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쓰는 것. 그 거부된 자의 쓰기가 시이기 때문이다. 소설이픽션만이 아니듯, 시는 암시만이 아니다. 시는 평론가와 숨바꼭질하는 장르가 아니다. 시는 목소리다. 아직 언어화되어본 적 없는 것,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을 보이고, 들리게 하는 목소리다. 이 목소리 속에서 의미는 증발하고 없다. 목소리는 언어를 습득하지 못한 사람처럼 개념이 형성되기 이전이다. 이 시가 도대체 무슨 의미인 거야? 네 이데올로기가 뭐야? 네 정체성이 뭐야? 하는 독자를 더욱 교란하려고 시는써진다. 시에서는 시 언어가 그 사물의 속성을 지칭하지 않는다. 사물은 한 언어로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사물도 메아리로 말하고, 시인도 메아리로 말한다. 두 메아리가 만나섞여든 목소리가 시의 언어다. 사물이 이식되어 확장된 몸으로서의 시인의 몸. 그러나 시는 한 인간의 인지능력으로 사물 하나를 다 헤아릴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물 하나에 귀를 기울여보라. 그 사물은 다성악처럼 여러 층위의 목소리를낸다. 그래서 시는 일종의 무언의 대화이고, 다수가 웅얼거리고, 중얼거리고, 요동하는 일종의 소음이다. 이럴 때 시인은 분열적이고, 비합리적이고, 정동으로밖에는 그 ‘목소리‘를 견디어낼 수 없다.
정상과 비정상,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자세를 발견하는 것. 내 몸을 내가 시간 속에서 파괴해보고, 넘어지게 하는 것. 나는 이것이춤하기와 시하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정상적이라고 명명된 언어 사용에 대해 다른 기준을 적용해보는 작용이 문학언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무엇보다 문학은 차별의 시선에 대한 심한 딸꾹질일 것이다. 정말 세상에 ‘정상‘이니 ‘순결‘이니 하는 것들이 있기는 한 걸까? 단어는 있는데 실제로는 없는 것들에 시달릴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예술은 이런 것을 허용하고 있다. 이런 기괴한 생명체, 돌연변이를 허용하고 있다. 광기와 광기가 만나 세상을 기형으로 만드는 것을보여주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인간이 개입한 진화의 실상을발가벗기도록 허용하고 있다. 고발하고 있다. 고통하고 있다. 우리의 기형을 증거하고 있다. 이렇게 기형으로 우리가,우리 아닌 것들과 함께 살아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이제 이렇게 되었다며 복합 생물종인 우리 몸을 선보이고 있다. 이렇게 기형인 우리가 모여서 하나의 몸을 이루었다고 증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