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마드리드 일기
최민석 지음 / 해냄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민석 작가님의 베를린 일기에 이어 마드리드 일기 역시 무척이나 재미있습니다. 한편 비슷한 프로그램으로 우리나라에도 방문한 외국작가가 있을텐데 그 작가의 방문기도 읽어보고 싶네요.

숙소로 털레털레 걸어오는데, 쓸쓸함이 내 몸에 비 맞은 옷처럼달라붙은 듯했다. 그토록 원했던 레알 마드리드의 시합을 봤다. 그것도 이강인 선수가 속한 마요르카와의 시합이었다. 티켓 사기를당하지도 않았고, 8만 명의 군중 속에서 소매치기를 당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왠지 모를 서운함은 한국인이 속한 팀이 졌기 때문은아니었다. 어쩌면 동경하는 삶이 실은 가늠할 수 없는 고독과 마음의 무게로 이뤄져 있다는 걸 손톱만큼 느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건, 돌이켜보면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든 건 언제나 금전적 보상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아이로니컬한 것은, 순수한 즐거움만 바라며 삶에 무용한 것을 꾸준히 하다 보면, 삶은 언젠가 보상을 전해준다. 아무 생각 없이 쓴 『베를린 일기』가그랬고 (그 덕에 출판을 해서, 독자들이 생겼다), 나를 달래려고 쓴 소설과 에세이도 그랬다. 사실, 좀 쿨한 척하며 말해 보자면, 보상이없어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이미 쓰는 순간에, 그 몰입의 기쁨으로보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져보니 내 안에는 어디를 가보고 싶다는 욕구보다, 한 도시를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 같다. 그러자, 서반아어
‘Conocer (꼬노세르, 알다)‘가 떠올랐다. 희한하게도 서반아어로 "너 어디에 가봤니?"라고 물을 때는 ‘가다‘라는 동사를 쓰지 않고,‘알다‘라는 동사인 ‘Conocer‘를 쓴다. 즉, 이런 식으로 묻는다. "너포틀랜드 알아?" 이게 포틀랜드에 가봤냐는 뜻이다.
물론, 처음엔 이 질문의 의도를 몰라 이렇게 답하곤 했다.
"포틀랜드에 가보긴 했는데, 잘 알지는 못해."
그러면 상대는 말한다.
"아니, 아까 가봤다며! 그게 ‘아는(conocer)‘ 거라니까!"
왜 서반아인들은 여행을 소재로 삼을 때, ‘가다‘ 대신 ‘알다‘라는동사를 쓸까. 그건 어쩌면, 이들의 여행 목적이 여행지를 방문하는데 있지 않고, 그곳을 제대로 아는 데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왜 서반아인들이 그토록 "너 베를린 알아?" "너 도쿄 알아?" 하고 물었는지 이해된다. 그렇기에 마드리드에 왔지만, 아직마드리드를 잘 모르는 나는, 몸은 도착했지만 영혼은 도착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서 몸과 마음이 모두 도착하길 바란다.

공부하지 않기 위해 여행을 가는데, 여행을 가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하다니. 이렇듯 삶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그런데, 사실 소설가의 삶은 마냥 쓰기만 하는 삶이 아니다. 쓰는 삶은 달리 말해, 공부하는 삶이기도 하다. 이미 아는 것만 쓴다면 작가는 새로운 세계와분야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없다.
한데, 자신이 아는 세계가 무한정 넓은 작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평생 책을 쓸 작정이라면, 언젠가는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도전해야 할 시기를 맞닥뜨린다. 동시에, 아직 세상의 관심이 닿지 않은 미지의 영역으로 독자를 초대하려면, 자신이 먼저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평생 쓸 사람이라면, 평생 공부하는걸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이 삶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세상에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것뿐이다.

