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떠나온 세계
김초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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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이 행성의 시간을 잠시 빌려 온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지요.
그날 밤 지하실로 저를 찾으러 온 사제는 바닥에 쓰러진 저와흩어진 기재들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곧장 알아차렸습니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같은 일들을 목격했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사제님. 오브들이·제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습니다.
"오브들이 우리에게 시간을 나누어 준 거였어요. 그들이 잠든거예요. 스스로 멈추기를 선택한 거예요. 우리에게 삶을 주기 위해서요.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죠? 제 말은, 고작 이런 우리를 위해서……."
사제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어요. 그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것 같았어요. 하지만 침묵 끝에 사제는 제 어깨에조용히 손을 올렸습니다.
"그래, 너도 보았구나."
사제가 말했습니다.
"신도 금기도 없지. 오직 약속만이 있단다."
저는 바닥에 머리를 기대고 여전히 그 공간을 떠돌고 있는 목소리의 잔해를 들었습니다. 제가 평생을 지나도 이해할 수 없을어떤 결정들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먼 우주에서 온 작은 존재들에게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떼어 주기로 결정하는 마음이, 이 잠든 행성 벨라타 전체에 깃들어 있었어요. 저는 눈을 감고 그들을생각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그 오래된 협약을, 수백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지키고 있는 존재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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