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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 ㅣ 고찬찬(고전 찬찬히 읽기) 시리즈 1
고미숙 지음 / 작은길 / 2016년 6월
평점 :
박지원 선생님께 반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헤아리는 감상과 날카로운 촉으로 깊이 파고드는 예민함으로 무장하였지만 자신의 중심은 잃지 않는 기개라니요!!! 이렇게 듬직한 선생님이 계신다면 따르지 않을 수 없지요.
요즘의 여행기는 우선 사진을 찍으러 가는 것이 목적인데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빤히 아는 상태에서 그 존재를 확인하러 가는 것 뿐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박지원선생의 여행기는 진정한 미지의 나라를 찾아서 새로운 것을 보고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자신의 뜻으로 해석하기도 하며 나에게 이로운 것으로 취한다는 학문이었습니다. 물론 시대가 그러하니 당시와 지금의 여행기는 다를 수 밖에 없겠으나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고 느끼는 것이 진정한 여행임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만…우선 코로나가 끝나야 어떻게든 느껴보지 않겠습니까??
쓸쓸히 혼자서 한 잔을 부어 마셨다. 동쪽을 바라보니 의주철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첩첩 구름 속에 들어 있다. 술 한잔을 가득 부어 누각의 첫째 기둥에 뿌렸다. 잘 다녀올것을 스스로 빌었다. 또 한 잔을 부어 둘째 기둥에 뿌렸다. 이번엔 장복이와 창대를 위하여 빌었다. 술병을 흔들어보니 아직도 몇 잔 더 남았다. "창대야, 남은 술을 땅에다 뿌리려무나." "네?" "말을 위해 빌어 주자꾸나."
당파나 정쟁에 얼룩진 정국에 입문하기도 싫었지만, 그가진정 견디기 어려웠던 건 과거제도의 타락상이었다. 과거를 치를 때마다 응시자가 수만 명이나 되는데, 그러다보니 시험장은 서로 부르고 짓밟고 하느라 졸지에아수라장이 되곤 했다. 거기다 백이면 백, 천이면 천, 판에박은 듯 똑같이 써내는 과문科文(과거시험의 여러 가지문체)의 격식도 그에게는 실로 끔찍했다.
만약 수색 중에 금물이 발견되면? 첫 번째 깃발에서 걸리면큰 곤장으로 매질을 하고 물건은 몰수, 두 번째 깃발에서걸리면 귀양, 마지막 깃발에서 걸리면 목을 벤다.
득룡은 가산嘉山 출신이다. 열네 살부터 북경에 드나들기시작해서 이번이 자그마치 서른 번째라고 한다. 중국말은물론 현지 사정에 빠삭하여 크건 작건 간에 우리 일행의일은 모두 득룡이 아니면 감당할 인물이 없다. 사행이 있을때마다 미리 가산으로 공문을 보내 그의 식구들을감금토록 한다. 그가 중국으로 도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인질로 잡아 두는 것이다. 이것만 봐도 가히 그의 재간을짐작할 만하다.
주변의 진열 상태를 둘러보니 모든 것이 단정하게정리되어 있다. 한 가지도 구차스럽게 대충 해놓은 법이없고, 물건 하나도 너저분하게 늘어놓은 것이 없다. 심지어소외양간이나 돼지우리까지 모두 법도 있게 깔끔하다. 땔감 쌓아 놓은 것이나 두엄더미까지도 그림처럼 곱다. 아! 이렇게 한 뒤에야 비로소 이용利用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이용‘이 있은 뒤에야 후생厚生이 될 것이요, 후생이 된뒤에야 정덕正德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 쓰임을이롭게(이용)‘ 할 수 없는데도 ‘삶을 도탑게(후생)‘ 할 수있는 건 세상에 드물다. 그리고 생활이 넉넉지 못하면 어찌 ‘덕을 바르게(정덕)‘ 할 수 있겠는가.
"수레를 만들 때는 무엇보다도 궤도를 똑같이 해야 한다. 이른바 궤도를 똑같이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굴대의거리는 양쪽 바퀴 사이를 말한다. 이 양쪽 바퀴 사이에정해진 거리만 어기지 않으면, 수레 만 대가 지나가도 그바킷자국은 하나로 이어질 것이다. 수레의 궤도를 똑같이한다(거동궤車同軌)‘란 말이 바로 이것이다. 만일 양쪽바퀴 사이를 제멋대로 넓히거나 좁힌다면 길에 난바뒷자국이 어찌 한 궤도를 그릴 수 있겠는가."
"뜻을 얻은 곳에는 두 번 가지 않는 법! 만족함을 알면위태롭지 않다네."
밤에 조금 취하여 깜빡 잠이 들었다. 나는 홀연 심양성안에 있었다. 궁궐과 성지城池, 민가와 저잣거리 등이번화하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이렇게 장관일 줄이야. 집에 돌아가서 자랑해야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훌훌 허공을 날아갔다.
