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영화사 동문선 현대신서 17
막스 테시에 지음, 최은미 옮김 / 동문선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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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본영화에 대해 통시적으로 접근한 거의 유일한 책이다. 이론이나 비평과 더불어 역사는 영화에 다가가는 삼각 고리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이나 비평 쪽 서적이 압도하는 현상은 우리가 여전히 총론과 실제 비평의 영역을 헤매고 있다는 현실의 반증처럼 보인다. 역사의 흐름을 읽지 못할 때 개별 사건들은 문맥과 접목되지 못하는 기이한 언어행위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막시 테시에라는 프랑스인의 일본영화사를 번역했다는 사실은 특이하다. 일본의 영화 문화와 역사를 가장 잘 이해하고 충실히 서술할 수 있는 능력과 권위는 그 당사자에게 있음이 분명한데, 왜 굳이 일본 저자가 아닌 이국의 저자가 쓴 책을 번역한 것일까? 프랑스라는 국적이 권위를 부여해주는 것일까?

이 책의 특징이라면 일본영화의 미학적 가치를 가장 먼저 발견한 칸, 베니스 영화제, 그리고 일본의 작가영화에 대해 열광적이었던 프랑스 영화비평지 <카이에 뒤 시네마>, <뽀지띠프>를 둘러싼 유럽 쪽의 관심이 적절히 반영된 시각에서 일본영화사를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정치사회와 영화제도 상 변동의 축을 따라 구로사와, 오즈, 미조구치, 스즈키, 오시마, 키타노(비트), 미야자키로 이어지는 일본영화의 큰 맥을 훑으면서 나아가는 이 책에는 기존의 상식을 크게 뒤집을 만한 내용은 없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단편적 지식의 수준에서 질서를 잡지 못하던 일본영화에 대한 지식을 일련의 흐름으로 꿸 수 있는 계기로서는 충분하다.

이 책을 읽는데 긴장이나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금방 읽힐 분량에다 번역도 수준급이기 때문이다. 부록으로 일본영화의 프랑스 출시 현황이 소개되어 있다. 처음에는 한국 출시 현황인줄 착각했다. 아쉬운 점이다. 프랑스에는 흔히 거장으로 불리는 일본 영화 감독의 작품들이 꽤 출시되어 있다. 우리와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는 점을 직감할 수 있다.

일본영화는 꾸준히 소개되고 있지만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그 미지의 영역에 대한 몽상이 실제 이상의 기대와 환상을 부풀리는 일은 하루바삐 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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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도 서문문고 164
프리드리히 실러 / 서문당 / 197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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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책을 많이 읽는 편이지만 시나 소설 같은 문학 작품은 왠지 잘 읽게 되지 않는다. 문학 작품에서 바라는 거라면 감동인데, 어떤 작품을 봐도 선뜻 이걸 읽으면 감동이 오겠구나! 싶은 게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비평적 관심에서 읽어볼 수도 있겠지만 은희경, 신경숙, 성석제, 김영하 등 잘 나가는 젊은 작가의 작품에 당장 큰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기껏해야 재치나 유머, 글재주 정도로 버무려 놓은 글을 읽는 건 심심 파적이 되기가 십상이다.

남들에 비해 넘치는 게 시간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의외로 내 시간 관념은 경제적이어서 그 무수한 시간의 어느 한 자락이라도 허투루 지나치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난 참 결벽증적인 데가 있다.

이렇긴 하지만 종종 희곡 작품을 즐겨 읽는다. 인생은 에로스, 에토스도 필요하지만 파토스를 빼놓고 인생의 실감을 논할 수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희곡은 연극을 통해 상연될 때 실감은 두 배, 세 배로 증폭되지만 굳이 그런 기회를 접하지 않더라도 읽으면 분열과 대립, 증오와 분노, 위선과 죄악의 들판을 헤치는 것같은 파토스를 전해준다. 현대 작품들은 세속화되어 그 느낌이 덜한데, 고대 비극이나 하다 못해 셰익스피어의 작품만 들춰도 내게 전해져오는 파토스는 당연 신적인 경지에 달한다.

