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이나 가라고 결사반대할 줄 알았던 어머니가 뜻밖에 쉽게 응낙했다. 오히려 딸을 응원하는 목소리에 왕년의 기백이 되살아났다.
"세죽아, 나도 니 나이라면 부엌에서 아궁이 속이나 들여다보면서 살지는 않을 게다. 니는 좋은 세상 만난 기다. 여자 몸으로 공부한다고 외국엘 다 나가고. 옛적에는 탐관오리 지독하다 했더니 이 왜놈의 세상은 아주 하나부터 열까지 몸서리나는구나. 니가 무슨 대단한 독립운동 했다고 헌병보조원 놈들이 심심하면 들이닥쳐서 솥댕이 걷어차고 집 안을 뒤집어놓고 가니 이제는 멀리서 호루래기 소리만 들려도 기함을 하겠다. 따그닥 따그닥 게다짝 끄는 소리만 들어도 어제 먹은 밥이 올라온다."
그들의 스물은 비장하고도 상쾌했다. 그들 부모는 왕조시대의 부모들이었지만 자신들은 근대인이며 개화세대라는 자부심에 들떠 있었다. 그들은 부모를 부인하고, 자신이 태어난 시대를 부인하고, 아직은 도착하지 않은 미래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그들은 자기 마음속의 이미지로 세상을 리셋하겠다는 야무진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오른쪽 가슴엔 이상을, 왼쪽 가슴엔 연정을 품은 채 푸르른 젊음을 통과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꿈이 얼마나 푸르르든, 명백한 것은 그들이 파산한 나라, 폭격 맞은 나라에서 파편처럼 튕겨 나간 서글픈 디아스포라의 젊음들이라는 점이었다. 또 하나, 이들의 임시캠프인 상해와 중국 역시 맹수 이빨 사이에 끼어 있기는 조선과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