 걸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괜히 가슴이 아프고 속상합니다. 제 인생이 아니지만, 제가 사랑한 누군가의 인생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요ㅠ
중간중간 오타가 있습니다. 초반에는 귀찮아서 그냥 넘겼는데, 중후반부에 가도 몇 개 있더라고요. 203페이지 셋째 줄 "형을 돕고 시죠"는 싶죠로 바뀌어야 하고, 453페이지 밑에서 열번째 줄 "너에게 대단한 가회군"은 기회군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 앞에도 두세 개 정도 오타가 있었는데 페이지 수를 안 적어놨더니 다시 찾기가 힘드네요.
읽는 내내 제가 얼마나 자폐증이라는 증세에 대해 무지한지, 정상이라는 사람들이 비정상이라는 사람들에 비해 얼마나 폭력적이고 일방적인지, 대부분의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꼭 흠결이나 어둠으로 치부되어야 하는 것인지, 계속 생각하게 되는 작품입니다. 곱씹을수록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책을 덮고 나서도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요! 작가가 노인을 주인공으로 썼다는 다른 작품도 꼭 찾아서 읽어 보고 싶어졌어요. 강추합니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