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랩
스튜어트 브랜드 지음, 김창현.전범수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6년 12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1988년도에 처음 출판되었고 내가 읽기로 인터넷이라는 단어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비디오 규격 문제 등 낡아빠진 이야기도 많고, 좀 더 냉철한, 다시 말하면 좀 더 통찰력 있는 시각이 요구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들은 이 책이 떠맡고 있는 과업의 무게에서 직접 도출될 수 있는 쉬운 비판일 뿐이다. 이 책은 진행되고 있는 현대, 또는 가까운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 가까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또 얼마나 무모한 일이냐! 그러나 작자 스튜어트 브랜드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물의 전체를 이해하게 되는 시기는 그것이 변화하고 있을 때이다" 브랜드가 천진한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스튜어트 브랜드가 이 책에서 한 일은 기본적으로 기성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으니까. 앨런 케이에게서 영감을 얻은 것이 분명한 이 책의 부제, "Inventing the future at MIT"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이 책은 실제보다 더 낡아 보인다.

예를 들면, "스포츠와 선거중계는 아마도 종전과 같이 생중계로 전달될 것이다. 그 외의 것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와 같은 문장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태를 수사없이 묘사하는 말로 들린다. "독백도 대화가 될 것이고, 비개인적인 것도 개인적인 것으로 되고, 전통적인 매스 미디어도 본질적으로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라는 말도 그렇다.

이 책에서 말하는 모든 사태들의 저변에는 "TV, 음반, 영화, 신문, 잡지, 도서, 그리고 컴퓨터 등 모든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융합 현상"이 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융합 현상의 저변에는 모든 미디어 컨텐츠가 디지털화될 수 있다는 간단한 사실이 놓여 있다. 그리고 디지털화의 실제적인 의미는 정보가 값싸게 운송되고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심층적인 의미는 모든 것이 개인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사람의 입술은 정보를 전달하는 하나의 미디어이다. 그리고 그것은 디지털화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입술 모양을 읽고 반응하는 기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흥분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그것은 기성의 것이거나 진행되고 있는 현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정보화기기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점도 바로 그것이다. 즉, "극도로 인격화된 친근한 기술들을 모든 다양한 주문에 맞춰 만드는 것"이다. 이쯤되면 CES에서 스티브 발머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 얘기한 것들이나 삼성이 말한 것들에 하등의 신선함을 부여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만다. 낡은 것은 현대인가?

디지털화는 기술적 인민주의를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개인에게 새로운 자유를 부여한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은, 혹은 자유는 새로운 종속을 낳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수신자가 특정 컨텐츠를 선택하고 그것을 재창조할 수 있다는 브로드캐취라는 개념은, 철저하게 대중성만을 위해 설계된 컨텐츠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할 수도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태는 이 문장에 긍정적으로 답하고 있을까, 부정적으로 답하고 있을까?

브랜드의 이 책에서 맡을 수 있는 고전적 품격은 바로 이러한 정치 사회적인 문제를 한 책에 아우르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 같다. 비록 그 문제가 저자 자신의 통찰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그 깊이에 있어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누군들 이러한 문제에서 깊이를 과시할 수 있을 것인가? 예를 들어 최신 스마트폰의 기술에 놀라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기술은 진보된 것이라기보다는 개인화된 것일 뿐이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냉철한 사람도 하나의 아이디어가, 하나의 프로토타입이 실험실의 벽을 넘어 대중화되는 사태에 이르러서는 그 흐름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에 대해 쉽게 말문을 열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대에 냉철함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브랜드가 천진한 것은 아닐까 의심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사물의 전체를 이해하게 되는 시기는 그것이 변화하고 있을 때인가? 현대의 학문들이 가르쳐 주는 바에 따르면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진정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최종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이란, "We've made this world!" ("닥터 후"에서)일 뿐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할 수 있는 말이란, 어쨌든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가 아닐런지. 하나마나한 말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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