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광이, 루저, 찌질이 그러나 철학자 - 은둔형 외톨이 칸트에서 악의 꽃 미셸 푸코까지 26인의 철학자와 철학 이야기
저부제 지음, 허유영 옮김 / 시대의창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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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은 서양철학입문서다. 작가가 들어가는 말에서 밝혔듯이 철학을 공부하고 싶지만 너무 어려워 이해할 수가 없다고 푸념하는 사람에게 재미있고 통속적인 철학사 책을 쓰겠노라고 건넨 농담이 이 책의 시작이다. “인터넷 게시판에 쓰기 시작한 글이 호평을 받았고 덕분에 출간까지 하게 되었으니 인터넷의 수혜를 듬뿍 받은 책이다.

 

작가는 책이 가진 한계까지 밝혀둔다. 이 책은 통속서이며 독자들의 흥미를 높이는데 주력한 책이자 철학의 성대한 만찬을 시작하기 전에 가볍게 마시는 식전주같은 내용이니 원서를 대체할 수는 없다고 말이다.

 

이 책에 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토록 정직한 들어가는 말에 있다. 위선이나 허영을 싫어하고 정직 혹은 솔직함을 미덕이라 여기는 나에게 어울리는 책이다 싶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기대 이상으로 웃겼고 명확했다. 유머가 넘치면서도 유려한 필력을 자랑하고, 또 그런 필력만으로 승부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철학자들의 핵심사상을 분명하게 요약해냈다. (서양철학전공자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비전공자의 입장에서는 꽤나 정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뿐이 아니다. 위대한 사상가의 이면에는 미치광이거나 루저이거나 찌질한 본성이 공존하고 있음 역시 놓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사상은 그 사람의 삶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그 사람의 업적과 인격은 일치하지 않는다.

 

이런 책을 읽고 있노라면 위로를 받는다. 나만 미친 짓하고 찌질한 거 아니지? 너네 위대한 척하지만 니네들도 나보다 더 심하게 망가진 거 맞지? 그 어느 잠이 안 오는 밤이면 밤새 이불킥도 하는 거지?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좌절이 우리라는 공감대를 형성할 때 용기가 생긴다. 거, 나만 바보 클럽 아니잖아! 

 

완벽해 보이는 서양철학자들의 사상도 또다른 사상가들이 발견할 수밖에 없는 허점을 갖고 있다면 지금의 이 완전해 보이는 자본주의 시스템도 그 언젠가 무너질 허점을 안고 있겠지. 어쩌면 그 허점을 발견하고 싶어 서양철학을 뒤적이는지도 모르겠다. 서양의 역사, 철학, 시스템은 헤겔의 변증법이 그러하듯 --의 과정을 거쳐 왔으니 앞으로도 그런 과정의 연속이겠지.

 

서양철학은 인간이 가진 사유의 힘이 얼마나 큰지 배우게 하는 동시에 또 그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도 깨닫게 해 준다. 하이데거의 생각처럼 죽음의 가능성이 생존의 진정한 의의를 환기시킬 뿐이다. 죽음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본질에 가까이 가는 인간은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해도 끝내 극복할 수 없는 존재일 테니. 그러므로 니체의 권유처럼 끊임없이 자아를 초월하는 인생관을 붙잡고 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철학이 가진 힘은 멈춰 서지 않는 것에 있다고 믿는다. 아무리 위대해 보여도 완벽할 수 없고, 아무리 높아 보여도 넘어설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나는 그 가능성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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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류지향 - 배움을 흥정하는 아이들, 일에서 도피하는 청년들 성장 거부 세대에 대한 사회학적 통찰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옥 옮김 / 민들레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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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타츠루를 좋아한다.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이나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를 재밌게 읽었다. <하류지향>은 오래 전에 신간 소개 기사에서 소개받고는 읽어야지 하다가 이제야 읽었다.

 

조금 더 빨리 읽었으면, 학교에서 왜 배워요?”, “뭐에 써 먹어요?”라는 식의 질문에 대해 부드럽게 응대했을 수 있었겠다. 2005년에 강연을 하고 2007년에 이 책이 출판되었으니 10년이나 지났다. 일본이 한국보다 몇 십 년 앞서 있다고 하니 현재 한국 사회를 설명하기 유용한 책이다. 2013년에 쓴 우치다 타츠루의 서문에 의하면 그도 절판되었던 이 책을 다시 출간하는 것을 보니 한국에서도 이 이야기가 어느 정도 유효해진 것으로 판단하는 것 같다.

