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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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열세 살 때였던가, 아빠와 짜장면을 먹다 말고 왜 봄만 되면 그렇게 머리를 빡빡 미는지 물은 적이 있었다. "음, 그건..
공장 사람들하고 아빠 마음이 같다는 것을 사장한테 보여주려고 그래." 아빠는 잠깐 고민하더니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래야다 비슷해 보이거든. 그러면 파업 끝나고 나서도 함부로 못해."

할머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골목에서 또다른 강아지들이달려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다 이시봉과 닮은 후에스카르 비숑프리제였다. 목장을 막 벗어난 흰 양떼처럼 골목에 빽빽하게 들어선 이시봉들...... 아아, 얘네들은 후에스카르 비숑 프리제가아니었구나! 얘네들은 그냥 왕곡면 비숑 프리제였구나! 나는 그많은 강아지들 중에서 이시봉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지만 이내그만두었다. 모두 다 이시봉이었고, 모두 다 강아지들일 뿐이었다. 나는 그게 보기 좋았고, 마음이 놓였다.

이건 어쩔 수 없이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알면서도 속는 일, 그게 사랑의 일이니까.

강아지들은 가장 먼저 바닥으로 떨어지고, 가장 먼저 짓밟힌다. 그게 바로 인간이개들과 맺고 있는 관계의 본질이다. 본질은 늘 뜻하지 않은 사건과 사고 속에서 드러나는 법. 개들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희생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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