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자면 나는 애초에 내 인생을 눈치챘다. 그래서 사람들이 희망을 떠들어댈 때에도 나는 믿지 않았다.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언제나 확실한 절망을 택했다. 그러나애초에 나는 내가 백조라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미운 오리 새끼라고 손가락질할 때에도 나는 속으로 코웃음만 친다.
맹희는 한없이 착하고 말도 별로 없었지만, 그러나 일단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어지면 조금도 굽힐 줄 몰랐다. 그것은 격렬한 저항은 아니었지만, 바람에 허약하게 흔들리면서도 그러나 그 바람이 그칠 때까지는 결코 꺾이지 않으면서 그 흔들림을 멈추지 않는 풀잎의 몸짓과도 깉은 것이었다.
또한 죽음은 내가 생각하듯 한순간의 뛰어오를 듯한 슬픈 희열 혹은 고통의 쾌락 같은 게 아니었다. 그것은 길고 지루한, 그러나 피할 수 없는 행사 같은 것이었다.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고 곱씹어보고 그러고서 때가 되면 어쩔 구 없이 치러내야만 하는 의무적인 행사였다.
이제 나는 무차별적 불행의 이상화 대신에 선택적 행복의 실천을 위해노력하고 싶다. 사실 죽음과 관능은 어쩌면 서로 떨어진독립적인 게 아니고 한 동전의 앞뒤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파괴의 쾌락은 노력하기만 한다면 생산의 쾌락으로 변할 것이라는 낙관론을 나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뒤늦게나마 믿고 싶고, 믿으려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죽음에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커가면서 배웠다. 죽음은 어디로든 우리를 찾아올 수 있고, 어디로든 우리를 불러낼 수 있다는 것을.
새에 대한 나의 환상은 그때 깨어졌다. 그 이후로 나는하늘에서 날아가는 새들을 보면서 그들의 자유로움을 그리기보다는 그들 날갯짓의 중노동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다. 쉬운 삶이란 없다. 어떤 존재든 혼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신화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그건 자기 내부의 용과 싸우는 것인데, 내가 체험한 바로는 그 용을 만든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 그러므로 그 용은 환영이며, 따라서 그 용과는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 우리가 생각으로 키워낸 것이므로 생각으로 없앨 수 있다는 것이지. 돈키호테가 자기 적으로 알고 싸워 무찌르려 했던 풍차는 실제로 적이아니었지. 적이라고 잘못 생각했던 것뿐이야. 그 용과 싸울 필요가 없다고 해서 대면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야. 똑바로 대면하고서,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 만들어놓은 환영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 그것을 지워버리는 거지. 대면하지 않는 이상은 그것이 내가 만든 환영임을 알 수 없고, 그런 가운데 그 용의 환상은 점점 더 커지면서 실제적인 힘을 행사하게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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