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소녀는 왜 세상을 구하지 못했을까? - 소녀가 소비하는 문화, 그 알려지지 않은 이면 이해하기
백설희.홍수민 지음 / 들녘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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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여성은 소녀였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녀시절에 좋아하거나 열광했던 것들이 있지요. 보통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은 좋아하지 않게 되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소중한 추억으로 곱게 갈무리되어 있기 마련이에요. 막상 어른이 된 후에 그 추억을 만날 기회가 생기면,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거나 성차별적인 내용에 당황하고 실망하게 됩니다. 그때는 정말 모든 게 다 즐겁고 재밌었는데! 이런 내용이었나? 경악스러워요. 내가 즐겼던 작품들이 지금 내 조카들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작품이라는 건 정말이지 서글픈 일입니다.

 

 <마법소녀는 왜 세상을 구하지 못했을까>는 소녀문화라는 게 무엇인지, 어떻게 형성이 되어왔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성인의 고정관념이 어떻게 시장을 고착화시키는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등등이 한국-일본-미국의 여러 사례와 함께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녀문화를 사회문화의 한 갈래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접근하는 점이 정말 좋았어요. 예를 들면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마법소녀가 등장했던 시기의 작품들이 가지는 의의와 한계를 짚어내는 점이요. <요술공주 샐리>나 <세일러문> 같은 작품들은 분명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동시에 당시 사회가 가지고 있던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거든요.



 작품 안에서만 봐도 그렇지만, 작품 바깥까지 시선을 확장하면 훨씬 더 많은 시사점이 보입니다. '성차별'이라는 말로밖에 설명되지 않는 모순들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기업은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성차별을 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는데, 여기 있는 몇몇 사례들만 봐도 훌륭한 반례가 됩니다. 디즈니 같은 경우는 스타워즈 새로운 시리즈의 주인공인 '레이'만 쏙 빼놓고 액션 피규어 라인을 출시합니다. 레이의 피규어는 당연히 많이 팔렸을 거예요. 주인공이잖아요? 주인공이 빠지는 컬렉션이 어디 있어요? 하지만 디즈니는 레이의 액션 피규어 대신 '스타워즈 메이크업 라인'이니 '드레스 형태의 코스튬'이니 하는 것들이나 내놓았죠. 사업적인 측면에서도 분명 멍청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비판과 항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피규어는 남자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태도를 고수했죠. 성차별이 실제로 기업의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교과서적인 예시라 할 만 합니다.


 소녀를 위한 시장은 조금 특수합니다. 소녀들은 소비의 주체이기도 하지만, 아니기도 해요. 분명히 소비를 하는 것은 이들이지만, 아직 구매력이 없으니까요. 어른이 보기에 자기가 '더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쪽을 엄선해서 제공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사회적 성 고정관념에 엄청나게 노출이 되게 되지요. 흰 색, 하늘색, 분홍색이 있다고 하면 어른들은 으레 더 많은 돈을 주고서라도 중립적이라고 생각하는 흰 색보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남자아이 색' 혹은 '여자아이 색'을 골라줍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꾸준히 그런 선택지에 노출이 되게 되면, 아이들은 금방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를 받아들이게 되고, 그렇게 취향과 기호가 생성됩니다. 생산자, 그리고 보호자가 나서서 취향을 개조시키고 나서는 '봐봐! 여자아이들은 분홍색을 좋아하잖아! 시장 지표가 말해주네!' 하고 계속 도돌이표를 그려요. 요즘은 좀 나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이 먼 문제입니다.


 마법소녀 같은 판타지 장르에서조차 소녀 주인공 영웅은 소년 주인공 영웅과는 다른 길만이 허락됩니다. 실수하고, 실패하고, 동료를 모으고, 적을 쓰러뜨리고... 이 모든 과정이 허용되지 않거나, 허용된다면 굉장히 섹슈얼한 이미지로 소비됩니다. 저 역시도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게, 어릴 적 봤던 애니메이션에서 마법소녀가 영웅으로 변신을 하는 장면에서 어린 눈으로 보기에도 굉장히 '야한' 느낌의 장면이 계속 반복되어서 민망했던 적이 있어요. 그건 소위 말하는 삼촌 팬들에게 서비스 컷을 제공한 것으로, 소녀 애니메이션의 팬 층을 아예 성인 오타쿠로 바꾸어 타켓팅한 것이었다는 걸 책을 읽으면서야 새삼 깨달았습니다. 얼마 있지도 않은 아이들의 컨텐츠에 성인이 끼어들어서 원래 의미를 퇴색시켜버린, 완전 징그러운 사례에요, 정말.


