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소년이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늙어가는 게 인생이라는데 
 그댄 그 고운 청춘의 노래 채 부르기 전에  
 다신 못 올 곳으로 푸른 계절에 떠났지 
 미친 세상 모진 바람 안고   

 그대 떠났어도 세월은 멈출 생각 없이  
 그래왔던 것처럼 그저 흘러만 갔고 
 갈라진 건 갈라진 채로 비틀어진 건 
 더 비틀어진 채로 여기까지 왔어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이   

 그대 너무 서러워마요  
 어차피 인생이 그런 걸 
 떠나간 사람 지나간 일일랑 그저
 세월에 묻혀가는 걸  
 

 작사,곡 정윤경

 

노래가 안 나오면 여기로  http://blog.naver.com/likeamike/150017707483

 

 누군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죽어가도 사람들은 별로 관심하지 않는 세상이다, 나 역시. '열사'라는 말이 오히려 그를 가두는 명명이 될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의 외침과 죽음이 세상에 공명을 일으키고 사람들의 양심을 긁어대던 시절이 더 살만한 건 아니었을까... 어줍잖은 생각을 해본다.

 문득 떠올랐는데, 그러니까 오늘이... 그런 날이다. 명동성당에서의 할복 투신, 이라는 뉴스를 어렸을 적 나도 봤었다. 그런 죽음과는 어울리지 않는 해사한 얼굴의 청년, 망월동에 가면 나는 제일 먼저 그를 찾아갔었다. 

 그 많은 죽음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도 정말 일이겠다는, 싱거운 생각을 예전에 '열사력'을 보면서 한 적이 있다. 한때는 새해가 되면 정신 차리고 살아보자고 그 달력을 주문한 적도 있었지만, 책상 위에 그들을 모셔두고 상기하며 삶에 열심을 내는 척하는 일 역시 참으로 고역이었다. 그 가식, 그 익숙해짐,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역겨움...

 열사라면, '열사가 전사에게'의 비장함과 치열함 혹은 '벗이여 새벽이 온다' 같은 처연함과 비통함을 먼저 떠올렸지만... 어쩌면 이제 열사는 이렇게나 담담하게, '단지 네가 먼저 갔을 뿐'이라고 달래며 기억해야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노래를 들을 때마다... 아는 척 하기에는 너무나 도저하고 처절한 희생이지만 그나마 내놓고 수상하던 시절이어서 다행입니다, 싶은 쓸쓸한 감상. 

 전태일 열사와 허세욱씨의 차이는 무엇일까. 허세욱씨 죽음 이후의 집회에서 느꼈던 이상한 어그러짐과 웅성거림 같은 것이 떠오른다. 평소 그를 알던 사람들은 발언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안타까워 어쩔 줄 몰라했지만, 그저 '그가 분신했고 죽었다'는 사실의 확인 속에서 나는 솔직히 좀 무감했고 그래서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그는 2008년의 열사력에 새로이 이름을 올릴 것이다.

 오래된 죽음일수록 그를 기억하는 방식은 일상적이고 습관적으로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조차 이렇게 잊혀져도 되는 걸까. 사는 것도 기억하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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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7-05-15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 하나 더 열어놓고 음악 들으며 페이퍼 읽었어요.
수많은 열사들 중의 한 명이 아닌, 요셉이라는 세례명의
청년 조성만 열사를 구체적으로 추모해 봅니다.
1988년 5월 15일, 세상에나, 벌써 세월이 그만큼 흘렀군요.
어른들은 살만 찌는데 /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너는 떠났구나
라는 고은 시인이 바치는 시도 있네요.
노래 참 좋아요.

2007-05-15 14: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waits 2007-05-16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맞아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고 들었었는데,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홀로 얼마나 번민하고 고통에 몸을 떨었을까요. 고은 시인의 시구, 저도 이미 살만 찌는 어른이 되어버린 터라... 아프네요. 이렇게라도 자꾸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님, 그러셨군요. 예민하고 순결한 사람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어렸을 때라 실은 얼굴만 또렷이 기억할 뿐이지만요. 그 문집, 궁금하네요.
그리고 또 궁금했답니다. 이따금 주인 없는 방을 서성이기도 했는데... 어쩐지, 그 침묵의 고요를 깨뜨리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저는 4월 초에 부천으로 돌아왔지요. 보름쯤은 무기력에 시달리며 꼬장을 부리다가, 얼마 전부터 정신을 차리는 중이예요. ^^
 

 




 