그 결과 이제는 20~30대 때처럼 여행 욕구가 내 안에서 들끓지않는다. 좀처럼 설렐 일이 없다. 중년의 문제일까. 아니면, 내 개인의 문제일까.
둘 다일 수 있다. 하지만, 확실한 한 가지가 있다면, 그럼에도 삶에는 여전히 흥미로운 모습을 간직한 채 나를 기다리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내게 글쓰기는 고통스럽지만 아직은 흥미롭다. 낯선 언어를 익히는 일도, 영화를 보는 일도 그렇다. 그러니, 굳이 따지자면, 예전에는 몸으로 하는 여행을 좋아했다면, 지금은영혼으로 미지의 세계로 떠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이렇듯 人間은 어떤 형태로든, 어떤 방법으로든, 어딘가로 떠난다. 부디 몸과 영혼의 여행을 모두 마치고, 편히 쉴 수 있는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내 길었던 여행을 후회하지 않길 바란다. 마치 두꺼운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추억에 젖듯이, 내 지난 여행의 시간을 회상하며 미소라도 몇 번 지을 수 있길 바란다.
먼 훗날 돌아보면 별것 아닐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의 내가보기엔 나쁠 게 없는, 그래서 보통의 날이라 소중했던 하루였다.

중년의 쓸쓸함은 돈 버는 기계가 된다는 생각에서도, 주름이 느는 모습에서도 생겨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바로, 선생이 없다는사실에서 생겨난다. 더 이상 나를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고, 가르치려 하는 사람도 없다. 스스로 시간과 돈을 들여 배우지 않으면, 과거에 쌓아놓은 얄팍한 정보와 경험에만 의존해 살아간다. 이는 앞으로 나아가는 삶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과 훈련을 조금씩 갉아먹으며 사는 삶이다. 그렇기에 40대 중반이 된 나는 새벽에 꾸벅꾸벅 졸면서까지 온전히 내 삶의 일부를 공부에만 쏟고 싶은 것이다.
행여나 수험생이 이 글을 읽는다면 "아니, 아저씨. 머리가 어떻게 된거 아니에요" 할지 모르겠지만, 실은 알코올과 휘발성 강한 대화, 그리고 겸손한 단어로 자기애를 감춘 수사만 넘치는 만남에지친 것이다. 그런 자리에서 몸과 영혼을 축내며 시간을 몇 년씩이나 허비하다 보면 내 갈증에 공감할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일을 하는 와중에 짬을 내 공부해야 하지만, 이 시기는삶이 준 선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소중한 날을 기록으로 남기며, 아껴 쓰고 싶다. 언어유희를 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이렇게 쓸 수밖에 없다. 지금의 날들을 ‘잘 쓰기 위해, 이렇게 매일 쓴다.‘

여행지에는 오래된 원형 극장, 성과 요새, 그리고 박물관이 있다. 이런 것들이 하나씩 모여 그 도시의 인상과 느낌을 자아낸다.
하지만, 결국 여행객의 인상에 오래도록 남는 것은 그 도시의 사람들이다. 수백, 수천 년 된 유물이 아무리 견고하게 버텨낸다 해도, 사람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따라 도시의 인상은 단번에 흔들리니 말이다.

노화의 서러움은 체력을 잃는게 아니라, 설렘의 능력을 잃는 데서 온다.
어느덧 여행지에서 ‘하고 싶은 리스트‘ 같은 게 없는, 쓸쓸한 여행을 하는 셈이다. 그저 먼 곳으로 이동해서, 내 일상에서 벗어났다가 회귀하는 것, 그것이 어느 순간부터 여행의 목적이 되고 말았다.

앞으로 한국에서 TV로 시합을 보면 예전보다 더 흥미로워질 것이다. 한동안 ‘아, 저기 내가 앉았던 자리인데‘ ‘아, 저기는 내가 사진을 찍었던 곳인데‘라며 여행을 추억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여행은 끝나지 않는다. 이 경험은 자연스레 이곳에서의 시간을 되새기게 하며, 한국에서 살아내야 하는 시간을 더 다채롭고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여행은 막상 떠나면 난관에 부딪혀 당장 짐을 싸돌아가고 싶을 만큼 지치게 하지만, 결국에는 늘 ‘다녀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돌이켜보면 여행은 늘 내 삶을 살게 하는동력이자 땔감, 질료이자 원천의 역할을 한 것 같다. 역시 이번에도 떠나오길 잘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