 

일본 번역서들이 대체로 그렇듯 쉽게 잘 읽힌다. 우치다 타츠루는 필력이 좋은 저자인 덕도 있겠다.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몇 대목 있지만 대부분은 우치다 타츠루가 가진 문제의식과 분석에 공감했다. 신자유주의는 공부와 노동으로부터 도피하는 세대를 양산했고 자본화되지 않는 것들은 유효하지 않게 만들었다. 공장의 레일이 돌아가듯 24시간 살아가는 노동자에게 시간성은 사라지고 없다.

 

몇 년 전 저녁이 있는 삶이란 말을 공약으로 걸었던 정치권의 후보(이 사람은 싫어한다)가 있었을 만큼 우리는 저녁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책을 읽으며 일본과도 너무나도 흡사한 한국 상황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한국은 일본보다 훨씬 노동조건이 나쁜 나라이기 때문이다.

 

햄버거 세트 하나 맘 편하게 사 먹기 힘든 최저시급, 언제 짤려도 이상하지 않은 계약직 노동자, 쉴 공간이 없어 화장실 한 켠에서 쉬어야 하는 청소 노동자. 그런 생각을 하니 우울함이 밀려든다. 무엇이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살게 할 것인가. 자꾸 되물을 수밖에 없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정치와 사회에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대답이다. 우치다가 말했듯, “주제넘은 일을 하는 것이 인간이다”. 청년 실업에도, 최저시급에도, 청소 노동자 문제에도, 세월호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는 한 사람이 없도록. 그에 대한 관심이 나에 대한 관심이므로.

 

무지는 죄이다. 늘 그렇게 믿었다,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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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바다 창비시선 403
도종환 지음 / 창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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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선생님(존경하는 분들을 언급할 때 반드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인다)을 두 번 뵈었다. 대학 시절 은사님을 따라 '홍명희 문학제'에 갔을 때와 2009'한국작가회의'에서 주최한 '젊은 작가와의 대화 -김사이 시인'에서 였다. 홍명희 문학제 땐 아주 잠시 뵈었다. 내 앞을 먼저 걸어가던 선생님이 문을 여시곤 내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주신 기억이 오래 남았었다. 나보다 앞서 홍명희 문학제에 참석했던 선후배들이 도종환 선생님을 뵙고는 친절하시고 인자하신 분이라는 평가를 했었는데 나도 그 말에 공감을 하게 되었었다.

 

2009년에는 길게 뵈었다. 당시 도종환 선생님은 '한국작가회의'의 간사셨다. 용기를 내어 따라간 뒷풀이 자리에서 여러 명의 작가들과 함께 몇 시간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역시 도종환 선생님은 따뜻하시고 유쾌하신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선생님이 정치인이 되다니. 여전히 놀랍다. 하지만 어느 일면 이해도 된다. 세상을 바꾸려면 무엇보다 정치를 바꾸어야 하니까.

 

인간적으로야 도종환 선생님을 좋아하지만, 선생님의 시를 많이 좋아하진 않았었다. 시의 매력은 역시 은유와 상징, 멋들어진 언어에 있다고 생각하는 탓이다. 그럼에도 송경동 시인처럼 도종환 선생님의 몇몇 시들은 깊은 울림을 준다. <오늘 하루>라는 시는 자주 읽는 시들 중 하나다.

 

며칠 전, 선생님이 시집을 내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외였다. 정치를 하시는 선생님이 시집을 내시다니. 사월 바다를 산 이유는 시인이자 교사이던 시절의 선생님의 시 경향과 정치인이 된 후의 선생님의 시 경향이 달라졌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 작가의 말부터 읽었고, 작가의 말에 반했다. 왜 하필 정치를 택했을까에 대한 선생님의 대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시골집에 작은 연못이 있습니다. 거기 수련 한 포기가 살고 있습니다.

나는 수련에게 왜 더러운 진흙 속에 뿌리 내리고 있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진흙이야말로 존재의 바탕이요 수련의 현실이며 운명입니다.

 

사람들은 제게 왜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느냐고 묻습니다.

진흙이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현실 아닐까요.

아비규환의 현실, 고통과 절규와 슬픔과 궁핍과 몸부림의 현실.

 

그 속에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을까요. 집을 짓기 위해 벽돌을 찍으려면 몸에 흙이 묻습니다. 집을 고쳐 지으려면 흙먼지를 뒤짚어쓰게 됩니다. 지난 사년간 온몸에 흙을 묻히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이 시들을 썼습니다.