어깨가 쳐진 그대여 
고개를 숙인 그대여 
그렇게 괴로워해도  
그대는 소중한 사람 
세상의 여러 사람들   
저마다 잘난 사람들
    
날마다 씨에프 속엔   
모두가 행복한 사람   
  

하지만 눈을 들어봐요  
그대는 이 우주 안에 
누구와도 바꿀 수는 없는 
그대만의 세상 있잖아 
비교는 바보들의 놀이   
최선은 우리의 권리 
    
결과는 하느님의 뜻   
감사만이 행복의 열쇠 
 

우리는 어릴 적부터  
그렇게 배워만 왔지 
남보다 잘났어야만 
칭찬을 받았었나봐  
공부는 재밌는 건데   
왜 인지 힘겨워 했고 
    
인생은 즐거운 건데   
왜 인지 어렵게 됐지

이제는 눈을 들어봐요  
그대는 이 우주 안에 
누구와도 바꿀 수는 없는 
그대만의 세상 있잖아
 
비교는 바보들의 놀이  
최선은 우리의 권리 
    
결과는 하느님의 뜻   
감사만이 행복의 열쇠

 

작사,곡 최성원



노래가 안 나오면 여기로  http://blog.naver.com/likeamike/150013833665

 

 뭐랄까, 의욕과 진전의 불균형이 불감당인 나날이다. 화-수 총회에 참가하느라 공주에를 다녀왔고, 몇 년 전부터 자료나 글로만 접했던 '어른'들의 모습을 보며 심란하고 실망스럽고 한편 스스로를 돌아보게도 됐다. 아직은 잘 알지 못하는 '판'에 대해 들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들과 실제로 마주친 사람들 그 속에서 나의 정리되지 않는 생각 그러나 버릇처럼 남발하는 표현 사이에서 중심을 잃어버렸다는 느낌도 든다.

 3주 정도 흘렀나보다. 베트남 식당 아저씨가 어수룩해 뵈는 청년 하나를 데리고 좀 머뭇거리며 도서관에 들어섰다. 좀 도와달라고, 자기는 아는 것도 없고 답답해서, 동사무소에 다녀오는 길인데 여기 그런 거 하는 데 아니냐고. 11월에 부천으로 전입해왔다는 청년은 정신지체 3급의 장애인, 그의 아내는 2월 초 출산을 앞둔 베트남 이주여성이다. 장애인종합복지관이니 동사무소니 보건소니 병원이니 알아보고 쫓아다니며 이제 그런 대로, 출산 준비에 대한 걱정은 한숨 돌렸다. 

 솔직히 말하면, 대체 어쩌자고 결혼은 했을까 멋 모르고 시집 온 베트남 처녀는 얼마나 상심했을까 하는 생각에 며칠은 답답하기만 했다. 하지만 집으로 찾아가 만난 그녀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해맑은 웃음을 담은 얼굴이었다. 80년, 82년생인 어린(?) 부부는 대책도 가진 것도 없었지만 괜히 불안하고 답답한 건 지켜보는 사람들일 뿐, 그들은 앞에 놓인 막막함들... 생계도 출산도 육아도 그저 자연의 순리인 양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금요일에 도서관에 있으면 자원활동하는 어린 친구와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나누게 된다. 학교 다닐 때부터 소위 후배 '키우는' 일에는 재주도 욕심도 없었던 나는, (물론 운동가도 아니지만) 참 아는 것도 논리도 없다. 그런 주제에 불만은 또 많아서 무슨 이야기든 시작하면 주로 비판이다보니 스스로 당황스러울 때가 많은데,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온갖 비판을 일삼는 내 입의 결론이 늘 말도 안 되는 허탈한 결론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빨리 죽어야지, 그러니까 다 없어져야지, 그러니까 다 사람 나름이라니까.

 어느 날 문득 의식을 하고보니 온 세상이 '행복'을 부르짖고 있어서였는지, '행복'이라는 말 앞에서는 늘 적잖이 이물감을 느낀다. 기를 쓰고 행복해져야 한다는 빵빵한 주장에 바람 구멍이라도 하나 날리고 싶은 심술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건 나는 행복론으로 무장한 많은 것들에 대해 거부감을 감출 수 없다. '행복'을 말하기에는 차마 꿈꿀 수도 없는 사람이 너무 많아 미안하다,고 멋지게 말하고 싶지만 실은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순전하게 나도 행복해지고 싶다! 고 말하는 게 어쩐지 멋적고 부끄러운 건지도 모르겠다.

