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없이 많른 저주 중에 그나마 탈모의 저주에 걸렸다면 축복받은 인간에 속하는 거 아닌가. 말하자면 자신은 저주받은 사람 중에 가장 축복받은사람이었다. 소소한 저주를 받음으로써 어쩌면 커다란 저주를 피하게 된 건지도 몰랐다. 우식은 이렇게 탈모나 걱정하면서 근근이 살아가고 싶었다. 남은 생에 더 바라는 것도,기대하는 것도 없었다. 그저 이대로 ‘간신히‘와 ‘겨우‘라는단어에 비비적대며 ‘근근함‘을 벗 삼아 죽을 때까지 질척대며 살고 싶었다.
"그러지 마." "뭘요?" "그게 뭐든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지는 마."
수많은 루머와 악플에 시달리는 동안에도 마태공은 천국 사과 투어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왜 아무도 반기지 않는 사과, 실제로는 무해하지만 어떤 면에선 유해하기도 한사과를 반복하는 걸까. 대중을 향해 분명한 사유도 밝히지않고 반복해서 사과하는 행위가 과연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혹은 무엇을 바꾸지 않을 수 있는지 우식은 알 수 없었다. 마태공 본인도 모르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마태공자신이라도 바꿀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걸까. 하지만 무엇을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진심으로, 마태공은 저런 궁색한 보여주기식 사과를 통해 모든 죄가 사해지고 순결한 영혼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순진하게 믿는 걸까? 그런데 모든 사과는 기본적으로 보여주는 사과가 아닌가? 보여주지않는 사과가 무슨 의미가 있나? 드러내고 보여주지 않는반성이?
그리고 우식은 알게 되었다. 마태공이 그것들을 일부러 지우지 않았으며 딸을 가정 폭력의 피해자 위치에 놓은루머는 애초에 마태공이 의도적으로 퍼뜨린 거짓 정보라는걸. 악행을 한 가해자에게 불행의 서사를 입혀 연민을 자아내는 것, 그것이 딸을 보호하기 위해 마태공이 선택한, 부모로서 행한 그만의 정의였다.
동시에 이토록 사건 사고가 만연한 세상에 살면서, 언제 예기치 못한 재난이 덮쳐 일상이 파괴되거나 진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왜 지금을 사는 대신 미래를 대비해 지금을 단지 준비의 시간으로 보내야 하는지 기준은 납득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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