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을 샅샅이 해부한다해도 나의 감정과 기분을 찾아내기는 어렵겠지요. 나조차 나를 들여다 보아야 하고 내가 내 맘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공감하며 이해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공감의 능력도 타고나는 거나 물려 받는 것이 아니라 배우면 된다는 사실에 안도합니다. 대신 그것은 강요되는 희생이 아니고 나조차 상대방에 몰입되어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다는 것은 한두번의 학습으로 이루어 지지는 않겠지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그들을 이해하려면 어렵겠지만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감싸준다면 내 안에서 길을 찾는 일도 수월해 질듯 합니다.

가장 절박하고 힘이 부치는 순간에 사람에게필요한 건 ‘네가 그랬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것이다‘ ‘너는 옳다‘는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수용이다. ‘너는 옳다‘는 존재에 대한 수용을건너뛴 객관적인 조언이나 도움은 산소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에게 요리를 해주는일처럼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 ‘저 사람은 지금 내가 산소가 필요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시키는 인증 작업일 뿐이다. 호흡이 가빠 산소 호흡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양념치킨을 시켜준다면 고마운 일도 아니고 도움이 될 리도 없다.
어떤 것을 묻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죽고 싶다는 마음을 비쳤는데도 그 고통이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하고 방치되거나 외면되지 않는 것자체가 중요하다.
언제나 나를 놓쳐선 안 된다. 언제나 내가 먼저다. 그게 공감의 중요한 성공 비결이다. 공감하는 일은 응급실 당직 의사처럼 상대에게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다. 의무가 되면 결국 내가 먼저 나가떨어진다.
악의가 없어도 얼마든지 타인에게 상처를 줄수 있다. 그래서 공감은 배워야 할 수 있는 것이다.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면서 자신도 모르게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하는 사람이 많은것도 그래서다. 배워야 아는 고통, 배워야 공감할 수 있는 고통이 세상에는 더 많다. 그래야 최소한 그런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의도치않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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