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철학 - 사상과 그 원천 들뢰즈의 창 3
서동욱 지음 / 민음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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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철학자의 사상에 대한 선이해를 위해서 우리는 개론서를 읽는다. 사유의 전반적인 뼈대를 훑고, 그가 사용하는 개념들을 일람하고, 그 개념의 함의를 여타 철학의 틀과 대비하면서 차이를 뽑아낸다. 그것이 철학 개론서에서 우리가 요구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대개의 개론서는 해당 분야 전공자가 해외 서적 몇 권을 참조해가며 발췌해놓는 수준에 머문다. 엄밀한 검토와 우리말의 맥락을 따지지 않은 섣부른 개념 번역이 혼란을 초래하고, 한국어 어법을 과감하게 파괴한 용감한 번역투 문장이 제대로 된 이해를 가로막는 경우가 많다.

들뢰즈에 대한 국내 학자의 개론서인 이 책은 그동안 철학 개론서에 대해 가지고 있던 우려를 말끔하게 씻어줄 뿐만 아니라, 개론서라고 규정하기에는 아쉬울 만큼 엄밀한 검토와 충실한 보충으로 우리를 자극한다.

들뢰즈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할밖에 없는 나로서는 이 책에서 저자가 보여준 해박함과 문장 구사의 명료함에 상당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몇 권의 들뢰즈 번역서를 가지고 있고, 원서 일습을 구비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동안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린 들뢰즈를 절실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존 철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개념들을 만들어 내는 철학적 반항의 하나로서만 느껴졌을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이 보여주는 들뢰즈의 면모는 들뢰즈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제고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 책의 저자 서동욱 선생의 음성을 접하는 순간, 다른 들뢰즈 예찬자들과의 변별성을 확연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의 상품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현 상황은 들뢰즈에 대한 무비판적 옹호 일변도로 진행되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철학의 비판적 기능을 생각할 때, 들뢰즈철학은 비판적 전유의 대상으로 가다듬어져야 하며, 지금보다 차분히 그 칼날이 어디로 향해져야 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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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하기의 이론 - 소설과 영화의 문화 기호학
스티븐 코핸 외 지음, 이호 외 옮김 / 한나래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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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영화의 문화기호학'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은 영상시대를 구가하고 있는 요즘 대학의 인문학 교육에서 필수 테마로 부상하고 있는 '영화를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방법서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막강한 권위를 가져온 문학 교육의 교양적 가치가 예전과 같은 방법으로 이용될 수 없는 게 현실이고 보면, 영상시대의 문화적 아이콘인 영화를 접목시키려는 대학 교육의 방향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문학 교육이 담당해 온 예술적 감수성의 영역은 영화라는 낯선 구조에 대한 이해에 아직까지 어려움이 있고, 학생들은 소설을 매개로 한 교양 교육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그리 심각하지 않다. 교육자의 입장에서는 영화를 매개로 삼아야 한다는 부담이, 그리고 교육의 수혜자인 학생에게는 소설 읽기가 지루한 경험으로 놓여 있는 셈이다.

소설과 영화, 문학과 영화라는 테마가 대학의 교양 과목으로 우후죽순처럼 개설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과목들의 내실을 다져줄 교안도 방법도 마땅하지 않은 시점에서 여러 가지 책들이 번역되고 있다. 대부분 소설과 영화를 의미를 담은 이야기라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책들이다. 주로 영미권의 영문학자들이 저자인 이런 류의 책들은 소설을 주 대상으로 한 서사학적 접근법을 이용하고 있다.

한 편의 스토리라는 측면에서 영화와 소설은 비슷한 면을 지니고 있지만, 그런 스토리를 진행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매개체나 스토리 구성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서사론적 접근은 영상적 지각에 익숙한 학생들에게는 도리어 낯설고 따분한 접근일 수밖에 없다. 차이는 차이대로 보존하고 날카롭게 부각시킬 때 소설과 영화는 서로 긴장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이지, 하나의 관점으로 독특한 대상에 접근하는 방식은 그리 생산적이지 못할 수 있다.

이 책 역시 기존의 소설 중심의 서사학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 그리고 논의의 상당 부분이 고전 소설 분석에 할애되고 있어 정작 영화에 관한 논의를 기대했던 독자에게는 다소 실망감을 안겨준다. 서사학과 아울러 이 책의 뼈대를 구성하고 있는 문화기호학적 접근 역시 롤랑 바르트의 신화 분석에서 차용한 기호학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런 방법이 영화 분석에 적용될 때, 그 분석은 다소 맥빠지는 평범한 해석만을 가져온다. 젠더나 인종 중심의 해석 단위로 구성되는 분석은 문학이나 영화를 떠나서 절실한 맥락을 발견할 수 없는 해석 코드로 느껴진다.

