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문학의 쓸모 - 21세기 프랑스 대표적 지성의 문학을 대하는 현대적 방식
앙투안 콩파뇽 지음, 김병욱 옮김 / 뮤진트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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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독서에 투자해서 어떤 수익, 어떤 보상을 기대할 수 있는가?

작가는 본질상 독자이며, 책은 다른 책들과 독서를 통해 만들어진다

나는 작가란 뭔가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미적 감동만 일깨워줄 게 아니란 겁니다. 그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요. 아니,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되긴 하죠. 소파에 앉아, 이를테면 프루스트의 책을 펼쳐 들고서 말입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프루스트를 좋아합니다. 아름답죠, 한데 그게 지금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요? 없어요, 프루스트는 내가 길 건너가는 걸 도와주지 않아요. 오늘날의 작가는 여러분이 길 건너가는 걸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길을 건너간다는 것, 그 말의 의미는 당신이 어떤 작가의 책을 읽은 후에는, 길을 건너갈 때, 프루스트만 읽는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건너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먹고 자기만 하는 게 아니라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더는 생리적 욕구에 부응하는 것이라 할 수 없는 일들을 그리고, 빚고, 바라보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원시인’(우리가 흔히 그렇게 부르는)은 어디에나 늘 있었다.

정신적 경제와 별개로, 예술의 신체적 경제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예술은 따분함에 대한 신체의 반응이니 말이다.

프루스트가 지적한 것은, 자아실현은 사교계의 삶이 아니라 문학으로, 문학 덕택에, 문학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작가만이 아니라 독자, 문학에 사로잡혀 다른 세계로 옮겨가는 독자에게도 마찬가지다. 프루스트는 문학이라는 현대(혹은 반현대)종교를, 어쩌면 문학의 신성화를 설파한 대사제였고, 혹자는 그것이 지나치다고 판단하게 된다.
하지만 프루스트는 이렇게 말을 잇는다. "우리는 오직 예술을 통해서만이 우리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우리와는 다른 세계의 다른 누군가가 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세계의 풍경은 우리에겐 달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처럼 생소한 것일 수도 있다.

그가 말하는 건 분명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타자의 눈으로 세계를 보는 것, 타자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길을 건너가서, 엠마누엘 마크롱이 말하듯 일자리만 찾는 게 아니라, 엠마누엘 레비나스가 말하듯 타자의 얼굴을 만나는 것), 그리하여 타자를 알고, 타자에 이르고, 타자를 이해하는 것이다. 문학은 타자他者를 인식하는 수단이자, 여기 이 세상, 이 세계, 진부하고 보잘것없는 하루하루의 삶을 인식하는 수단으로서, 잘난 체하는 독아론이나 상아탑의 엘리트주의, 예술의 신비주의와 대조된다.

학생들은 소비자로서 우리 학교에 들어와 제품이 되어 학교를 떠납니다

이탈로 칼비노는 이렇게 썼다.

 문학이 탐구하고 가르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는 않으나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들이다. 말하자면, 가까운 이웃과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 크고 작은 사물들에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 삶의 균형을, 삶에서 사랑의 자리라든가, 그 힘과 리듬을, 또한 죽음의 자리를 찾는 그 방식, 그밖에 다른 일들, 냉혹함, 연민, 슬픔, 아이러니, 유머 등, 필요하지만 어려운 일들을 생각하거나 생각하지 않는 그 방식 등.

차별성을 하나의 상속된 특권에 불과한 것으로 볼지, 아니면 독서라든가 모든 형태의 학식, 즉 뛰어난 작품들과의 접촉을 통해 기를 수 있는 ‘충분한 문학적 소양’으로 볼지 말이다.

문화(문학과 철학뿐만 아니라 예술, 영화 및 오늘날 스크린용으로 만들어지는 많은 것들)는 지금 하는 일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게 하고, 일하는 자신을 관찰할 수 있게 하고, 거리에 있음과 동시에 창문에 있을 수 있게 하고, 자신의 사는 모습을 보고, 삶의 흐름을 바꿀 수 있게 한다. 그래서 그것은 자신이 받은 원래 교육의 한계를 넘어, 길을 바꾸고, 다른 직업 쪽으로 나아가, 새로운 기회(지금부터 우리가 ‘호기好機’라고 부르는)를 잡는 데 꼭 필요하다.

일반 문화가 우리에게 주는 것, 그것은 다른 지능이다. 말하자면 영리한 개나 여우에게서 볼 수 있는 통찰력이나 침투력, 직감 같은 것이다. 직감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무엇보다 여러 가지 다른 경험을 접할 수 있게 해주는 독서를 통해 길러진다. 문화는 우리에게 코를 준다. 난관을 헤쳐나가고 궁지를 벗어나는 데에 이보다 더 필수적인 것은 없다.

철학에서의 윤리적 전환은 문학적 전환이었다. 심리학·사회학·철학 등 오늘날의 학과 대부분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주체 이론은 정체성과 서사성을, 따라서 주체성과 문학을 하나로 묶고 있으며, 그 여파가 마케팅과 광고에도 미친다. 이 이론은 우리가 자전적 서사, 다시 말해 자기 삶의 이야기를 구성함으로써 주체성, 즉 ‘자아’를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이유에서든 그런 삶의 서사를 갖지 못하면, 잘 살지 못하고 불행해지며 여러 장애를 겪게 된다고 말한다. 자신의 삶에 대한 서사적 관점이 없으면, 자신의 삶을 기억으로 재구성하지 못하면, 도덕적 경험도 불가능하다.

잘 살기 위해서는 다시 자기 삶의 저자가 되어야 하고, 자기의 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말이다. 산다는 건 곧 자기 삶을 쓰는 거라는 얘기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무신론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말했다. "철학을 조금 공부하면 신에게서 멀어지나, 철학을 깊이 있게 공부하면 다시 신에게로 기울어진다." 우리도 이렇게 말하자. 얄팍한 기술은 문학에서 멀어지게 하지만 많은 기술은 다시 문학으로 데려간다고. 법·의학·공학·상업 등 직업 학교들에서 이루어지는 문학 교육은 해롭기는커녕 대단히 유익한 거라고.

문학과 독서, 둘의 응집체인 문학적 소양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에게 늘 보상을 안겨준다. "그것은 이득을 늦게 보는, 하지만 아주 큰 이득을 보게 해주는 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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