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자은, 불꽃을 쫓다 설자은 시리즈 2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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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들어보니, 나리향은 세상이 사납게 굴어도 제가 택할수 있는 일에는 싱그러운 사람이었더이다. 금성은 나리향 같은 이의 생기로 융성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해요. 여차하면 고이기 쉬운 죽음의 기운을 푸성귀로 쓱쓱 닦아내던 이였을 거예요. 오래 복을 누렸어야 했는데, 어떤 더러운 도랑에 누워 썩을 자가………… 그러니 나리향의 생을 기리기 위해 우리라도 제대로 갈무리해줘야지. 택한 상대와 묻어주는 일은 가벼운 일이 아니야. 중한 일이야."

한 사람으로서의 자은은 하지 않을 일을, 관직에 있는 자은이라면 망설임 없이 할 것이었다. 거인의 손가락 중 하나이기에 어딘가 구름 속에 있는 머리가 시키는 대로 행했을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더 큰 힘에 종속되어버렸다. 그 힘을 끌어 쓸수 있는 대신 본연의 모습과는 멀어지고 있었다.

"이 일을 거두어 다른 이에게 맡길까?"
"아닙니다!"
대답이 급하게 나왔다.
"일의 처음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맡기시면 엉뚱한 자를 베고 끝이 났다 아뢸 것이옵니다. 제게 그대로 맡겨주시면 베어 마땅한 자를 찾아내 베겠습니다."
"네가 베지 못할까 물은 것이 아니다."
자은은 왕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려 고개를 들었다.
"흰 매를 굳이 웅덩이 같은 곳에 보낼 필요가 있을까 싶어 물은 것이지."
고고한 일만을 맡을 생각은 없었다. 자은은 허리에 찬 검을내려다보곤 고개를 저었다.
"매의 깃털은 진창에 닿아도 쉬이 젖지 않더이다. 이대로맡겨주시지요."

"혼자 깨어 있으면, 잠의 옷자락 아래 기어들지 못하면.....
쫓기는 마음이 들지 않나? 그러니 비슷하게 눈이 벌건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밤을 새우는 거지. 잊을 수 있으니까, 쫓기고 있다는 걸."
"무엇에 쫓기나?"
"지난날의 과오에 쫓기는 자가 많을 테고, 오지 않은 날들에 쫓기는 자도 더러 있을 테지. 어느 쪽인지만 명확히 알아도 덜 쫓길 텐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긍휼히 여기게. 쫓기다 사로잡힌 자들을."
"자네는 어떻게 그 속내를 아나?"
"어른 없는 어린아이가 먹고살려면 밤의 심부름꾼이 될 때가 있으니 아네. 밤 심부름꾼이 살아남으려면 사람의 무늬를알아봐야 하고, 어느 바다 어느 땅에 가도 반복되는 무늬가 있다네 "

"지금의 신라에서는 모두가 모두를 덩어리로 보지. 구려인은 구려인, 백제인은 백제인, 말갈인은 말갈인. 덩어리들끼리는 또 결코 하나로 뭉쳐지지 않네. 만약 내가 전쟁에서 사로잡혀, 항복하여 신라에 복속되었더라면 나 역시 나일 수 없었을거야. 감시받는 덩어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겠지."

무도함이, 잔인함이 가까이 도사리고 있다 해서 늘 짚어낼수 있는가? 자은은 점점 끔찍한 것들일수록 빛깔도 냄새도 없어 경계하기 어려운 게 아닐까 여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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