영문학자들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영화와 문학 사이의 매개작업은 여전히 특별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문학이 영화에 준 영향이나 그 둘 사이의 유사점을 찾기 위해 서사의 차원에서 접근하거나, 명작을 영화로 읽기 같은 시도들이 작금 이뤄지고 있는 작업의 개요이다. 국내나 국외를 막론하고 미미한 성과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정작 구체적인 분석이나 비교 작업 이전에 왜 영화와 문학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 의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런 반성 없이 이뤄지는 '문학과 영화' 프로젝트는 익숙하지 않은 것을 익숙한 것으로 덮으려는 행동을 벗어날 수 없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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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푸코 섹슈얼리티의 정치와 페미니즘
미셸푸코 / 새물결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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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언어적 전회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현대의 인문학적 사유는 언어의 문제로 집중되고 있다. 흔히 담론이라고 일컫는 언어 구성체로 모든 논의가 귀결되는 것은 탈현대 사회적 사유의 특징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물리적인 실천과 외면적 효과보다는 언어적 수행을 통해서 구성되는 진리 효과가 더 중요하게 취급되는 요즘 가장 각광받는 이론가 중 한 사람이 미셸 푸코인 것같다. 에드워드 사이드, 가야트리 스피박같은 탈식민주의 권력 분석가들이 이론적 자원으로 삼고 있는 것도 푸코이며, 최근의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이 가장 큰 이론적 자원으로 삼고 있는 것도 푸코이다.

대부분의 탈현대적 논의, 해체주의적 논의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푸코의 담론-권력-지식 이론은 일견 허무주의적이고 비관적인 함의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권력과 저항이 동근원적이고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거나, 권력은 본질적으로 생체권력으로서 신체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를 통해서 수행된다는 주장은 페미니즘이 요구하는 저항과 분석의 도구로서 상당히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 함께 저항의 주체성과 전망을 어떤 각도에서 뽑아낼 것인가는 상당히 곤혹스러운 문제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푸코는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입장을 뚜렷하게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신의 논의가 특정한 측면으로 고정화되는 것을 막으려는 하나의 전략일 수도 있지만, 막상 그의 논의를 주목하는 쪽에서는 맥빠지게 만드는 요소일 수도 있다.

이 책은 소개된 지 10여년 가까이 되었다. 급변하는 이론서 시장에서 10년이라는 시간은 상당히 오래 전이라는 느낌을 줄 수도 있는 게 사실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지식 문화가 달궈진 양은 냄비 식듯 하는 나라에서는 이 책은 구닥다리 책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더니티 논쟁/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의 과정 속에서 불거져 나온 근대/탈근대 문제의 함의가 소진되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도 이 책이 포괄하는 논의들은 현재 페미니즘이 안고 있는 기반, 분석, 전망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미완의 숙제로 남겨진 것들을 숙고하는 데 필수적인 것들이다.

논문 모음집의 성격을 띠고 있는 이 책은 단일 저자의 저서가 가질 수 없는 모종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일단 논의의 폭이 대단히 넓고, 그 관점도 다양하다. 따라서 어떤 단일하고 체계적인 논점을 상세하게 탐구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부족한 책이겠지만, 페미니즘의 곤경을 적당히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다각도의 탐구를 가능케 할 지점들이 수두룩하다. 특히 이 책이 푸코와 페미니즘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왜 유독 푸코에서 가장 큰 이론적 자원을 확보할 수밖에 없는가?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은 현재 페미니즘이 안고 있는 문제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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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 로고스
짱 롱시 / 강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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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의 문화와 예술은 다양한 측면의 문제를 함유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언어의 문제로 수렴된다.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이 말과 글자라는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언어의 문제는 인간 문화의 시작과 끝에 가로놓여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도와 로고스라는 동서양 철학의 중심 화두를 각각 대표하는 개념을 표제로 내세움으로써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도가 아니라는 말은 언어의 지시 기능이 지닌 궁극적인 한계와 더불어 이러한 진리의 언명조차 말을 통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함유한 개념이다. 그리고 로고스는 이성 혹은 말을 뜻하는 그리스어로서 데리다식의 해체주의가 서양의 지적 전통을 로고스중심주의로 규정하면서 인구에 회자된 개념이다.