 가끔 지쳤다 싶을 때 간지럽게 떠오르는 노래다. 세상만사 대체로 맘에 안 드는 삐딱한 마음, 허나 실은 따스함이나 다정함 따위를 내심 갈구하고 있음을 '들키지 않고' 즐길 수 있을 만큼의 희박한 대중성이 이 노래의 미덕이라고 위악어린 변명을 혼자 늘어놓는다. 흥얼거리며 따라부르다보면 마치 '전향'이라도 한 듯 난감과 민망이 교차하곤 하는 '세상은 아름다워라' 류의 가사도 실은 은근히 위안이 된다. 참 무기력한 노래라고 밀쳐뒀던 게 무색하다. 날이 추워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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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7-01-27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오랜만에 들으니 좋네요.

waits 2007-01-30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래 참 따뜻하죠? 좋으시다니, 저도 좋아요! ^^
 

 



 

하늘이 자꾸만 낮아지는 날
다 지나버린 날들뿐
그렇게 모두다 사랑해봤지만
우리들 이렇게 붙잡을 수는 없어
힘들게 힘들게 울음을 참지만
네 앞에서 참지 못한 건
우리들 함께 지내오던 날들이 내겐
가장 그립고 소중하기 때문야
햇빛 비추는 날
다시 올 수 있을까
언젠지 모르는 그 날들을
또 기다려 봐

 

작사, 곡 유희열


 
 

 요즘 부천 거리 곳곳에서 꽃핀을 꽂은 아저씨를 마주친다. 스탠딩은 영 체질이 아니지만 그래도 부천인데 싶어 살금살금 알아봤더니 역시나 엄두가 나지 않는 비용. 아저씨의 공연을 비용 대비 효율로 차마 환산할 수는 없지만 암튼 그랬다. 다행히, 아쉬워 할 사이도 없이 단 한 번 공연이 있는 바로 그 날이 우리 단체의 새해 첫 운영위원회로 잡혔다. 어차피 못 갈 거 기왕이면 어긋난 일정을 핑계 삼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이 난 김에 아저씨 미니홈피에를 오랜만에 가봤다. 공연 중이라선지 찾는 이도 많고 방명록도 만원이다. 올라와있는 사진들이랑 아저씨 글이랑 구경을 하다가... 그러다가 문득 아주아주 옛날 노래가 떠올라 다시 찾아들었는데, 차암 새롭다. 그래, 예전의 아저씨는 이렇게 노래하던 사람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가창력 논란이야 늘 따라다니지만;; 그래도 난 다듬어지지 않은 이 목소리가 정말 좋았다. 

 주말이 아닐 때는 그 좁은 극장 몇 안 되는 객석마저 훤히 비어 오히려 민망했던, 작은 공연이 이어지던 어느 날. 마침 나오기로 한 게스트는 펑크를 냈고, '달빛의 노래'로 네 번째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대상을 받았으며 '햇빛 비추는 날'을 만든 어쩌고 하는 아저씨의 급작스런 소개에 이어, 내 등 뒤에서 수런거리던 연인 중 한 명이 당황스레 불려나갔다. 솔직히 말하면 거기 있던 사람 중 나밖에는 존재를 모를 것 같은 '새파란' 유희열은,여린 소년같은 감성과 재미난 소녀같은 수다를 겸비한 참 귀여운 청년이었다.

 나중까지도 아저씨는 이 노래를 공연에서 자주 부르셨다. 형편이 나아진 후에는 단순하고 정갈한 편곡이 꽤나 대곡스럽게 바뀌었고, '언젠지 모르는 그 날들을' 기다리는 대목에서는 원곡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이도 저도 좋지만, 정말 오랜만에 다시 들으니 많은 날들 긴 세월이 흘렀다는 격세지감이 더 간절하고 그립다. 미니홈피 배경음악을 이 노래로 바꿨더니, 독일에 있는 친구에게 바로 '반응'이 왔다. 가끔은 이런 공감의 반응 때문에 추억은 더 힘이 세지는 것도 같다. 이 노래를 부를 때의 아저씨는 지금의 내 나이보다도 한참 어렸다. 아, 이상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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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하 2007-01-22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해도 정답은 같을 것 같아요.^^;

엔리꼬 2007-01-22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토이 1집을 너무 좋아해서인지, 김장훈씨가 쎄게 부르는 것이 좀 어색하더라고요.. 그렇다고 싫다는 건 아니고요.. 그나저나 라디오스타에서 김장훈씨가 좀 악역(?)으로 나오셨던데, 아무도 하기 힘든 악역연기 참 용기가 대단합니다..