"멋진 울음터로구나. 크게 한번 울어 볼 만하도다!" 옆에 있던 정 진사가 물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시야가 이렇게 훤하게 터진 곳을만나서 별안간 통곡을 생각하시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그렇지, 그렇고말고, 아니지, 아니고말고, 천고의 영웅은잘 울었고, 미인은 눈물이 많았네. 그러나 그들은 몇 줄기소리 없는 눈물을 옷깃에 떨굴 정도로만 흘렸기에, 소리가천지에 가득 차서 쇠나 돌에서 나오는 듯한 울음은 들어본적이 없단 말이야. 사람들은 다만 희로애락애오욕 칠정七情 가운데서 오직 슬플 때만 우는 줄로 알 뿐, 칠정 모두가울 수 있다는 건 모르지. 기쁨(희喜)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노여움(노怒)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슬픔(애)이사무쳐도 울게 되고, 즐거움(락樂)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사랑함(애愛)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미움(오惡)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욕심(욕欲)이 사무쳐도 울게 되는 것이야.
왠 줄 아는가? 근심으로 답답한 걸 풀어 버리는 데에는소리보다 더 효과가 빠른 게 없거든. 울음이란 천지간에있어서 우레와도 같은 것일세. 지극한 정이 발현되어나오는 것이 절로 이치에 딱 맞는다면 울음이나 웃음이나무에 다르겠는가? 사람의 감정이 오히려 이러한 극치를겪지 못한 탓으로 교묘하게 칠정을 늘어놓으면서 슬픔에다. 울음을 배치한 것일세. 이 때문에 상을 당하면 처음에는‘애고‘, ‘어이‘ 따위의 소리를 억지로 울부짖는 거지. 그러면서도 참된 칠정에서 우러나오는 지극하고도 진실된소리는 참고 억누르다 보니, 저 천지 사이에 서리고 엉기어감히 펼치지 못한단 말일세. 일찍이 가의賈誼(한나라 때정치가)는 한바탕 울어 젖힐 곳을 얻지 못하고 결국 참다참다 별안간 선실宣室(한나라 문제가 가의에게 귀신에대해 질문을 한 곳)을 향하여 한마디 길게 울부짖었다네. 그러니 듣는 사람들이 어찌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지않았겠는가?"
훗날 1809년 연행을 다녀온 추사 김정희는 연암의 ‘호곡장론‘에 대한 시 한 수를 남겼다.
요야(遼野) 천추의 커다란 울음터라니千秋大哭場 재미난 그 비유 신묘도 해라戱仍妙詮 갓 태어난 핏덩이 어린아이가譬之初生兒 세상 나와 우는 것에 비유했다네出世而啼先
"그건 갓난아기에게 물어봐야 될 거네. 그 애가 처음태어났을 때 느낀 것이 무슨 정인지. 그 애는 먼저 해와달을 보고, 다음으로는 눈앞에 가득한 부모와 친척들을보니 기쁘지 않을 리 없지. 이 같은 기쁨이 늙을 때까지변함이 없다면, 본래 슬퍼하고 노여워할 이치가 전혀 없이즐겁게 웃기만 해야 마땅한 것 아니겠나. 그런데 도리어분노하고 한스러워하는 감정이 가슴속에 가득하여 끝없이울부짖기만 하지 않나.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 삶이란 성인이든 우매한 백성이든 누구나 죽게 마련이고, 또 살아가는 동안에도 온갖 근심 걱정을 두루 겪어야 하기때문에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여 먼저 스스로 울음을터뜨려서 자기 자신을 조문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갓난아기의 본래 정이란 결코 그런 것이 아니야.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에는 캄캄하고 막혀서 갑갑하게지내다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탁 트이고 훤한 곳으로나와서 손도 펴 보고 발도 펴 보니 마음이 시원했겠지. 어찌 참된 소리를 내어 자기 마음을 한번 펼치지 않을 슈있겠는가. 그러니 우리는 저 갓난아기의 꾸밈없는 소리를 본받아서, 비로봉(금강산의 최고봉) 꼭대기에 올라가동해를 바라보면서 한바탕 울어 볼 만하고, 장연의금모래밭(예부터 황해도 장면에 있는 몽금포의금사낙조金沙落照가 유명함)을 거닐면서 한바탕 울어 볼만하이.
"요동벌판은 평평하고 넓기 때문에 강물이 절대 성난소리로 울지 않아". 모르는 소리! 요하遼河는 울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다만밤에 건너지 않았을 뿐이다. 낮에는 강물을 볼 수 있어벌벌 떠느라 눈이 있다는 걸 근심으로 여긴다. 그러니 어찌귀에 들리는 게 있겠는가. 지금 나는 한밤중에 강을건너느라 눈으로 위험한 것을 볼 수 없다. 그러니 위험은오로지 듣는 것에만 쏠리고, 그 바람에 귀는 두려워 떨며근심을 이기지 못한다. 내 이제야 도를 알았도다! 명심冥心(깊고 지극한 마음)이있는 사람은 귀와 눈이 마음의 누累가 되지 않고, 귀와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잔달아져서 갈수록병이 된다. 지금 내 마부가 말에 밟혀서 뒷 수레에 실려온다. 그래서 결국 말의 재갈을 풀어 주고 강물에 떠서무릎을 구부려 안장 위에 발을 올리곤 옹송거리고 앉았다. 한번 떨어지면 강물이다. 그땐 물을 땅이라 생각하고, 물을옷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몸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마음이라 생각하리라. 그렇게 한번 떨어질 각오를 하자마침내 내 귀에는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번이나 강을 건넜건만 아무 근심 없이 궤석几席(안석과돗자리)에서 앉았다 누웠다 하며 생활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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