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읽어 기억이 흐릿하지만 김초엽, 김원영 작가님의 ‘사이보그가 되다’에서 ’다리응 못써서 휠체어를 타거나 귀가 들리지 않아서 보청기나 인공와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사이보그라 할 수 있을까?‘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두 분의 작가님을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였으나 그 두분을 ‘인간‘이 아니라 할 수는 없겠지요.
얼마전에 읽은 ‘영원히 계속되다가 끝이 난다’에서는 좀비가 머리를 두고 몸이 바다로 떠나며 끝이 납니다. 그럼 그 좀비는 죽은걸가요? 살아 있는 걸까요? 머리가 물속으로 들어갔으면 죽었다 생각될텐데 말입니다.
신체의 어느 부분이 기계나 건전지로 작동된다 해도 그들은 분명 인간이지만 ‘기계뇌‘를 가진 인간(?)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인지에 대한 긴 글을 읽고 나니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선 이런 내용을 논문도 사회과학서도 아닌 소설로 쓰시는 김초엽작가님께 경의를…)
사람의 마음과 영혼은 분명 보이지 않는데 우리는 그것들을 말할 때 종종 가슴과 머리를 가르키게 됩니다. 그 가슴과 머리에 기계적인 장치가 있어도 변함이 없는 걸까요? 이러한 논쟁은 앞으로 더욱 많아지겠지만 ’시간과 물질에 붙들린‘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역시나 마음과 영혼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그 순간, 솔민의 머릿속을 잠시 파고든 생각이 있긴 했다.
어떤 사람에게 팔이 없거나 다리가 없거나 심지어 일부 내장이없어도 그 사람은 여전히 인간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뇌가 없다면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사람은 살아 있는 인간으로 받아들여지기어렵다. 그러니 가상의 대결장에 한쪽은 뇌만 온전하게 남기고 나머지 몸을 전부 기계로 교체한 사이보그가, 다른 한쪽은 인간의 몸에 기계 뇌를 붙인 사이보그가 오른다면, 적어도 인간으로서의 성원권을 두고 맞붙을 때는 전자가 훨씬 유리할 것이다. 어쩌면 압도적으로 이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레의 경우는...... 굳이 따지자면 약간 불리하다.
‘철학적 좀비‘라는 사고실험이 있다. 만약 내면적 경험이 전혀없는 존재가 있는데, 겉으로는 완전히 사람처럼 행동하고 자극에도 똑같이 반응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설령 그 안이 정말로 텅비어 있다고 해도 외부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그것이 좀비 난제였다. 자아는 오직 주관적 시점에서 경험되는 현상이고, 외부에서 그것을 검증하려는 시도는 결국 모두 간접적일뿐이다.

-그러면 너희는 재현될 수 있고, 영원한 거야?
-이론적으로는. 그렇지만 더 중요한 건 우리에게 그게 별 의미가 없다는 거야. 백 년 뒤에 우리가 똑같은 가중치 벡터를 지닌채 다른 하드웨어에서 깨어난다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겠지. 다만우린 그걸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야. 그냥 잠시 멈췄다 깨어난 것뿐이니까. 넌 그런 방식으로 할 수 없지. 백 년을 건너뛸 수 없어. 너는 백 년을 통과하기 위해 백 년을 견뎌야 해. 잠들어 있다고 해도, 그동안 너는 물에 잠겨 있고 너를 이루는 분자들은 끊임없이 움직일 테니, 그 시간은 널 돌려놓을 수 없게 바꾸생각이 당신을 어지럽힌다. 그들은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했다. 당신은 당신을 이루는 물질과분리될 수 없다. 재현될 수 없고 복제될 수 없으며 시간을 건너뛸수도 없다. 바로 그 할 수 없음이 당신을 다르게 만든다. 당신은 물질과 시간에 붙들린 존재다. 명문가 하당신은 그 제약이 왜 마음을 만들어내는지 모른다. 이 비좁은수조와 웨트웨어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어째서 당신에게 느낌과마음을 부여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순간 당신은, 그 거대한 미지 앞에서도 당신에게 설명할 수 없는 형태의 마음이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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