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를 확신하는자가 자신을 포기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그걸 패배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패배의 반대편에는 승리가있어야 했다. 하지만 회사는 승리라는 단어를 거머쥐기에 정당하지 못했다. 커커스가 바랐던 것은 노동의 대가였고, 회사가 쥐고 있던 것은 커커스의 목숨이었다. 정당한 전투가 아니었다. 무기가 달랐고, 걸어둔 것이 달랐다. 회사는 승리하지 않았다. 커커스는 패배한 게 아니라, 밟혔다.

증오에는 웃음이 필요해. 대상을 우습게 만드는것만큼 좋은 게 없어. 효과가 길지는 않아. 웃음 뒤에는 더 큰 증오가 오니까. 고작 그까짓 게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감전들이 비선형적으로 마구 번져나가. 주체가 안 돼.

사전 점검을더 철저하게 하고, 사고의 가능성이 제로가 되었을때 사람을 투입하면 그만인 일인 것을. 성급하게 성과를 내려고 사람을 가는 거야. 믹서에 넣어갈듯이, 사람도 재료로 같이 갈아버리는 거라고. 너의 안전을 미리 신경써주는 것보다 클론을 만들고 유지하는 비용이 이제 더 쉽고 싸서 그런 것뿐이라고.

우리는 그가 죽고 나서야그것들이 자신을 살리기 위한 발악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팀원들 모두가 안타까워했지만 그를 애도할 시간은 그가 남긴 업무로 채워졌고 우리는 빈자리에 새 주인이 들어올 때까지 힐끔힐끔 서로를 쳐다만 보다가 어느 순간 애도를 끝냈다.

‘나무는 복수하기 위해 자살한 거야, 인간들을 몰아낸 거지. 이 행성에서 자신들이 없으면 안 된다는걸 알았던 거야. 자신을 찾아오던 새와 다람쥐, 뱀, 그리고 나비와 벌이 더는 오지 않음에 분노를 느낀거야.‘
그 애가 악몽을 꾸지 않을 수만 있다면, 나무의치열한 복수극이었다고 해도 좋았다.
그래, 인간은 그렇게 지하로 쫓겨난 거야.

"감시 카메라가 꺼지면 지하 도시 전체에 비상 경고음이 울릴 수도 있어."
"아니."
마르코의 말에 의주가 자신 있게 받아친다.
"울리지 않아. 비상 경고음은 지하 도시에 혼란을 가져오니까."

"유별난 건 별로야."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의자가 나뒹굴지만 상관 않고 갑자기 목소리를 높인다.
"다 유별나게 억울하고 슬프면 도대체 일은 누가해? 언제 일을 하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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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계절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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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씨와 반희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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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계절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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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
나 어떻게든 그렇게 잔인해.
정원이 씩 웃으며 해보자는 건가, 했고 우리는 해보았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은 무엇으로든 살아.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강철은 어떻게든 단련돼.
너는 왜 연극이 하고 싶어?
나는 왜든 연극이 하고 싶어.
너는 어떤 소설을 쓸 거야?
나는 어떤 소설이든 쓸 거야.
정원과 나는 이런 대화법을 의젓한 사슴벌레식 문답이라고 부 르기로 했다. 뒤집힌 채 버둥거리며 빙빙 도는 구슬픈 사슴벌레의 모습은 살짝 괄호에 넣어두고 저 흐르는 강처럼 의연한 시슴벌레 의 말투만을 물려받기로 말이다.

나를 지키고 싶어서 그래. 관심도 간섭도 다 폭력 같아. 모욕 같고. 그런 것들에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고요하게 사는 게 내 목표야. 마지막 자존심이고. 죽기 전까지 그렇게 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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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힐이나 제모나 태닝은 그래도 이해가 가요. 하이힐을 신으면 다리가 길어 보이고, 제모를 하면 커팅 윤곽이 또렷해지고,
태닝을 하면 온몸이 탄탄해 보이고. 하지만 일부러 웃고, 쉴새없이 우아한 포즈를 취하고 큼지막한 액세서리를 달고, 가부키 배우처럼 짙은 화장을 하고, 그런 건 그러니까, 근육이랑은 상관없잖아요?"
아아, 마침내 나는 실토해버렸다. 그야말로 돈가스덮밥을 앞에 둔용의자가 범행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심경이었다. 단숨에자백을 마치고 죄인이 되는 동시에 반쯤은 이제 해방이구나 하는 감개무량한 기분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씨 때문인지위치 때문인지, T구의 밤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았다.
E토가 말한 ‘클래식‘의 의미를 이제 나는 완전히 이해한다. 여자는 심사 항목이 많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이 대회는 ‘클래식‘
한 것이다.
엄마, 지난번에는 미안했어. 하지만 엄마가 ‘여자답지 못하다‘고 평가한 보디빌딩이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 이 대회는 세상과 동등하게, 오히려 그 이상으로 젠더를 의식하게 하는 자리다.
‘여자다움‘을 추구하라고 이렇게까지 요구하는 자리를 나는 달리 떠올릴 수 없다. 사람들은 보디빌딩을 ‘맨몸 하나로 싸우는대회라 간주하고, 그 순수성을 칭송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칭찬에 머쓱해지고 만다.

팔굽혀펴기를 하는 동안 내 마음속에서는 기묘한 감개가 싹텄다. 다행감多幸感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내가 행복하다고 느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신체를 단련할 수 있다는 것.
그럴 만한 시간, 돈, 환경, 평화, 건강한 몸이 내 손안에 있다는것. 다시 말해 더할 나위 없이 자유롭다는 것. 이 순간이 영원히이어지기만 한다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 그전에도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는 중에 이런 감정이 솟구친 적이 몇 번 있었다. 갑작스러운 깨달음, 하늘에서 내려온 계시처럼, 지금 이 상황을 그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대 뒤에서 혼자 묵묵히 팔굽혀펴기에 전념하는 것.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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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도 그만 안 살아도 그만인 사람에게 무엇이 아름답게 보일까. 살아도 그만 안 살아도 그만인 사람에게 무엇이 맛이 있을까. 살아도 그만 안 살아도 그만인 사람에게무엇이 꼭 필요할까. 아름다운 것도 맛있는 것도 필요한것도 나는 없었다.

고통은 어째서 저절로 물러나지 않을까. 이렇게 애를 써야만 저만치 물러서서 나로부터 작별을 고하는 걸까. 힘든 일들이 끝나면 그걸로 끝이면 안 되는 거야? 꼭 그것과 내가 분리될 수 있도록 어떤 수고로움이든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인간은 참 이상하기도 하다. 이렇게 복잡하게 지어진 생물이라니. 나는 불평을 하면서도 닌빈에 두고 온 나의 과거에 또 찔끔 눈물이 났다.

불행한 사람에게 희망은 없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불행이 그저 있는 것처럼 희망도 그저 있다. 그저 있으면서사람에게 이래라저래라 한다.
나는 그렇게 수 년을 살았다. 한번 태어난 이상 계속해서살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하기에이르렀고 사람은 언제든 자신이 원하는 때에 죽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언제든 죽으면 된다고그러면 다 끝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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