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단지 질병으로 코드화된개체로만 의사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삶의 배경을 가지고 자기 결정권을 지닌 자유로운 존재로 의료진과 마주하는 것이라고 대학에서 이미 배우지 않았던가. 나는 아마도 그때 길을 아는 것과 걷는 것의 차이를 몸소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미리 지도를 보고길을 익혀둔다고 해도, 결국 그 길을 걸어야만 보이는 풍광이 있는 것처럼.
그렇다면<외국인노동자‘인 그에게 주어진 진단명인 ‘알코올중독‘은 어떠한가. 이 말을 듣는 순간, 당신은 그에 게서 ‘술을 아주 많이 마시는 사람‘이라는 일상적 언어만 을 발견하거나 ‘치료를 요하는 질병이구나‘ 하는 질병의 명칭만을 읽어내는가. 아니면 모종의 경계와 위협, 나태한 일상, 사회적 비용이나 잠재적 폭력 등을 상상하는가.
나와 당신이 후자라면 그것이 의료화된 질병에 붙여 진 은유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집단 치료인 알코올 자조 모임에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하게 만든 보이지 않는 배제의 힘이고, 동시에 그를 해고한 고용주가 느꼈을 불안의 명확치 않은 근 원이다. 또한 그것은 그가 의학적 위기의 순간에도 입원 치료를 선택하지 못하게 만드는 고용 불안의 동력이자 이모든 과정을 통해 더더욱 그가 금단 증상과 불안, 고통 속에서 음주의 유혹에 다시 굴복하게 만드는 최후의 타격이다.
누군가는 질문할 수도 있겠다. 이 무슨 궤변이냐고. 어쨌든 결국 그의 책임이 아니냐고, 그의 선택의 결과가 아니냐고 말이다.
나로서는 다른 답을 제안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장 의 부제처럼, 돌아올 수 없는 강은 한 번에 건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도강의 과정 중 여러 번에 걸쳐 다른 선택을 하게 만들고 결국 결과를 바꿔놓을 수 있는 저력은 오롯이 환자 자신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 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