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멀리 서서 자신을 바라볼 때부터 그는나를 알아봤다고 했다. 레드우드 앞에서 처음만난 뒤,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우린 어제 본 사람들처럼 안개를 먹고 자란다는 그나무 얘기를 나눴다. 레드우드에 대해서 말하고 난 뒤에도 우리는 뭔가 계속 말하고 싶었다. 이런 기분이 사랑의 시작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지극히 단순한 그 과정이 지난 이십일 년 동안 나를 괴롭혔던 고통과 고독과 절망과 분노를 말끔히 치유했다. 넌 대단해. 넌 멋져. 넌아름다워. 넌 소중해. 난 네가 너무나 좋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 세상 전부와도 바꿀 수없어. 평생 너만을 사랑할 거야. 난 너의 모든걸 다 가지고 싶어. 말들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있을 줄이야. 그 달콤함 때문에 내 몸이 촛농처럼 완전히 녹아버릴줄이야. 나란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마치 죽음처럼.

정상적인 사람들에게는 과거가 단일한 게아니라 여러 개다. 가족이 기억하는 유년과 친구가 기억하는 유년과 자신이 기억하는 유년이 모두 다르리라. 그러므로 그들은 그중에서 가장 합당한 과거를 선택하면서 지금의 자신에 이르렀으리라. 이치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를 따지는 건 그렇게 선택할 수 있는 과거가여러 개인 사람에게나 가능하지 않을까?

"돈을 빌려주겠다는 사채업자나 좋은 땅을소개하겠다는 부동산업자처럼 친모를 찾는입양아라는 건 진부하기 그지없네. 사채업자라면 누구나 이자를 꼬박꼬박 챙기겠지? 마찬가지로 입양아들은 친모를 만나는 자리에서눈물을 쏟을 테고. 역시 진부해. 나는 다른 식으로 행동하고 싶어."
신문을 내려놓으며 내가 말했다.
"다른 식으로? 어떤 식으로?"
유이치가 물었다.
"유능한 사채업자처럼 굴겠어. 그동안 밀린이자를 다 받아내야지."
"밀린 이자라는 게 뭐야?"
"사랑이 마땅히 받아야만 할 원금이라면,
이자는 사랑을 둘러싼 것들이겠지. 웃음소리,
자장가, 몸냄새, 쓰다듬기, 입맞춤 같은 것들. 아니면 부동산업자처럼 잘 찾아왔다며 내가얼마나 괜찮은 딸인지 소개할 수도 있겠지.
암울한 과거의 기억이 아직 남아 있지만, 그건 여름날의 지나가는 먹구름 같은 것에 불과했고, 지금은 꽤 평판이 좋은 사람이니 놓치면 후회할 것이라고 충고하는 거지."

"나는 인생의 불행이 외로움을 타는 걸 본적이 없어요. 불행은 불량한 십대들처럼 언제나 여럿이 몰려다니죠.

"저는 소문 같은건 하나도안 무서워요.
사람들은 자기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 들여다본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때조차도 자기 마음 하나 제대로 모르는 바보들이니까요. 저는 자기 마음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들은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그 무지한 마음이 무서울 뿐이죠."

그런데 왜 인생은 이다지도 짧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건 모두에게 인생은 한 번뿐이기 때문이겠지. 처음부터 제대로 산다면 인생은 한 번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단번에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단 한번뿐인 인생에서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는, 그게 제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는 모두 결정적이다. 한 번뿐인 인생에서 우리는 그런 결정적인 실수를 수없이 저지른다는 걸 이제는 잘 알겠다. 그러니 한 번의 삶은너무나 부족하다. 세 번쯤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번의 삶은 살아보지 않은 삶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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