 어린이, 소녀에게 완전한 취향의 자유가 주어지는 일은 앞으로도 없겠죠. 당연히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이거나, 악의적인 컨텐츠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 지켜줘야 하는 것도 맞고요. 하지만 소녀들에게 제공해야 할 컨텐츠 내용을 선별하는 어른들이 부적절하거나 잘못된 렌즈로 세상을 보고 있다면, 그래서 그 잘못된 필터로 걸러진 예시들만이 '너희가 보고 즐겨야 하는 건 이것뿐이야' 하는 목록으로 제공되고 있다면, 그 결과로 나타나는 문제는 당연히 구조적인 것 아닐까요? 왜 어떤 마법소녀들은 자신의 힘을 드러낼 수 없는지, 왜 어떤 마법소녀는 그렇게 선정적이고 쓰잘데기 없는 섹슈얼리티를 보여주는지, 왜 어떤 마법소녀는 영원히 세상을 구하지 못하는지... 소녀라는 이름의 다음 세대가 도대체 어떤 문화를 소비하게끔 유도되고 있는지 다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을 것 같아요.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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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의 세계
고요한 외 지음 / &(앤드)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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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솔로지 작품이 재미있는 건, 같은 키워드를 던져도 모든 창작자들이 저마다 다른 결과물을 내놓는다는 점입니다. 각기 다른 아이디어와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나였다면 이 키워드에 어떤 이야기를 떠올렸을까 궁금해지기도 해요. <2의 세계>는 '2'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7명의 작가들이 만들어낸 7개의 이야기를 감상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어떤 작품들은 현실적이고, 어떤 작품들은 판타지스러워요. 어떤 작품은 상쾌하고, 또 어떤 작품은 가슴이 저릿해지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코너스툴>입니다. 이야기가 정말 예측이 안 되어서 신기하더라고요. 2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것도 독특했어요. '너'에게 말을 건네는 2인칭 시점의 소설은 거의 없잖아요. 게다가 화자와의 관계가 짐작이 안 되게 만든 점도 재밌었어요. 화자가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무슨 상황이었지? 화자는 도대체 이 편지 아닌 편지를 왜 쓰고 있을까? 그래서 과거에서 누가 잘못한 거야? 등등. 그리고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게 되는 순간 '아...' 하고 먹먹해지게 만든 점도 좋았습니다. 저는 한국이 로맨스-멜로에 과도하게 미쳐있는 나라라고 생각하는데, 그 폐해를 극단적으로 마주하는 기분이었어요. 누군가에게는 로맨스가 아닌 사랑, 연애감정이 아닌 인간관계도 있다는 게 이다지도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분위기라니. 씁쓸합니다.


 <다음이 있다면> 같은 경우는 작가의 말이 본문과 이어지면서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 같았어요. '이때를 지나면 이 시간은 끝이고 다시 오지 않는다는 말. 인생의 스무 살, 서른 살은 한 번 뿐이라는 말. 맞는 말들의 무게와 압박감에 대해 생각한다'는 구절이 확 와 닿았다고나 할까요? 적어도 몇 살까지는 뭘 해야 하고, 남들처럼 안정적으로 인생의 트랙을 착착 밟아야 한다는 압박이 심한 사회에서는 미진처럼 얼마간 방황할 시간조차도 '걱정을 빙자한 비난'을 피할 수가 없잖아요. 물론 인생에서 지금 이 순간은 한 번밖에 없겠죠. 하지만 그 지금을 놓쳤다고 해서 인생 전체를 망친 것처럼 구는 시선은 또 얼마나 폭력적이고 오만한가요. 부디 미진도, 그리고 미진처럼 방황하는 다른 모두도 다시 한 번 기회를 얻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2차 세계의 최애>도 재밌었습니다. 저는 특정 인물을 덕질한 적은 없지만, 어떤 특정한 장르 혹은 작품은 꾸준히 덕질하고 있는 사람이라 그 일방적이고 내 맘대로 퍼부을 수 있는 애정에 대해 엄청 공감이 가더라고요ㅋㅋㅋ 언제든 내가 원하는 만큼만 좋아하고, 내가 원할 때 그만둘 수 있는, 상대에게서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애정. 진짜가 아니어도, 순간에 불과해도, 찰나의 덧없는 감정인 걸 알면서도, 아니 오히려 그래서 그 순간에 인생을 버틸 수 있게 힘을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야금야금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걸 잡아야죠. 안 그래요?


