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들판 -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마거릿 주혜 리 지음, 장상미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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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탄 항공편은 급유를 위해 도쿄 하네다 공항을경유했다. 그런데 다른 탑승객이 모두 내리는데도 할머니는 좌석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청소하는 직원들은 빳빳한 한복을입은 채 굳은 얼굴로 앉아 있는 여성 주변을 둘러가며 일해야했다.
나중에 할머니는 아들 부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찌 일본 땅에 발을 딛겠니."

"서울에서 살면서 재봉 가게를 여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네가 아파서 일을 못 하니 가게를 열 형편이 안 되는구나.
네 이모나 나나 둘 다 남편이 없으니 그 일을 꼭 같이하고 싶었•는데, 그럴 운명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저주받은 게지. 네아비였던 그 남자에게 말이야. 내 인생을 망쳐놨어. 너도 알다시피, 집안을 건사하는 일도 나한테 떠맡기고 너희도 나 혼자키우게 했잖니."
할머니는 아들의 눈을 피하며 계속 말을 잇는다.
"왜 하필 지금 병이 났다니. 네가 새 재봉틀을 사줬고 가게자리도 계약하려던 참인데. 네 아버지가 감옥에 들어가고 서울에 처음 가본 뒤로 서울 사는 게 내 꿈이었다. 너와 네 동생 모두 서울에서 학교 다닐 수 있도록 전쟁 터지기 직전에 돌아가려고 했어. 네 아버지가 내 인생을 망치더니 이제는 네가 망치는구나. 너도 결핵을 못 이기고 날 떠날 테지."
은설이 답하기 전에 저녁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뭐라 답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어머니가 이렇게까지 괴로워하며 무너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자신에게, 또 한 번도 본적 없는 아버지에게 이토록 분노하는 모습을.
할머니가 아들에게 말한다. "가야 할 시간이구나."

아직 공주에 있을 적에 내가 네 할아버지 더러 왜 감옥에있을 때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안 하냐고 물었어. 그랬더니이러더구나. "그 괴로운 일을 내가 왜 이야기하고 싶겠소?"

나는 너희가 알았으면 해. 너희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 될지는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 연결고리는 너희 증조할아버지의 이상주의와 증조할머니의 투지와 생존 의지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과 애정에서, 어머니의 탐구와 아버지의 헌신에서 비롯했다는 것을.
너희에게 우리가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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