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의 고전이 말하는 ‘현자‘나 ‘성자(이룬 자)‘는인도 철학이나 소크라테스 철학이 말하는 ‘선인‘과 똑같다. 이들의 힘은 누군가를 죽일 준비가 아니라 반대로 죽임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데서 나온다. 부처에서 모차르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귀함과 가치, 완전한 순수성과 유일무이함은 그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새로 태어나고 싶은 사람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한다.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두려워하면 오늘과 현재를 잃게 되고, 그리하여 현실을 잃어버리게 된다. 오늘에게 시간과 관심을 넉넉히 허락하라!
정신노동이 전통도 멋도 없는 거친 공업을 닮아가고, 학문과 학교가 우리에게서 자유와 개성을 모조리 없애고, 가능한 한 빨리 유아기에서 벗어나 억지로 노력하고 쉴 새 없이 달리라고 가르칠수록, 대부분의 옛날기술과 마찬가지로 적당히 게으름을 피우는 무위의 기술도 점점 더 아득히 사라져간다. 한때 우리는 그런 기술의 대가였는데 마치 그랬던 적이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여유와 무위의 기술은 이제 이곳 서양 세계에서는 그저 팔자좋은 게으름뱅이들이나 누리는 것이 되어버렸다.
적당히 즐겨야 즐거움이 두 배다! 그리고 작은 기쁨을 소홀히 하지 마라!! 그러니까 한마디로 절제하라! 연극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초연을 놓치는 용기가 절제에 속한다. 독서를 즐기는사람이라면 문학 신작이 출판된 지 몇 주가 지나도록 그소식을 몰라도 괜찮을 수 있는 용기가 절제에 속한다.
인생은 덧없고 잔인하고 어리석지만 그럼에도 화려하다. 인생은 인간과 인간의 정신을 비웃지 않는다. 그러나 인생은 인간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 지렁이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인간이 자연의 변덕이자 잔혹한 놀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을 너무 중요한 존재로 착각한 데서 비롯되었다. 인간의 삶은 새나 개미의 삶보다 유난히 더 힘든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수월하고 아름답다는 걸 알아야 한다. 삶의 잔혹함과 죽음을 회피할 수 없음을 불평하지 말고, 그런 절망을 몸으로 느끼며 받아들여야 한다. 자연의 추함과 무의미함을 마음속에 받아들일 수 있어야 비로소 그런 거친 무의미함에 맞설 수 있으며 의미를 찾으려애써 노력할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이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그것 이외의 모든 것은 동물이 인간보다 훨씬 더 잘한다.
화요일에 할 일을 목요일로 미루는 일을 한 번도 하지 못한 사람이 나는 불쌍하다. 그렇게 하면 수요일이 얼마나 즐거운지 그는 아직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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