 

구도의 길과 세속의 길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수행을 통해 가고자 하는 길과 사랑을 실천하면서 가고자 하는 길이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 201610월 도종환"

 

사람들의 우문에, 이보다 명쾌하고 현명한 대답이 또 있을까 싶다. 이런 대답을 듣고 있노라니, 정치인으로서 선생님의 시가 달라졌을까 싶었던 생각도 어리석었음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그랬듯, 사월 바다의 시들도 정직하고 분명했지만 깊었다.

 

슬픔의 통로

 

별들이 유난히 가까이 내려오는 밤이 있다

그믐이 다가올수록 어둠은 더 많은 별을 내보낸다

동굴 속에서 몇날 며칠 나무를 비벼 불을 일으킨

한 사내를 생각한다 불씨를 만든 것은

얼어터진 두 손이었을까 혹독한 한파였을까

삼나무를 쪼개 배를 만들게 한 것은 거친 물결

지도를 만든 것은 오랜 방황과 잃어버린 발자국

기도를 알게 한 것은 고통이 아니었을까

사랑을 가르친 것은 형언할 수 없는 외로움

경전을 쓰게 한 것은 해결할 길 없는 고뇌

시인을 만든 것은 열망이 아니라 슬픔 아니었을까

이 통증의 끝에는 어제와 다른 아침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삶과 죽음이 완만한 속도로 임무를 교대하듯

슬픔 속에서 낡은 것이 죽고 새로운 시간이 오리라

지금은 다만 천천히 깊은 슬픔의 통로를 걸어나갈 것

서둘러 눈물을 닦지 말고 흐르게 둘 것

여기까지 우리를 밀고 온 것이 좌절의 힘이었듯

약초를 알게 한 것이 상처와 고통이었듯

패배를 딛고 처절하게 한발 한발 걸어나갈 것

안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다스려 온기로 바꿀 것

지금은 따뜻한 위로의 물 한잔을 건넬 시간

남을 찌르지 말고 피 묻은 분노의 칼을 거둘 것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바라보고

마음의 안부를 물어볼 것

그리고 창을 열 것

그러면 별빛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들을 만나게 되리니

그쪽으로 갈 것

그러면 신도 우리 옆에서 그쪽으로 함께 가시리니

 

"시인을 만든 것은 슬픔"이었을지 몰라도 "통증의 끝에 어제와 다른 아침이 기다리고 있으""좌절의 힘""한발 한발 걸어나갈" "온기"이자 "위로"가 되어 "별빛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쪽으로" 가면 "신도 우리 옆에서 그쪽으로 함께" 간다. "슬픔의 통로"는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 되어 우리뿐만 아니라 신도 안내한다. 그러니 섣불리 절망하지 말 것.

 

정치인으로서 정치의 한복판에 서 있어도 희망을 놓치 않는 시인의 마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현실이 암울해도 여기서 끝이 아닐 것이라는 희망은 포기하지 않는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이 시는 현실의 어두움에 오래 좌절했었던 나를 부끄럽게 했다.

 

이뿐이 아니다.

 

희망의 이유

 

떡갈나무 잎을 들추고 도토리를 파묻는

다람쥐의 분주한 발걸음을 보라

그대도 나도 가을까지 왔다

숲의 정강이를 싹둑싹둑 잘라버리는 기계톱의 질주에

우리의 안락한 정원이 있다고 믿지 말라

우리의 미래는

불에 탄 나무에서 다시 솟는 연둣빛 새순

하늘 꼭대기에서 거기까지

햇살의 화살 한개를 쏘고 있는

태양의 따스한 손길에 있다

국경을 넘어와 땅속 깊이 감춰진 벽을 뚫어버리는

가공할 폭탄의 힘에 한 시대의 가능성을 걸지 말라

밤의 거리에서 평화를 구하며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작은 촛불과

그 불을 받쳐든 어린 두 손에 희망이 있다

이웃나라를 손쉽게 굴복시키는 폭력을

부러워하지 말라

만년을 녹지 않는 히말라야 숫눈처럼

빛나는 순백의 영혼

오체투지로 낮아지고 가난해져서

다시 일어서는 정신에

영원한 미래의 날들이 숨어 있다

우리가 잔인하게 쓰러뜨린 것들을 자랑하지 말라

승리의 포만감으로 가득한 식탁과 살찐 육신은

우리가 죽이고 짓밟은 것들의 묘지를 이루고 있나니

오래오래 주류로 살아온 이들이 잘 차려놓은

화려한 연회장이 아니라

그들이 경멸하고 손가락질하는 소수가

소박하고 정결하게 차린 두레반에 미래가 있다

어미 잃은 어린 짐승을 감싸안으며 눈물겨워하는

모성과 연민과 자비 아니면 희망 아니다

새 한마리의 목숨과 내 목숨의 무게가 같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직도 그대는 일주문 밖이다

