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과학정신 - 현대프랑스철학총서 15
가스통 바슐라르 / 인간사랑 / 1990년 6월
평점 :
품절


읽은 기간: 4/1 ~ 4/9
번역 상태: 죄악이다!

내가 느끼기에 이 책은 현대의 고전이다. 그러나 현대 과학의 성과를 바탕에 깔고 매우 미묘한 사상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읽어내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더구나 그 번역의 품질이란! 읽으면서 내내 영역본이라도 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더 바라건대는 본문만큼 두툼한 해제와 깔끔한 각주를 단 새로운 역서가 나와 주는 것. 바랄 것을 바래야 하는 것일까?

바슐라르가 이 책에서 논박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서양의 전통적인 철학적 방법론이다. 즉, 이성을 사용하여 가장 직접적이고 단순한, 다시 말하면 확실한 기반을 찾아낸 후 그 위에 차곡 차곡 학을 쌓아올리는 방법론.

우선, 왜 데카르트인가? 즉, 왜 흄이나 로크가 아닌가? 그것은 바슐라르 자신이 데카르트의 후예답게 철두철미한 합리론자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를 무찌르고 전장에서 돌아온 바슐라르는 이렇게 선언한다. "예외란 없다. 예외와 비합리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합리성으로 수렴한다." 반전의 묘미가 있다.

다음으로 이성을 사용하여 가장 확실한 기반, 즉 가장 직접적이고 단순한 기반을 포착하자는 방법론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비판이 가능할 것인데, 아마 가장 근본적인 것은 "단순한 것은 단순화된 것"이라는 것일 게다. 예를 들면 평행선의 개념이나 동시성의 개념은 자명하지도 단순하지도 않다. 그에 대한 더 심도 있는 사색의 결과로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나 상대성 이론이 등장한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말이다.

직접적이고 단순한 기반에 대한 추구는 곧장 본질론으로 이어지고, 실체론적 철학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러나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성립사에서 보듯이 우리가 평행선의 개념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의 본질을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다양한 적용의 양상을 안다는 것이다. 즉,  본질론은 무용하다. 또, 단순한 것이란 그것을 포괄하는 복합체를 전제하는 한에서 단순한 것이다. 즉, 단순한 것, 근본적인 것, 기본적인 것이 먼저 오지 않는다. 실체론은 무용하다.

"단순한 것은 단순화된 것"이란 비판이 가장 잘 적용될 수 있는 대상 중 하나가 결정론일 것이다. 결정론은, 예컨대 사물의 다양한 상태 중 고체 상태만을 고려한, 단순화되고 고정된 심적 상태를 반영한다. 데카르트도 이런 관념 안에 있었기 때문에 "운동과 형태를 구분하라"고 사람들에게 조언했지만 그가 도외시한 것, 즉 유체가 이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음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본질론이나 실체론, 결정론 등등에 대한 논박으로 현대 과학의 성과를 원용하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바슐라르가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여 수행하고 있는 일이 그것이다. 물론 여기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겠다. 위에서 논의한 것들도 책 전체의 줄거리라기보다는 여러 테마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 책은 상당히 얇지만 매우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간략히 스케치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또, 과학적 활동의 배후에 놓여 있는 심적 상태에 대한 역사적, 심리학적 고찰과 그에 대한 교육학적, 철학적 의의를 다루면서 저자 자신의 매우 급진적으로 보이는, 수학적 형이상학이라 할 만한 주장을 내놓고 있어서 그에 대한 숙고를 피할 수 없게 한다. 앞서 이 책이 미묘한 사상을 다루고 있다고 한 것은 이것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다.

자, 이 모든 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읽기 어려운 기술적 사항들로 꽉 차 있는 이 작은 책은 고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결론도 간단하다. 즉, 고전을 읽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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