중국과 서양은 판이한 지적 전통을 가진 문화권으로 가정하는 것이 우리 주변의 미숙한 견해거나 선입견이 아닌가 생각된다. 도와 로고스의 대립이 압축적으로 표상하듯이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언어의 한계성에 대한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서양은 적어도 근대 사회 이후로 많은 것들을 언어적 표상으로 포섭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문학의 장에서만 보면 현대의 서구 시인들은 적어도 동양의 도 개념이 함축하는 언어의 함축성, 암시, 신비주의적 현현에 대해서 강한 열망을 드러내 보인다. 말라르메의 순수시나 발레리의 상징시학은 그들이 토해 내는 몇 마디의 언어가 아니라 그 언어가 깔고 있는 여백으로부터 말로는 현현되지 않을 신비주의적 암시를 지향했다.

저자는 양의 동서와 시간의 고금을 종횡으로 옮겨가면서 언어에 대한 서양적 관념과 현상을 중국적 관념과 현상과 비교하면서, 궁극적으로 적어도 언어 문제에 있어서 양의 동서 사이에 선입견으로 놓여 있는 거리를 좁히고자 하는 것같다.

저자의 이런 작업은 별다른 반성 없이 서양의 지적 전통에 기대어, 동양적 현상에 대한 접근을 피하는 지적 안일함에 대해서 반성하게 한다. 조선적인 것은 서양 근대의 개념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비교 접근 대상으로서 미달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암묵적으로 전제하지 않는가 생각된다. 이런 문제는 현대 문학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특히 더 염두에 둬야 할 것같다.

안일한 재생산이 아닌 생기와 활력으로 가득 찬 도전적인 재생산을 충동질하는 이런 책은 새로운 작업을 위한 영감을 제공해 준다. 저자는 중국계 미국인 학자이다. 경계선에 가로놓인 위치가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 건 아닌가 싶다. 이상의 시를 번역하고 연구한 월터 류의 위치와 가능성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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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미디어 인간 이상은 이렇게 말했다
김민수 지음 / 생각의나무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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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문학만큼 다방면의 학자들이 들러붙어서 분석과 해석의 칼날을 곧추세운 한국 작가도 드물 것이다. 이는 그만큼 이상 문학의 세계가 열린 체계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김민수 교수는 디자인 전공자로서 이상의 초기 시를 화두로 삼아 한 권의 책을 써냈다. 기실 전체 여섯 장 중에서 두 장만이 이상 문학에 할당된 것이지만, 나머지 장들도 그 두 장에서 펼치는 논의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 역할을 하느니 만큼 연결성이 없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민수 교수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이상에 대한 연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전후 사정을 감안하면 김민수 교수의 이상 연구는 하등 문제가 될 거리가 없다. 오히려 제한된 경계를 넘어 학제적 연구의 시각에서 이상을 연구했다는 것은 이상 문학을 문학의 관점에서만 연구하던 이들에게는 상당히 신선한 충격이었고, 새로운 방면에서 연구의 틀을 마련할 수 있는 상상력의 자극제 구실을 하였기 때문이다.

김민수 교수의 논의 내용 중에는 다소 과하다 싶은 부분도 없지는 않다. 디지털 가상 공간과 멀티미디어라는 90년대적 분위기를 투영해 이상 문학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우선 그렇고, 치밀한 논증을 넘어서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상 신화를 또 다른 견지에서 구축한다는 우려를 주기도 한다. 이러한 무리수는 방외인적인 시각이 가질 수 있는 자유로움의 일종으로 보고 넘겨도 좋을 듯하다.

그리고 디자인 전공 학자라고 섣불리 예단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그의 인문학적, 예술론적, 과학적 지식은 엄격한 학제적 틀 속에 갇혀버린 대학의 지식 구조 속에서는 신선한 기운임에 틀림없다. 그가 미대 내에서 배척받은 것은 정실과 학연에 얽매이지 않는 정직성과 그가 보여준 새로운 학풍에 대한 기존 학자들의 모종의 기득권 심리가 작용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이 책은 인문학의 위기, 문자 매체의 위기를 화두로 삼고 있는 우리 시대에 진정한 반성은 어디에서 비롯되어야 하는가를 암시해 주는 책이다. 급격한 위기감과 상실감을 깔린 '위기'에 대한 불안 심리는 넓은 맥락에서 보면 결코 어떤 것이 급격히 사라지고 그 자리를 완전히 새것이 대체하는 그러한 것은 아니라고 김민수 교수는 주장한다. 단지 익숙한 것이 쇠퇴하면서 새로운 것을 바라볼 틀을 갖지 못한 시각의 불안이 위기의 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무학점 강의를 몇 년 간 계속하면서도 역사속의 갈릴레오 갈릴레이처럼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신념처럼 되뇌고 있을 그의 건승을 비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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