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은 흐른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0
이미륵 지음, 안삼환 옮김 / 민음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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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어머니는 장차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한 채 늙어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큰 걱정 속에서 살고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원을 대신 빌어 주는 그 여인이우리 집에 와서 부처님의 한 제자인 미륵불께 49일간의 큰 불공을 드렸다. 나중에 나는 미륵불의 이름을 따서 미륵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제 나는 아주 자랑스럽게 세 번째 잔을 비웠다. 나는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아주 현명하시고 그렇게도 이야기를 잘하실 줄 아는 아버지의 친구일 수 있었다. "아, 아빠, 아니, 아버지! 난 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다. 시인에게는 술이 없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아신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정말 그렇단다!"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는데, 어머니는 두눈을 지긋이 껌뻑이시면서 옆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나는 어머니가 그때 나를 기특하게 생각하는 것인지, 혹은 나를 비웃고 계시는지 잘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건 내게는 아무래도,정말 아무래도 전혀 상관없었다. 달은 아주 밝게 비치고 있었고, 복숭아들은 향기를 내뿜고 있었으며, 나는 술잔 앞에 앉아 내 아버지의 친구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다시 한번 보시지도 않은 채 이미 가 버리고안 계셨다. 교장실에는 더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나를 내 운명에 맡기신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지금은 나쁜 시대가 왔다고 한다. 그럴 때 넌 말해라, 나쁜 시대가 아니라. 그것은 지금 막 시작한 새 시대일 뿐이라고. 눈이 많이 내린 긴 겨울 뒤에 찾아오는 봄과 비슷하다고. 진달래가 피고 빼꾹새가 울지. 그렇게 나는 우리의 시대를 느끼는 거야."

"다른 시대가 도래한 거야."라고 내가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가 어두운 잠을 자고 나니 더 밝은 시대가 온 거지. 새로운바람이 잠자던 우리를 깨웠어. 긴 겨울이 지나고 지금은 봄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말하고 있어."

우리는 만족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날 저녁을 아름다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작은 민족이고 다만 작은 나라라는 것은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지혜로운 민족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조상들이 현명했기 때문에, 크고 장대한 중국은 한때 우리나라를 ‘소중화(小中華)‘라고 칭했다. 그리고 우리 말고 누가 일본에게 문자와 철학, 종교와 건축술 등 온갖 것들을 전해 주었던가! 새로운 문화를 수입하는 데에는 우리가 일본보다 약간 늦었다, 그러나그건 우리한테 대수로운 일이 못 된다. 목사 자신이 말했듯이,
우리는 정말 현명한 민족이다. 이런 사실이 내게는 매우 고무적으로 느껴졌다.
그날 저녁은 내게 정말 아름다웠다.

"미륵!" 하고 그가 한번은 말했다. "넌 정말 서울로 가서 대학에 다녀야겠니?"
"응, 입학시험에 합격하면, 난 그렇게 할 거야."
• "네가 여기 살면서 우리 둘이 늘 이렇게 함께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면, 정말 아름답지 않겠어? 너는 공부할 필요도, 걱정할 필요도 없고, 다만 한 행복한 인간이 사는 것처럼 그렇게 살기만 하면 된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넌 친구들을 오게할 수 있고, 그들과 하늘에 대해, 땅에 대해, 이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 한담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넌 산중에 조그만 오막살이를 짓고 산여울의 조잘거림에 귀를 기울일 수 있고, 흘러가는 구름들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네 어머니께서 행복해하실 것이고, 너도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며, 난 언제나 네 곁에 머물 수 있을 것이다."
"아니야, 난 대학에 가야 해."
"넌 참 이상하구나." 라고 그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우리는 마지막 저녁을 시내를 거닐며 보내기로 결정했는데,
지금까지 우리는 그런 시도를 거의 해 보지 않았다. 우리는동쪽 궁궐인 창덕궁의 길고 이끼가 낀 긴 담장을 따라 어떤곳은 오르막이고 어떤 곳은 내리막인 조용한 옛길을 걸었다.
이 궁궐 담 뒤에는 시종들과 궁녀들을 합하면 아직 수백 명의인원에 달할 옛 왕가의 후손들이 갇혀 살고 있을 텐데도 항상조용했다. 내가 이 곁을 지나갈 때마다 내 발걸음은 보다 망설이면서 보다 조심스러워지곤 했다. 나는 아마도 그 고귀한 가문의 목소리라도 듣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건 허사였다. 아무런 외침도, 그 어떤 대화나 그 어떤 발자국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자랑스러운 오백 년 왕조의 후손들은 아주 조용해져 있었다.

남쪽에서는, 일본인들이 사는 새 구역에서는 아직도 수많은 빛이 번쩍이고 있었으며, 북쪽에서는 옛 조선이 어두움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삼각산 위에서는 흑단처럼 새까만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옛 창덕궁은 과거 속으로 침묵해 들어가고 있었다.

는 길까지 나를 배웅해 주셨다. "너는 용기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어머니는, 우리 둘이 줄곧 침묵을 지키며 걸어온뒤에, 말씀하셨다. "자주 겁을 먹기도 했지. 하지만, 넌 네 갈길을 한 번도 빗나가지 않았어. 나는 너를 깊이 신뢰한다. 부디 용기를 내렴! 너는 어렵잖게 국경을 넘어갈 게다. 그리고,
마침내 너는 유럽으로도 가게 될 것이다. 이 어미 걱정은 하지말아라! 난 네가 다시 여기 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릴 것이다.
세월은 정말 아주 빨리 지나간단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보지•못한다 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 넌 내 인생에서 내게 많은, 대단히 많은 기쁨을 선사해 주었다. 자, 내 아들, 이제 혼자 계속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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