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를 위하여
루이 알튀세르 지음, 서관모 옮김 / 후마니타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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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저자들 중 가장 크게 공감을 하며 읽었다. 정치하고 분석적이고... 


물론 정세적인 부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구소련의 독재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성격이 만천하에 까발려졌고, 구소련에서 나온 이론들의 교조주의는 도저히 시대를 따라갈 수 없었고,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들이 발굴되면서 인간화된, 혹은 알뛰세의 관점에서는, 부르주아화 된 마르크스주의가 독자를 얻고 있었고 등등.  


이에 대해 알뛰세는 인식론적 단절이니, 이데올로기와 과학의 구분이니 하는 장치들을 사용해서 실존주의적 마르크스, 헤겔주의적 마르크스, 경제주의적 마르크스 등등에서 진정한 마르크스를 떼어 놓으려 한다. 알뛰세가 이러한 작업에서 성공했는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독자마다 판단이 다르겠지만 나로서는 그리 설득력을 느낄 수 없었다. 


게다가, 정세에 이끌려서이겠지만 알뛰세는 헤겔 해석에 있어 매우 폭력적이다. 예컨대, 누구나 헤겔의 성취라고 알고 있는, 우리의 인식에 직접 주어지는 것은 결코 단순체가 아니라는 이론을 알뛰세는 헤겔에게서 빼앗아 마르크스에게 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들은 용서될 수 있다고 본다. 당대성에 깊이 연루되어 있는 저작들은 이런 종류의 오류들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괴테의 말처럼 고투하는 자들은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나에게 이 저작의 고전적 풍모는 그 총체화의 시도에 있다. 그러므로, 내가 보기에 알뛰세는 마르크스와 더불어 헤겔의 탁월한 제자이다. 즉, 알뛰세는 헤겔을 빛나게 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하여"에서 다뤄지고 있는 모순의 중층결정에 대한 이론은 탁월하다고 본다. 그러나 헤겔도, 마르크스도, 알뛰세도 그 기제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는 답을 내놓지 않는다. 엥겔스가, 다른 맥락에서이긴 하지만, 답을 시도했다. 그러나 알뛰세는 엥겔스의 그런 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엥겔스의 이론이 매우 엉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엥겔스는 답을 하려고 노력은 했다. 알뛰세는 마르크스의 권위 뒤에 숨어 자신만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회피한다. 알뛰세의 날카로운 지성에 감탄하며 책을 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회피 때문에 알뛰세의 지성을 의심하게 되지는 않는다. 아마 그것은 그가 당 이론가이기 때문에 취할 수 밖에 없는 수동적 태도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총체화의 철학은 곧 구체성의 철학이다. 이 테제는 영원하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 구성에 구멍이 있다. 알뛰세는 거기 구멍이 있음을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고전 작가답게 하나의 문제성을 생산한다. 우리는 아직 그 문제성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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