waits 2007-01-22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님, 음.... 짧은 한 문장이 너무나 심오하여...^^;;

서림님, 토이 1집 좋아하시는군요. '하나'스럽게 정겹고 예쁜 음반이었던 것 같아요. 아저씨와 유희열은, 음악적인 색깔보다 사람의 인연 덕에 묘한 조화가 나오는 게 아닐까 전 생각한답니다. 김장훈'씨'라고 호칭을 붙여주시니 괜히 제가 감사하네요. ㅎㅎ

푸하 2007-01-22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답은 아저씨는 항상 아저씨라는 말씀이에요.^^;

바라 2007-01-22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유희열을 닮았다는 얘길 들을 때가 있었는데;;(퍽) 근데 제가 스스로 볼 땐 잘 모르겠더라구요; 지금의 유희열은 아저씨지만 예전에 보셨을 땐 풋풋한 청년이었나 보네요 ㅎㅎ

waits 2007-01-23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님, 아하. 그 말씀이시군요. 제가 좀 천진한 마음이 되면 댓글의 의미를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을 듯...^^
(연락하려다 까먹었는데, 오늘 도서관 잘 부탁해요.^^)

바라님, 훌륭한 비쥬얼을 지니셨다고 해야할런지. 유희열에, 자진납세까지 하시는 걸 보니 겸허한 품성까지 지니신 모양이군요.^^ 무려 14년 전이니, 아주 풋풋하다못해 파릇파릇했던 것 같네요.
 

 

 

난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히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혹 때론 누군가가      
뜻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 때도
난 참아야 했죠 참을 수 있었죠
그날을 위해

늘 걱정하듯 말하죠 
헛된 꿈은 독이라고    
  
세상은 끝이 정해진 책처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고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나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날을 함께 해요

 

작사, 곡  이적 김동률

 

 

 큰 실감은 없지만 또 한해가 간다. 서른 셋,까지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넷,은 어쩐지 너무 무거운 느낌. 좀은 부담스럽다. 송년회니 신년회니 별로 챙기지는 않지만, 핑계 삼아 잊고 있던 사람들을 보는 것도 재미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 오늘은 대학원 동기들과의 송년회날이었다.

 2004년 입학했을 때 우리 과의 정원은 20명, 1년이 지나자 12명이 남았다. 공부와 인연이 없고 어떤 상황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존재로 행세하기도 하는 나는, 첫 학기부터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술자리를 벌이는 동기들로부터 뚝 떨어져 지냈다. 학교에 대해 품었던 높은 기대만큼 괜히 주눅이 들기도 했고, 소위 관계를 '만드는' 일이 내키지도 않아 늘 말없이 뒷자리에 앉아 수업을 듣고 조용히 사라지는 측이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동기들이 12명쯤으로 줄어든 3학기부터, 초반의 거품이 꺼지고 자연스레 사람들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수업을 끝내면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워 새벽 택시 귀가를 감수하며 동기들과 참 자주 놀았다. 30세 전후부터 45세까지 다양한 연령, 복지관 생활시설 공동육아 시민단체 종교재단 등 다양한 곳에 적을 둔 우리들의 3학기는 서로들 의아해할 만큼 즐겁고 정다웠다. 일터에서의 스트레스를 동기들과 얼굴 보고 이야기 나누는 것으로 해소하면서, 이 사람들이 아니면 어떻게 그 심란한 주경야독(?)의 날들을 버틸 수 있었을까 싶을 만큼.

 5학기가 지나고 세 사람은 졸업을 했고, 6학기를 마친 올 겨울에는 또 한 사람이 그리고 나머지는 프로포절을 통과했거나 여전히 일에 치여 손도 대지 못한 채로 학교로부터 멀어졌다. 그리고 오늘,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 인제에서, 포천에서, 인천에서... 모여든 동기들이 9명. 10시가 다 되어 이제 일이 끝났다며 전화를 건 내가 너무 예뻐하는 서른한 살의 바른생활 청년 형근샘도, 기꺼이 달려와 파장의 술자리에 합류했다. 늘 바쁘고 정신없이 일하는, 연말의 토요일도 지방 출장이 잡혀있는 그를 기어이 불러냈음에도 오랜만에 보니 너무 좋아서 미안하지도 않았다. 