 단편소설은 짧은 와중에 세계관을 다 드러내고, 인물을 소개하고, 상황을 이해시키고, 독자들이 공감하도록 이끌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난이도가 높다고 생각해요. 7명이나 되는 작가들이 차려놓은 만찬을 즐길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뭐, 7개 중에서 취향인 이야기가 하나쯤은 있겠죠! 그게 또 엔솔로지의 매력 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ㅋㅋㅋ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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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치 1 - 악당 기지로 출근하는 여자
나탈리 지나 월쇼츠 지음, 진주 K. 가디너 옮김 / 시월이일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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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히어로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히어로라는 이름의 자경단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작품들이 확 늘어났는데, 저에게는 여전히 쫄쫄이를 입고 정의를 지키겠답시고 나서는 개인에게 국가나 사회 전체가 기댄다는 설정 자체가 너무 기괴하게 보여요. 무슨 미국 서부 개척시대도 아니고, 멋진 영웅 하나를 띄워놓고 모든 문제를 그들에게 떠넘기는 것 같잖아요. 법적&사회적 제도을 개선해야 하는 문제도 개인의 범죄로 축소시킨다고요! 게다가 히어로 물에서 부서지는 차량, 무너지는 건물, 부서진 노점상 등등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는 엑스트라들의 살림살이도 엄청 신경쓰이잖아요.


 저 같은 사람들을 딱 겨냥해 나온 소설이 바로 <헨치>입니다. 헨치라는 용어 자체가 '빌런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라는 뜻으로 작품 내에서 통용되는데, 주인공은 정규직 일자리를 꿈꾸지만 언제나 일시적인 계약직만 구할 수 있어 끊임없는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헨치입니다. 현장직이 아니라 사무직이라 살인이나 납치처럼 대놓고 나쁜 일을 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빌런이 만약 최신식 무기를 만든다거나 할 때 옆에서 데이터를 분석하고 관리해주는 식으로 일을 하긴 하죠. 그런 '헨치'를 직업으로 가진 주인공이 어설픈 빌런에게 고용되었다가 히어로 중 최강자를 만나게 되면서 사건이 벌어져요.


 대중은 악당에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엑스트라에 신경쓰지 않아요. 히어로나 빌런에게는 관심을 쏟죠. 하지만 그들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고용되거나 혹은 그들에게 협력하는 사람들이 넘어지거나 다치거나 더 심하게는 죽는 일이 일어나도 사람들은 알지도 못 하고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아요. 주인공만 해도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 해도) 히어로가 손 한 번 휘둘러서 허벅지 뼈가 작살이 났거든요. 하지만 아무리 "슈퍼콜라이더가 나를 다치게 했다"고 말해도 경찰은 못 들은 척 하고, 히어로 당사자는 어설픈 변장이나 하고 와서 사과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자기를 고용한 빌런은 부상을 이유로 해고해버립니다. 헨치였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불구의 몸이 되어 감당할 수 없는 병원비를 안고 생활고에 시달려야 하는 신세가 된 거예요! 물론 헨치는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이죠. 하지만 이 정도의 벌을 감당해야 할 정도로 나쁜 일이었나요?


 열받은 주인공은 히어로가 자연재해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연재해에서 피해를 계산하는 법칙에 따라 계산을 하기 시작해요. 그 결과 히어로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자경단은 세상에 훨씬 더 많은 인명피해와 손해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수학적으로 밝혀내기 시작합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잖아요. 그리고 그 내용을 블로그에 올리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자, S급 빌런 레비아탄의 눈에 띄어 그에게 고용됩니다. 그리고 히어로의 위선과 가식, 기만에 대해 폭로하고 그들을 무너뜨리는 작전을 세우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며 점점 더 중요 인물이 되어갑니다. 그 과정이 너무 짜릿하고 재밌어요!


