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력 삐에로 ㅣ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0
이사카 고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하루가 이층에서 떨어져 내렸다."
라는 말을 우리 말로 번역하면 "봄이 이층에서 떨어져 내렸다"가 된다. 당연히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저자가 소설에 썼듯이 '억지로 멋을 부린 말투라거나 어울리지 않는 비유"라고 말할 법하다. 그러나 하루는, 봄은 '나'의 동생이었을 뿐이다.
첫머리부터 흥미를 자극하는 말로 시작된 이 소설은 소제목을 중심으로 중구난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앞부분을 읽을 때에는 그런 방식이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기는 하지만 어쩐지 난삽하지 않냐는 생각을 했었다. 갑자기 과거로 갔다가 현재로 돌아왔다가 이 이야기를 했다가 저 이야기를 했다가 하는 지나치게 일관적이지 않아 보였던 소제목 속 이야기들은 끝으로 갈수록 하나로 모아져 딱딱 들어맞으면서 정리가 된다. 그러니 480여 페이지나 되는 이 소설이 결코 지루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야기의 전개방식도 흥미로왔지만 내용 역시 만만치 않다. 누군가 벽에 낙서를 하면 꼭 그 지역 근처에서는 방화가 일어난다. 과연 벽의 낙서와 방화는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또 왜 낙서를 하고 방화를 저지르는 것일까. 를 밝혀가는 과정이 마치 추리소설을 연상하게 한다. 때문에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좀처럼 중간에 책을 내려놓을 수 없는 긴박감을 준다.
뿐이 아니다. 우리나라 드라마 소재로 가장 많이 쓰이는 한 집안의 내력과 한 사람의 출생에 관한, 자칫 진부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이처럼 딱 들어맞는 구성과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들로 채우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인류의 탄생사인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의 적자생존법칙에서부터 피카소에서 DNA 설계도를 이루는 염기세포에 대한 이야기까지 망라한다. 그러나 그 어느 소재도 과잉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고 하나의 이야기를 일관성있게 하는 중요한 소재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주인공을 바라보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에도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첫머리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똑같이 써서 시로 말하자면 수미상관법을 이용한 표현방식에도 경탄을 한다.
쓰고 보니 마치 추상적인 겉핥기 같은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 소설에 깊이 감명받았다. 향후 몇 년 간 동안 읽은 소설 중 이 소설을 뛰어넘는 소설은 없었다고 단정지어 말할 정도이다. 그동안 알만한 일본 소설가의 소설은 대강 읽었지만 결론은 늘 하나였다. 일본 소설은 나와 정신 세계가 맞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이제 그 말을 수정할 때가 되었다.
일본 소설 중에서도, 일본 소설가 중에서도 탄성을 내지를만한 소설이 있고 소설가가 있다고 말이다.
내가 이 소설을 뛰어나다고 말하는 건 소위 문학에 필요하다고 말하는 쾌락과 감동이 모두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재미도 있으면서 감동도 주는 소설을 쓰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거기에다가 독자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구성이면서도 이야기 전체의 통일성과 완결성을 갖기도 쉽지 않다. 또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확실하면서도 유치하거나 치졸한 방식으로 말하지 않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 모두를 갖추었다.
쓸수록 무슨 암호 같다. 최대한 정보를 노출하지 않고 훌륭한 소설이라고 추천하는 일은 역시 쉽지가 않구나. 단언컨대 이 소설은 향후 몇 년을 통틀어 가장 추천하고 싶은 소설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주어본 적 없는 별 5개를 이 소설에 주었다. 이런 식의 주례사식 찬탄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소설은 충분히 찬탄할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