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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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있는데 집에 도둑이 들었다 치자. 도둑은 나보다 힘이 세고 주변에 흉기 될 만한 것이 널려 있다 치자. 일어 나서 도둑이야 소리 지르면 도둑이 나를 죽일 것 같아서, 도둑이 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치자. 그래서 내가 아주 귀중한 것을 도둑맞았다면, 그건 내 잘못인가?
목숨을 걸고 싸워서 도둑에게 제압당했다고 치자. 내가 다치고 부러졌다고 도둑은 도둑질하지 않을까? 저항하다가 내가 죽었다고 치자. 도둑은 도둑질하지 않을까? 내가 소리 지르거나 죽도록 반항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가만있 었으니까 도둑은 아무 잘못이 없나? 다들 그렇다고 말한다. 도둑보다 도둑맞은 내 잘못이 크다고. 네가 도둑맞을 짓을 했다고. 나는 몰랐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도 몰랐다. 무서웠다. 하지만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는다. 나를 의심하고 내 잘못을 지적한다. 내 인생은 이미 망한 것처럼 말한다. 공부도 잘하고 똑똑한 애가, 사리분별 다하고 할 말 다하는 애가 그냥 당하고만 있었다니 말이 되느냐, 요즘 애들이 얼마나 교활하고 약았는데, 울면서 하는 말이라고 다 믿으면 안 된다. 걔가 뭔가 감추는 게 있 을 것이다, 그런 소리들, 내가 못 들은 줄 알지.

사람들이 부끄럽지 않냐고 할 때는 몰랐다. 내 감정을 알지 못했다. 부끄러워야 하나 헷갈렸다. 이렇게 쓰니까 확실히 알겠다. 난 부끄럽지 않다. 난 고통스럽다.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당신들도 당해봐야 한다. 내가 겪은 것 을, 나와 똑같은 상황과 조건에서 당해보면 알 것이다. 어째서 당하고만 있었는지. 어째서 부끄럽지 않고 고통스러운지. 당신들이 지금 이해하지 못하는 그 모든 것들, 설명을 요구하는 그 모든 의심들, 설명해봤자 핑계나 변명으로 듣는 걸 알아. 어째서 내가 변명을 하나. 변명은 가해자가 하는 것 아닌가. 당신들에게 나는 가해자인가.
나는 부끄럽지 않다. 그건 내 감정이 아니다. 내겐 아무 잘못이 없다. 아무 잘못이 없다.

사람들은 내가 겪은 일이 먼지인 줄 안다. 먼지처럼 털어내라고 말한다. 먼지가 아니다. 압사시키는 태산이다.
꼼짝할 수 없다.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움직일 수 있다. 걷고 보고 말하고 달릴 수 있다. 울고 웃고 판단할 수 있다.
나는 쓸 수 있다. 나는 하고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이모는 내가 겪은 일 때문에 나한테 잘해주는 거예요?
잘해주는 게 아니라 걱정하고 아끼는 거야.
너무 노력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노력해야 해. 이모가 단호하게 말했다. 사람은 노력해야 해. 소중한 존재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래야 해.
노력은 힘든 거잖아요. 제야가 중얼거렸다.
마음을 쓰는 거야. 억지로 하는 게 아니야. 좋은 것을 위해 애를 쓰는 거지.
제야는 일기에 이모의 말을 썼다. 언젠가는 이모의 말을 이해할 수 있길 바랐다.

나는 내 인생 최대 불행이 강간당한 거라고 생각했는 데, 아니다. 내 인생 최대 불행은 이런 세상에, 이런 사람들 틈에 태어난 거다. 이런 사람들에게 어른이라고 고개 숙여 인사해야 하고 어른이 하는 말이니까 들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싹수가 노란 거고 애당초 글러먹은 애가 되는 거고. 당숙이 악마여서 나를 강간한 게 아니다. 여기서는 그게 강간이 아니니까 강간한거다. 당숙이 당당한 건, 가해자면서 희생자인 척 구는 건, 이 세계에서 아주 당연한 문법인 거다. 여기 사람들은 ‘강간‘이나 ‘성폭행‘의 의미를 모른다. ‘남자가 꼴리면 그럴 수도 있는 짓‘만 안다. 돈이 많으면 돈도 많은데 무슨 대수냐, 궁핍하면 불쌍하니까 눈감아주자, 돈이 적당히 있으면 먹고살 만해서 잠깐 딴생각을•·•••• 그러므로 이곳에서 남자는 언제나 그럴 수 있다. 지구 어딘가에는 아직도 여성 할례가 있다고 들었다. 더럽고 불경하다며 생리하는 여자를 격리한다고 들었다. 여자를 재산 취급한다고 들었다. 결혼 지참금이 적다고 여자를 학대한다고 들었다. 여기 사람들에게 그런 얘기 해주면 뭐라고 할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기겁 할까? 우리는 뭐 다르나? 대한민국은 달라? 내 아들이 한 달에 거둬들이는 돈이 얼만데 젊어서 여자애 하나 건드린 게 무슨 대수냐고 말하는 이 땅은·••·•• 야만인들. 파렴치 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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