프리드리히 쉴러. 헤겔이나 아도르노의 책에서 제목을 봐왔고, 당대 괴테와 쌍벽을 이룬 사람이라는 그의 <군도>가 올해 번역되어 나왔다. 그의 작품이 앞서 몇 편 번역되었지만 실제로 접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프랑스대혁명의 기운을 이어받은 독일 질풍노도 시기의 작품으로 작품은 전체적인 톤은 상당히 거칠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 <오델로>를 연상시키는 플롯에다 신의 운명적 저주로 파멸하는 궁정가의 파멸 이야기에는 채 비극으로 승화되지 못한 기운이 감돈다.

익히 알려진 독일 쪽 고전이긴 하지만 요즘 시각으로 보면 다소 읽기 부담스러운 측면도 있다. 도적 무리들의 악행 묘사나 유일한 여성인 아말리아의 소극적이고 잠자는 공주같은 이미지, 끝내 자신의 여인을 죽이고 미쳐 가는 주인공 칼의 모습은 그 어떤 고상함, 숭고함에 대한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쉴러는 <인간의 미적 감정에 대한 서한>이라는 책자를 통해 문학이 인간의 미적 감정을 고양시키는 숭고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기실 <군도>를 통해 숭고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천상의 기운이 쇠한 시대 탓일까? 비기독교도인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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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렇게 창작한다!
황의웅 지음 / 시공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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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들은 무수한 일본 애니메이션들 중에서 특별히 나를 사로잡는다. 그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원령공주> 이 두 편이다. <바람게곡의 나우시카>를 처음 봤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황폐해진 세상의 공기를 정화하는 생명의 부해를 파괴하려는 토르메키아 군대를 막아서던 나우시카의 모습은 그 어떤 생태주의의 설교보다 박진감 있게 다가왔다. 그리고 인간의 파괴에 맞서 밤이면 숲에 생명력을 되돌려주던 거대한 사슴신 시시가미의 이미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숲을 파괴하는 인간의 거친 욕망에 대한 이미지화된 묵시록이었다. 이 작품들을 보며 도대체 이 거대한, 이 숭고하기조차 한 이미지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을까 궁금했다.

일본 애니나 미야자키에 대한 개론적 지식 정도라면 인터넷을 통해서도 충분히 접할 수 있지만 그것 이상을 원하는 이들에겐 책밖엔 없다. 그래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렇게 창작한다!>라는 약간 날렵한 제목의 책을 구했다. 도판이 많이 들어 있는 책이라 가격은 좀 비싼 편이지만, 평소 접할 수 없었던 도판들이 많이 들어가 있고 미야자키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들어가 있는 편이라 자료적 가치는 충분한 책이다.

미야자키의 작품들을 보면 캐릭터나 상황 설정 면에서 익숙하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이 책에 의하면 그건 미야자키가 기존의 작품들을 통해 표현한 것들을 끊임없이 변용하거나 확장하는 방식의 작업 스타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미야자키 작품 속의 캐릭터, 배경, 장면, 상황들이 작품 사이에서 변형되는 과정, 미야자키의 것이 아닌 다른 작품들이 자신의 작품으로 차용되는 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보다는 미야자키 활동 초기 시절의 작품이 예로 제시되는 경우가 많아 실감은 부족하지만 그의 작업 스타일을 이해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된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것이지만 통념처럼 미야자키의 작품 경향이 유럽적인 것에서 일본적인 것으로 변화했다는 단정은 가능하지 않을 것같다. <원령공주>는 가장 일본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이긴 하지만 아시타카나 야클의 캐릭터에는 일본 아닌 것의 영향이 적지 않게 묻어나고, 궁극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대립을 넘어선 상생 사상이 이미지의 배면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의 매력은 모험, 판타지, 동화와 같은 인간 보편의 욕망과 경험을 훌륭하게 결합시킨 데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통해 그의 경험, 욕망, 작업에 대해 조금 알 수 있었지만, 미야자키에 대한 내 갈증은 여전하다. 내가 지금 원하는 건 그의 말, 삶,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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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머거리 너구리와 백석 동화나라 - 빛나는 어린이 문학 2 빛나는 어린이 문학 2
백석 지음 / 웅진주니어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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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백석을 공부하면서 백석 문학은 그 아름다움과 가치에 비해 세상에 덜 알려진 것들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논문의 테마로 정한 것도 따지고 보면 빈약하기 짝이 없는 글이나마 백석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데 일조하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에서였다. 이후 수년간 백석을 놓고 살았지만 그에 관한 서지는 종종 확인해본다. 그의 문학이 가진 아름다움을 누군가가 새로이 밝혀놓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백석은 처음에는 시인으로 알려져, 나중에는 동화 작가로 더 유명해졌다. 반가운 일이다. 한창 백석을 들여다볼 때는 그의 동화를 접할 수 없었다. 그러더니 얼마 전부터 그의 동화가 세상에 소개되었다.

