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행한 기적의 수혜자 서른일곱 명이 그들의 더러운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나에게 가장 큰 웃음을 준 것은 가버나움의 마귀들렸던 자였다. 「마귀가 나간 후로 사는게 시들해져 버렸어요!」 눈이 멀었던 자는 세상이 이렇게 추악할 줄 몰랐다며 한탄을 늘어놓았고, 문둥병에 걸렸던 자는 이제 아무도 그에게 적선하지 않는다고 투덜댔으며, 티베리아스의 어부 조합은 다른 조들을 배제하고 한조만 특별대우 했다며 나를 비난했고, 나사로는 살갗에 시체냄새가 밴채로 사는 게 얼마나 끔찍한일인지 토로했다.
좋은 질문이다. 나는 TL는 늘 알지만, II는 결코 알지 못1 한다. 다시 말해, 목적보어는 알아도 상황보어는 알지 못한다. 따라서 나는 전지(全知)의 존재가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 부사들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한다. 악마가 디테일에 있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인간은 육신의 이런저런 결함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다. 당연한 일 아닌가. 집이 없는 건축가가 설계한 집이 어떻게 완벽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일상적으로 하는 일에만 훌륭한 솜씨를 발휘한다. 아버지는 한 번도 육신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나는 그분이 육신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경이로울 정도로일을 잘 해냈다고 생각한다.
기적을 일으키는 일이 은혜를 베푸는 게 아니라 의무를 다하는 게 되어 버렸다. 냉이라이트사지가 잘려 나간 장애인이나 빈사 상태의 환자를 나에게들이미는 사람들의 눈길에서 내가 수없이 읽은 것은 간청이아니라 협박이었다!
우리는 즐거움을 누렸을 때 훨씬 나은 누군가가 된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이치다.
사랑은 확신과 의심을 한데 모은다. 우리는 사랑받고 있다고 확신하는 만큼 그것을 의심한다. 번갈아 그런 게 아니라, 난감하지만 동시에 그러하다. 사랑하는 이에게 질문을 퍼부어서 의심을 떨치려 애쓰는 건 극도로 애매한 사랑의 본성을 부인하는 일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일 때 느끼는 것, 그것을 배양하라. 그것이 바로 신비주의적 충동이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다. 배고픔을 더는 느끼지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포만이라 부른다. 피로를 더는 느끼지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휴식이라 부른다. 고통을 더는 느끼지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위안이라 부른다. 갈증을 더는 느끼지않을 때 그것을 칭하는 낱말은 없다. 언어는 지혜로워서 갈증에 반대되는 낱말을 창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갈증을 해소할 수는 있지만, 그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그것을 견뎌 보라고 권한다. 마시는 순간을 늦춰 보라고. 물론 한없이 늦추라는 말은 아니다. 건강을 위험에 빠뜨려서는 안 되니까. 나는 갈증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다. 갈증을 해소하기 전에 그것을몸과 마음으로, 철저하게 느껴 보라는 것이다. 세우실험을 해보라. 목이 타는 갈증을 참고 또 참은 후에 잔의물을 단숨에 들이켜지 마라. 한 모금만 입에 머금고 삼키기 전몇 초 동안 참아 보라. 그 경이로움을 가늠해 보라. 그 황홀함, 그것이 바로 신이다. 아빠 했으며졌다친수해왔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신의 은유가 아니다. 바로 그 순간그 한 모금의 물에 대해 당신이 느끼는 사랑이 바로 신이다.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그러한 사랑을 느끼기에 이른 자이다. 그리스도가 된다는 게 바로 그런 것이다.
그것은 내가 구원받았다는 증거다. 그렇다, 극도의 고통에시달리고 있지만 나는 아직 물 한 모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나의 믿음은 그 정도로 온전하다.의해서 살았다
나는 빗물을 받아먹기 위해 혀를 내밀힘조차 없다. 하지만빗물이 내 입술을 적신다. 나는 언젠가 〈페트리코르〉 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얻게 될,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냄새를다시 한번 들이마시는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린다.
진실로, 당신의 사랑하는 망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마음껏 기뻐하라. 그것은 그가 가장 좋은 방식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죽음을 잘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결론짓지 마라. 그는 최선의 방식으로, 당신을 위해 억지로 내키지 않는 재주를 부리지는 않는 방식으로 당신을 사랑한다. 죽어 있는 것은 평온하다. 당신에게 돌아오는 일은 짜증스럽다. 상상해 보라. 한겨울, 당신은 따뜻한 이불속에, 휴식과온기의 희열 속에 누워 있다. 당신이 친구들을 아무리 좋아한다 해도, 그들에게 그렇다고 말해 주기 위해 추운 바깥으로 나가고 싶겠는가? 당신이 그 친구라면, 당신 혼자 좋자고, 보고싶은 누군가를 차갑고 짙은 안개 속으로 억지로 나오게 하고싶겠는가? 당신이 죽은 자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의 침묵마저 사랑할만큼 그들에게 신뢰를 바쳐라.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이 있는 이유는 상처가 될 만한 것을 늘 찾아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적어도 그들 중 하나와 마주친 적이 있다. 항상 언짢아하는 존재, 만성적인 불만자, 성대한 잔치에 초대받고도 빠진 음식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 그들이 왜 죽는 순간에불평에 대한 그들의 열정을 박탈당하겠는가? 그들에게도 그들의 죽음을 망칠 권리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