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성에 관하여 - 개정판 비트겐슈타인 선집 6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이영철 옮김 / 책세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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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얄팍한 책이지만, 읽는 데 정말 정말 오래 걸렸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이 책이 난해하다든지 심오하다든지 해서라기보다는, 솔직히 말해서, 지루해서 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이런 지루함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비트겐슈타인이 죽기 직전까지 써내려간 철학적 단상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이 철학자의 최종적인 검수가 이루어지지 않은, 말 그대로 날 것의 노트 묶음이다. 하나의 주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집요하게 고찰하고 있다지만, 반복은 불가피하고, 그 집요한 고찰들에서 빼어난 영감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는 읽는 내내 긴장감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철학하는 방식을 알게 해준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는 있다고 본다. 


책의 내용은, 무어라는 영국 철학자가 쓴 일련의 논문들에 대한 코멘트들로 구성되어 있다. 철학을 희화화할 수 있는 사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무어는 "나는 여기 내 손이 있다는 것을 알아"와 같은 명제에서 우리 의식 밖에 세계가 존재한다는 명제를 도출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트겐슈타인도 여타의 철학자들에 동조하여 무어의 증명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에게 독특한 것은 무어가 '알다' 라는 말을 오용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즉, 무어가 제시한 명제들은 '알다'라는 말과 의미롭게 어울릴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도, 그 확실성을 부정할 수 없는 그런 명제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예컨대, "여기 내 손이 있어"나 "지구가 존속하고 있어"와 같은 명제들. 


내 관점에서는 비트겐슈타인에 별로 동조하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도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의미로움'에 대한 기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예컨대, 이른바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랭귀지 게임이라는 기준점을 도입하여, 예컨대 무어가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알다' 라는 말은 오용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철학 논고>에서도 기준점은 다르지만 똑같은 짓을 했다. 나는 사고에 자꾸 제한을 두려는 이런 검열관적 태도에 반감이 있다.) 그러나 오용을 말하려면 어떤 특정한 사용에 특권적 권위를 주어야 한다. 이 경우 비트겐슈타인에게 그것은, 참 혹은 거짓이 될 수 있는 진술이라는 의미에서의 명제와 어우러져 사용될 수 있는 한에서의 '알다'의 용법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러한 용법의 '알다'에 특권을 주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예컨대 비트겐슈타인은 "나는 여기 내 손이 있다는 것을 알아"와 "나는 지구가 존속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를 동일한 기준에 의해 '알다'라는 말을 오용한 것이라고 판단하지만, 이 두 문장의 기이함은 각각 다른 이유에서 연유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의의가 사태의 구체성에 우리의 주의를 돌리게 한 것이라 한다면, 그 사태의 구체성은 더욱 구체적인 구체성이어야 할 것이다. (이 책에는 재판정의 비유가 허다하게 나온다. 비트겐슈타인은 판사의 역할을 한다. 반면 나는 피고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본다. "말은 그렇지만, 법에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세상에나!")


(인간 비극. 소년이 얼마나 빨리 늙는가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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