 빌런 쪽에서 작전을 진행하면서 알게 된 일이지만, 히어로 측을 관리하는 부서나 조직이 있는데 여기가 또 악의 소굴입니다. 빌런보다 더 빌런 같아요. 예를 들면 히어로 부부 중 한쪽이 바람을 폈다고 쳐요. 빌런 쪽에서는 그 사실만 깔짝깔짝 폭로해서 히어로 이미지를 망치려고 하는 정도라면, 히어로 쪽에서 그 바람핀 대상과 그 바람핀 대상의 전 여자친구(폭로자)를 죽여버리는 식입니다. 이래서야 누가 빌런인지, 원. 알고보면 여기저기 혼외자식을 낳아놓고 모른 척 해서 문제가 생기는 히어로가 있는가 하면, 자기가 다치게 한 사람들이 빌런 쪽으로 돌아설까봐 미리 죽여버리는 게 낫지 않나 고민하는 히어로도 있습니다. 이게 뭔가요! 정말 거짓으로 똘똘 뭉친 집단이에요.


 주인공 애나가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현장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게 생생하게 드러남으로써 '보통 사람'의 느낌을 강하게 줘요. 우리가 감정 이입해서 보는 주인공이 점점 더 능력을 발휘하면서 히어로-빌런 양쪽 모두에게 '주요 인물'로 부상하는 걸 보는 기분이 아주 짜릿합니다. 재밌어요. 게다가 로맨스 아닌 로맨스, 로맨스 없는 로맨스 비스무리한 뭐시깽이도 있습니다ㅋㅋㅋㅋ 로맨스라고 쳐주기에는 너무 관계도가 이상해서ㅋㅋㅋㅋ 그치만 재밌습니다. 뚝딱거리는 남의 망한 사랑 얘기 즐겁잖아요ㅋㅋㅋㅋ


 후속작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게 끝나서, 후속작이 꼭 나와줬음 하는 바람입니다. 애나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사회의 제대로 된 균형을 바로잡을 수 있게 어떤 시스템을 구축해나갈지, 그녀의 로맨스는 어디로 흘러갈지 다 너무 궁금하거든요! 히어로를 뒤에서 조종하던(?) 조직이 무너지는 것도 보고싶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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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커스 랩 - 그 멋진 작품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론 M. 버크먼 지음, 신동숙 옮김 / 윌북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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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커스 랩>을 읽는 내내 인터넷에서 잊을 만 하면 화제가 되곤 하는 김연아 선수의 유명한 명언이 떠오르더라고요.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될까 안 될까, 어떻게 될까, 뭐가 될까, 하는 고민을 하지 말고 일단 몸을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는 말. 살다보니 정말 맞는 말 같아요. 꼭 창의력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중한 건 필요하지만, 그냥 계속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보고 이래저래 재는 것보다는 무모하게 저질러버리고 나서 꾸준히 하는 게 효과가 있을 때가 많잖아요.


 현대에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천재'와 '영감'과 '뮤즈'와 '광기'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예민하고, 불안하고, 우울한 구석이 있다는 것 역시 사회 통념이고요. 하지만 최근 들어 절실하게 느끼는 한 가지는, 몸이든 마음이든 건강한 상태에서 나오는 예술이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나오는 예술보다 수준이 떨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는 그렇게 바람직한 창작 환경에서 더 뛰어난 예술 작품이 나올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책에 나오는 관점도 비슷해요. 천재성이란 환상이다! 누군가 신에게 선택받아서 귀에 완벽한 작품을 속삭여주는 게 아니다! 

 

 저는 작가도 아니고 창작자라고 할 만한 사람도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 후기랍시고 이것저것 끄적거리는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일단 시작하니까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겠는' 감각이 뭔지 좀 알겠어요. 왜냐면 저도 도대체 이 작품은 뭘 말하고 싶었던 걸까? 라거나 나는 이걸로 도대체 뭘 느꼈고 후기에 뭘 쓰고 싶은 거지? 하고 막막할 때 일단 한 문장을 써보면 그 다음 문장이 흘러나올 때가 있거든요. 창작자들의 거대한 세계관에 비하면 너무 소소한 요소이긴 한데, 타자를 두드리다 보면 하고 싶은 말이 딱 정돈이 되는 순간이 있어요. 시작 전에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문장이 막 튀어나오고요. 그냥 일개 감상자인 저조차도 이러한데, 정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창작자들은 어떻겠어요!


 엄청 인상적이었던 게, 우리가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는 행위들이 당연히 즉흥적인 활동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즉흥 연주나 즉흥 연극에 대한 감각을 알기는 어렵잖아요.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어느 순간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안다는 감각이 어떤 거지? 하지만 상대와 대화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이해가 확 되는 거예요. 상대방의 반응을 잘 살피고, 적절한 리액션을 하고, 거기에 내가 상대에게 전하고 싶은 바를 돌려주고, 그에 대한 답을 받고, 다시 던지고, 받고... 하는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을 창작자들은 말이 아니라 '자신의 도구'로 하고 있다는 점만 다르구나 싶어요.


