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비가오고 아침까지 안개가 자욱하더니 해질무렵에는 ‘봄밤’이라는 감상이 드는 날씨가 되었습니다. 모두 퇴근한 사무실에서 고요한 글을 읽었습니다.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단정한 삶의 일부분이 저에게도 옮겨 지게 된 것 같아 혼자 있는 이 저녁이 따듯해 집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 그녀의 늙고 지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번져나갔다.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니.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데 나이를 먹는 일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타인이 느꼈던 방식 그대로 세상을 느껴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얼마나 헛된가. 우리는 오직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대로만 느낄 뿐이다.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그렇다.

그건 얼마나 달콤한 일이었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운일이었을까. 이미 오래전 지나왔으나, 그런 시기가 틀림없이 내게도 있었다. 그리고 그건 언제 누구에게 찾아오든 존중받아야 마땅했다.

고독으로 진저리가 쳐질 것 같은 이 세상에, 딸에게 누군가가 있다니. 결혼이란 형태든 아니든, 상대가 누구고, 어떤 인종이든 어떤가.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딸에게 그런 말을 해주고 싶었다. 상처를 받지 않고 산 사람만이 사랑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사랑을 주는 법에 대해 오래 생각해본 사람뿐 일지도 모른다고.

거듭될수록 소희의 상상은 익숙한 서사를 게으르게 변주한 형태를 띠었는데, 그건 악의 때문이 아니라 소희에게는 죽음이 아직 너무나 추상적인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단 한 번도 말을 나눠본 적 없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해야 할 이유는 없지, 소희는 생각했다.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범죄자일 수도 있었고 자식들에게 버림받을 만한 일을 한 부도덕한 아버지였거나 사기꾼, 자발적인 고독을 택한 은둔자일 수도 있었다. 만약 한 번이라도 대화를 나눴다면 소희가 싫어하게 되었을 만한 인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었든 한때 존재했던 생生이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없다니. 그건 대체 무슨 말이지?
그에게도 좋은 날이 있었을 테지. 늘 억제하려 애썼던 무용한 상상력이 소희를 슬픔에 잠기게 했다. 상상이 모르는 사람이었던 그를 아는 사람으로 둔갑시켰다. 언젠가 노인처럼 사라지고 말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떠올리게 했다. 아,
죽음은 얼마나 커다란 사건인가. 그것이 누구의 죽음이든.
소희는 그 진실을 이제 겨우 어렴풋이 막 깨달은 참이었고,
그래서 눈을 꼭 감았다. 한밤중에 홀로 눈을 떠버려 무서운아이처럼. 가까스로 울음을 참는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눈을 감은 채 소희는 한동안 더 어둠 속에 누워 있었다. 존재했던 삶의 부재가 마음속에 그려놓는 드라마를 조용히 응시했다.

한밤중 과제를 하다가 듣게 되는 그 소리는 다혜를 진저리치게 만들었다. 보아서는 결코 안 될 광경을 보기라도 한것처럼. 모과나무집에 살게 된 이래 다혜가 새롭게 발견한것은 늙는 일이었다.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게 되는 것. 품위를 잃고, 수치를 망각하는 것. 타인의 눈에 스스로 어떻게 비칠지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야말로 노년의 삶에주어진 실로 놀라운 특권 같다고 다혜는 생각했다.

진실은 이런 것이었다. 연애해보고 싶다는 호기심. 누군가가 자기를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서 확인받고싶은 조바심. 그때까지 알던 것과 전혀 다른 감정을 경험해보고픈 욕망.

스무 살 때 다혜는 자신이 언젠가는 늙을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믿지 못했다. 겨우 스물여덟 살이었을 때는 이제늙어버린 노인의 마음을 알 것만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노인의 마음을 안다고 믿었다니. 주제넘은 오만. 어리석은소리. 다혜는 아무것도 몰랐다. 여전히, 지금도.

그러고 나서 주미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최악을상상하며 얼마나 쓸데없이 인생을 낭비하며 살고 있는지마침내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어떤 얼굴로 다가올지 짐작할 수조차 없는 미래와 끝에 대해서 대비할 능력이 마치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헛되게 믿으면서. 그렇게 말한 후 우리는 주미의 이제 일곱 살이 된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한없이 잔혹한 인생이 얼마나 변덕스러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또다시 기쁨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조금 더 말했다. 이미다 환해졌다고 생각한 연노란색 하늘과 부드러운 윤곽을 지닌 산등성이가 맞닿은 부분을 따라 아주 가느다란 선이 생기고 그것을 우리가 발견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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