 술자리가 끝나고 노래방, 안치환과 강산에의 노래를 곧잘 부르는 그가 3년 동안 세 곡이라는 타박에, 오늘은 새로운 노래를 불렀다. 패닉의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 그리고 바로 이 노래. 십 년 전 새파랗게 생동하던 시절의 꿈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일을 끝내고 허겁지겁 달려와 강의를 들었던 우리들의 풍경, 그때는 전혀 생각지 못했지만 이제 다시는 우리 모두 모여 그렇게 강의실에 앉아있을 일이 없겠구나... 생각하니 갑자기 너무 그리워져 눈물이 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계속 이렇게 만나자는 아이같은 약속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어디서 무얼하건 미더운 동기들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새삼 기쁜 날. 기분 좋아 마신 맥주 기운으로 노곤해진 팔다리도, 내게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있었구나 일깨워주는 반가운 흔적 같다. 함께 보낸 3년보다 더 많은 날들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 참 고마운 사람들. 오늘 나눈 바람처럼, 서로의 꿈을 오래도록 웃으며 지켜봐줄 수 있을까. 낯간지럽게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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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30 2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waits 2006-12-31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그렇게 빼는 거라기보다 그냥 제 성향이예요. 여전히 가끔 반복되지만 검증(?)되지 않은 관계의 소용돌이 속에서 '급체'했던 경험의 반대급부로 형성된 경향도 있는 것 같고요.
아무려나, 인사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님도 좋은 한해 되시길 바래요. ^^
 

 


 

우리 부모 병들어 누우신 지 삼 년에  
뒷산의 약초뿌리 모두 캐어 드렸지  
  
나 떠나면 누가 할까 병드신 부모 모실까
서울로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
     

아침이면 찾아와 울고 가던 까치야      
나 떠나도 찾아와서 우리 부모 위로하렴  
나 떠나면 누가 할까 늙으신 부모 모실까    
서울로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   
    

앞서가는 누렁아 왜 따라나서는 거냐      
돌아가 우리 부모 보살펴 드리렴  
나 떠나면 누가 할까 늙으신 부모 모실까
서울로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

좋은 약 구하여서 내 다시 올 때까지
집 앞의 느티나무 그 빛을 변치 마라   
  
나 떠나면 누가 할까 늙으신 부모 모실까
서울로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
 

 

작사,곡 김민기



노래가 안 나오면 http://blog.naver.com/likeamike/150012526693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내게, 서울은 욕망의 표상도 입신출세를 향한 돌파구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태어났고 사는 곳, 고향이라기보다 동네로 한정되는 나를 둘러싼 환경의 큰 이름이었다. 하지만 서울은 누군가에게, 줄줄이 딸린 동생들의 미래를 위해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는 농사에 매달리는 부모를 위해 좋건 싫건 입성해 살아내야 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우리 집에도 일곱 살까지 살림을 돌보며 나를 키워준 이른바 '식모' 언니가 있었다.

 2002년의 가을 혹은 겨울이었을 것이다. 마치 구전가요처럼 무의식 속에 침잠해 있던 노래가 낯선 얼굴의 이방인으로부터 들려온 것은. 브라운관 속, 방글라데시에서 온 삐뿌씨는 이 노래를 참 구성지게 잘도 불렀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없어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간다. 그리고 그 '서울'에서는 살 수가 없어 아우성을 친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조용한 선율에 실린 가사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수사일 뿐, 이따금 누군가의 삶에서는 차마 꿈도 꿀 수 없는 게 되어버린다. 

 오늘은 내가 일하는 단체의 송년회 날이었다. 11월 1일부터 이 곳에서, 나는 벌써 꽤 많은 이주노동자를 만났다. 그들의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한 계기는 93년 가을에 본 한 편의 연극이었지만, 이후에 '느낌표'를 통해 좀은 선정적으로 그리고 대상화와 타자화의 방식으로 강렬하게 각인된 탓에 나는 지금의 일을 오래 마음에 두고 마침내 선택했다. 미디어나 지면을 통해 전해진 그들의 현실은 온통 한국인으로서 도저히 외면할 수 없을 만큼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이었고, 어느새 그들은 내게 약하고 선하고 착한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로 내면화되어 버렸다. 봅시도 그들을 만나 친절을 베풀고 돕고 싶었지만, 내 사는 주변 어디에서도 나는 그들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부천의 도당동 그 중에서도 각국의 이주노동자들이 밀집해 살아가는 강남시장 인근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나는, 이제 수시로 그들을 만나고 때로 너무 많은 그들에 둘러싸인다. 물론 일방적인 대상화와 타자화를 통해 내면화된 이미지는, 온전하지도 건강하지도 않다. 오히려 그들을 향해 새로운 올가미를 둘러씌우는 것과 마찬가지이기도 하며, 한편 그들 모두가 '서울로 가는 길'을 부르던 삐뿌씨로 이미지화된 선량하고 약하고 눈물나는 존재는 아니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결국 사람의 일은 대체로 상호작용이며, 그야말로 사람 나름이라는 안이하고 뻔한 결론이 이미 내려져있는 것도 같다.