 결국 예술뿐만 아니라 삶 전반에도 통용되는 이야기라 재밌었습니다. 저자가 수십년간 만나본 많은 기업가, 예술가, 학자, 작가들과의 인터뷰 경험이 곳곳에 잘 녹아들어 있어서 설득력 있었어요. 사실 저는 제목만 보고 실용서로 집어들었는데 대중 인문서를 읽는 것 같은 느낌도 들고요. 이런 식으로 어렵지 않게, 그러면서도 논거가 분명하게 이야기해주는 책, 저는 정말 좋아합니다. 재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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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바뀐 영혼 - 류팅의 기묘한 이야기
류팅 지음, 동덕한중문화번역학회 옮김 / 자음과모음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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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이나 유럽, 일본 문학은 꽤 많이 읽은 편인데 이상하게 중국 문학은 아직도 낯설게 느껴집니다. 최근 SF 분야에서 중국 작가들이 눈이 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다고 듣긴 했지만, 이상하게 선뜻 손이 가지 않더라고요. 아무래도 아직까지 저에게 역사책 속의 중국이 아닌, 현재 진행형의 중국은 전혀 모르는 나라인가봐요. 이름도, 사회 분위기도, 문화도, 제가 잘 모른다는 게 곳곳에서 티가 났어요. '중국의 일반 서민의 일상이 정말 이런가? 이건 특별히 하층민의 삶인가?' 하고 고민하게 되는 식이랄까요.


 총 12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당장 돈이 없어 똥냄새가 진동하는 뒷골목에서 아이를 낳아 키워야 하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지금 이 시대가 싫으니 전쟁이 난무하고 모두가 고생하는 당나라 시절로 타임워프를 하겠다는 교수나, 작가가 자신의 연인을 뼈앗아간 것에 분노하는 소설 속 주인공도 있습니다. 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만 나오는 건 아니고, 평생을 버스 운전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 노동자나 가족 모두를 부양했으나 그들 모두에게 배신당한 여성 가장도 있습니다. 누구라도 (이 중국 사회에서는) 불행합니다. 심지어 인간이 아닌 존재조차도요.


 소설 곳곳에 이상하달까, 어색한 묘사나 문장이 있습니다. 이게 번역 문제 같지는 않아요. 아마 작가가 일부러 그렇게 쓴 것일 텐데, 아무리 봐도 말이 안 되는 구석이 있거든요. 그런 작품이 몇 편 있는데, 그 중에서도 <아버지의 감옥>이 특히 심해요. 거기서 화자는 1인칭 시점으로, 감옥에 갇혀 있어서 소리를 들을 수만 있고 아무것도 볼 수는 없거든요? 그런데 계속해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부분에 대한 묘사가 등장합니다.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든가, 편지를 꺼냈는데 모두 서른 통은 되어보였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보면서 계속 혼란스러웠는데, 문제는 작가가 이걸 의도한 건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의도했다 해도 개인적으로는 불호 포인트였습니다. 자꾸 시점을 왔다갔다 하니까 읽다가 턱턱 막히더라고요.


 책 홍보 문구로도 쓰이고, 띠지에도 적혀 있는 "누군가의 기괴한 언어로 시를 읽는 것 같았다"라는 문장은 이 소설에 대한 평이 아니라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시인의 글에 대한 평가입니다. 그 시인은 사랑하는 여성을 쫄쫄 굶기다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고, 이 소설의 모든 인물이 그렇듯이 불행해집니다. 작가가 남자라 그런지 화자가 전부 남자인데, 여성 독자로서는 상당히 냉담하게 볼 수밖에 없는 발언을 계속해서 등장인물이 불행해지는 게 힘들진 않았어요. 어쩌라고? 혼자 죽든가? 싶은 생각이 계속 들거든요, 특히 당나라로 넘어갔던 그 인간은 왜 안 죽어서 저런 헛소리를 늘어놓나 싶었다니까요. 그만 죽지 그래.


 중국에서 요즘 엄청 핫한 작가래요. 요즘 중국 문단 분위기는 이렇구나 하고 보심 될 것 같아요. 우리랑 비슷하기도 한 것 같고~ 다르기도 한 것 같은~ 그런 오묘한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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