유아용을 골랐다. 도판이 위주가 된, 어린 시절 봤던 디즈니 동화 풍의 책이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디즈니 동화처럼 도판이 현란하지 않아서 좋다. 백석의 동화에 원색 위주의 유화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 책의 도판처럼 초록색을 많이 쓴 수채화 풍의 도판이 배석에겐 잘 어울린다.

좋은 세상이다. 물질적인 풍요 덕택에 아이들이 마음껏 동화를 읽으며 커갈 수 있고, 또 백석 동화처럼 그리 오래되지 않은 창작 동화를 읽으며 자랄 수 있으므로. 아이에게 선물할 기회가 생긴다면 백석 동화를 선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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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에게 누이가 있다면 - 여자들에 대한 글쓰기
캐롤린 하일브런 지음, 김희정 옮김 / 여성신문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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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게 결혼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이자 종착역이었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예전에 비해 결혼의 가치는 상대적인 하락 곡선을 그리고 있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 특히 여자들에게 결혼은 중요한 관심사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인생의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일 결혼이 우리 사회에서 다루어지는 방식은 파편적이다.

결혼을 가장 큰 테마로 다루는 tv 드라마에서는 남녀의 결혼을 하나의 목표로 설정하고 그 목표가 달성되면 하나의 신화를 시청자에게 남기고 사라진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결혼 그 자체가 아니라 결혼을 통해 맺어지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사실은 은폐된다. 그리고 낭만적 사랑의 신화가 무참히 깨질 때 급속도로 무너진 남녀 관계는 행복한 프라임타임을 훌쩍 지난 밤 시간 인생의 공허감을 부추긴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무기들을 결혼의 환상과 맞바꿔버린 여자에게 남는 건 절망이다.

<셰익스피어에게 누이가 있다면>은 그 절망적인 공허감을 넘어 자신의 분노와 절망을 제압하는 희망의 언어를 갖기를 꿈꾸었던 여성 작가들에 관한 책이다. 남자의 그늘에 가려 재능을 억압당하며 착취당해야 했던 클라라 슈만같은 이들의 얘기를 모를 사람은 없다. 그것은 역사가 통념과는 달리 사실성과 허구성이 교묘하게 조합되는 하나의 픽션일지도 모른다는 역사 음모론의 실례와도 같은 것이다. 그런 역사가 엄연히 진실로 가정될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의 역사가 가부장들의 이야기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글쓰기를 지배한 남자들의 권력에 맞서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자 했던 여자들을 추동한 것은 명예욕보다는 절실한 생존에 대한 갈망이었다.

<셰익스피어에게 누이가 있다면>이라는 제목은 번역할 때 새로 붙인 이름인데,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셰익스피어 당대에 만약 그의 누이 주디스가 똑같은 재능을 타고났다면 그녀는 미쳐 죽었을 것이라고 한 유명한 대목에서 따온 것이다. 이 책은 여성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부족한 우리에겐 훌륭한 참고가 될 것같다.

우리 문학에도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언어로 쓰기 위해 노력하는 여성 작가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간혹 자기 성에 갇힌 글쓰기를 하는 여성작가들도 있는데, 그만의 절실함이야 있겠지만 성에 갇힌 글쓰기는 타자를 수용하는 능력이 약하다. 그래서 보편적인 공감을 얻기가 힘들다. 훌륭한 글쓰기란 아마 남과 여라는 귀속된 성을 뛰어 넘어선 영역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귀속된 성을 넘어선 또 다른 성에 갇히는 건 더욱 보기 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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