 송년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부천역에 내려 버스를 기다리다가 한 외국인을 마주쳤다. 시내버스 터미널을 배회하던 그는 어설픈 한국말로 행선지를 대며 버스번호를 물었다. 남부와 북부로 나뉘어진 부천역의 복잡한 버스 시스템은 외국인은 물론 내게도 꽤 헷갈리고 번거로운 것이다. 차마 혼자 그냥 보낼 수가 없어 전철 역사를 넘고 지하도를 건너가야 나오는 정류장을 일러주느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걸었다. 파키스탄에서 온 그는, 미처 예기치 못한 친절(?)을 만난 탓인지 눈을 빛내면서 좋은 사람이라며 커피, 시간, 돈 따위의 단어를 주워삼켰다.

 버스 타고 가려면 시간이 늦었다고 일축했음에도 그는 불쾌할 정도로 집요하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유앤미 어쩌고 폰 넘버 어쩌고 하는 덕에 순간 무척 곤혹스러워져서 냉랭하게 다시 거절을 했지만, 처음 부천에서 일하냐는 내 물음에 회사체인지 어쩌고 했던 말이 떠올라 명함을 주고서 커피 말고 문제가 있으면 연락하라고 쥐어줬다. 불과 십여 분, 처음보다 한결 냉정해진 나의 태도에도 아랑곳 없이 그는 명함을 꼭 쥐고 웃었다. 일러준 대로 버스 정류장을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서려니 어쩐지 금세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부천에 처음 와서 길거리에서 이주노동자들 마주치면 나는 항상 표정관리에 신경을 썼다. 워낙 드러운 인상이라 쉽지는 않지만 혹시 눈이라도 마주치면 가식적인 웃음이나마 보내려고 노력하며, 대다수 한국인들이 그들에게 보내는 차가운 시선을 만회해보려는 딴에는 유치한 안간힘이었다. 주제 넘고 웃기지만, 대체로 소외감과 고통에 시달릴 그들에게 눈빛으로나마 위로와 격려를 보내고 싶은 주접질이기도 했다. 언젠가 페이퍼 인터뷰를 위해 만난 버마분에게 우스개처럼 이야기했다가, 부천역 앞에서 그러면 외국인들이 만만하게 보고 오해한다며 그러지 말라는 말에 무안해졌을 따름이지만 말이다.

 일상적으로 만나기 힘든 친절 앞에서 커피 시간 돈 따위를 입에 올리며 연락처를 물어온 파키스탄 노동자에게 갑자기 냉랭해진 것은 어쩌면 문득 그 생각이 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에 온 지 1년이 되었다는 누가 봐도 눈에 띄는 이방인인 그에게, 나는 처음 만난 친절한 한국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역시 사무실에서 만나 사연을 알고 친해진 낯익은 이주노동자들과 다르지 않은 '서울로 떠나온' 사람일텐데, 나는 왜 그렇게 쓸데없이 냉정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한테 딴 마음을 품었을 리는 없건만, 괜히 미안하고 머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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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4 0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waits 2006-12-26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방어 본능이기도 하겠고, 또 어쩌면 제 쪽에서 일방적으로 재단한 건 아닐까 싶기도 했어요. 말씀대로 평범한 인간으로, 제가 보고 싶은 그림 속에 그들의 이미지를 구겨넣지 않아야 하는데... 노력해야 할 것 같구요.
양희은 아줌마는 미디어를 통해서 동세대의 페르소나를 알뜰하게 재현하고 있는 것도 같아요. 좀 부담스럽죠? ㅎㅎ

바람구두님, 오... 설마 그런가요? 그런 얘기, 인상 좋은 사람에게서도 듣고 싶어요.^^;;;

waits 2006-12-26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그렇게 되나요~ㅎㅎ 인상도 잊어버렸나봐요, 뵌 지가 하도 오래라. ^^;;

waits 2006-12-28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미안씩이나요. 저도 학교 거의 못 간답니다. 언젠가는 만나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