속도와 경쟁과 승리의 갈망에 휘둘리지 말고

그만 내려서라

댓잎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는 바람의 속도

낙화 이후의 긴긴 날을 걸어가는

꽃의 발자국을 보지 못하면

그대가 달려가는 속도의 끝은 반드시 벼랑이다

증오의 말을 가르치지 말라

세상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경전 같은 말들이 있음을 가르치되

시인의 음성으로 하라

나약하지도 않고 사납지도 않은 목소리로

신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게 하라

거기 희망이 있다 그들이 희망이다

그래야 우리의 미래 오래도록 희망이다

    

이 시는 사월 바다의 마지막에 수록된 시이다. 이 시를 통해 다시 한 번 도종환 선생님의 가치관을 깨닫는다. 선생님이 끝까지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이유는 "시인의 음성"으로 "새 한마리의 목숨""내 목숨의 무게가 같다"고 말하는 혜안을 가졌기 때문이겠다.

    

​『사월 바다를 읽으며 시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한다. 그동안 도종환 선생님의 시를 폄하했던 것은 아닐까 반성한다. 시의 힘은 문재(文才)가 없는 범인(凡人)은 흉내낼 수 없을 만큼 빼어난 언어적 수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삶과 손을 잡고 나아갈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 의지에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점검한다. 어둠이 짙게 깔린 여기, 지금, 아직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음성이야말로 시가 아닐까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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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문제들 - 인간과 철학
버트란드 러셀 지음, 박영태 옮김 / 이학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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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관한 가장 좋은 리뷰는 이미 출간되었다. <곁에 두고 읽는 철학가이드북>의 20-23쪽에 실려 있다. (내용이 궁금하신 분은 http://blog.naver.com/dreamerfs/220883300855 의 가장 아래 사진 부분만 참고하시면 된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다섯 번에 걸쳐 <철학의 문제들>을 읽었기에 뭐라도 적어두어야 할 것 같아서이다. (또 하나의 이유를 적으라고 한다면, 이 책에 관한 (온라인에서 찾을 수 있는) 리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철학의 문제들>과 <철학이란 무엇인가>는 같은 책인데 번역자만 다르다. 후자의 책을 먼저 샀다가 번역 문제로 전자의 책을 다시 샀다. 전자의 번역이 더 원문에 가깝다. 대신 원문에 가까운 만큼 한국어는 지저분해졌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철학의 문제들>이 더 읽기 편하다. 다만 드물게 <철학이란 무엇인가>가 더 나은 번역이 있을 때가 있다. 두 권을 함께 두고 읽으면 더 좋다. (당연하게도, 영어의 원문을 읽으실 수 있는 분들이라면 원문을 추천한다.) 대체로 <철학의 문제들>을 중점적으로 읽은 만큼 이 리뷰는 <철학의 문제들>의 리뷰로 한정해도 상관없다.

 

이 책은 '지은이의 말'에서 목표를 분명하게 한정한다. "나는 이 책에서 주로 긍정적이면서도 건설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철학적인 문제들에 국한시켜 논의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문제들만 논의한 이유는 단지 반대를 위한 반대에 불과한 부정적인 비판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하여 이 책에서의 논의는 형이상학보다 인식론에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였으며, 다른 철학자들이 많이 논의한 그 밖의 문제들은 가능한 한 간단하게 소개하는 데 그쳤다.(7쪽)"

 

앞뒤의 내용을 바꿔보자면 이 말은 곧 '형이상학은 부정적이면서도 건설적이지 않다'는 말이 된다. 바로 그러한 입장에 서서 러셀은 관념론자들을 비판한다. 이 책에 언급된 관념론자는 버클리, 라이프니츠, 데카르트, 칸트, 헤겔인데 러셀은 줄곧 이들을 비판한다.

 

​이 책이 (서양)철학입문서라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그 말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서양 철학의 근원인 형이상학적 전통에서 시작하지 않고, 인식론적 입장에서 바라 본 철학입문서임을 알아야 한다. 분석철학의 창시자인 러셀이 쓴 만큼 분석철학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 역시 알고 읽어야 한다.

 

​목차는 총 1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문장은 "이성을 가지고 사리에 맞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신할 수 있는 지식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가"로 시작한다. 이 문장은 러셀이 우리를 철학적 사고로 초대하기 위해 던지는 질문이다.

 

이 문장을 시작으로 1장에서 14장까지 우리가 당연하게 믿고 넘겨왔지만 실은 당연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나에겐 이 과정이 1+1=2인 이유를 증명하는 수학적 공식처럼 느껴졌다. 누구나 1+1=2라고 믿고 있지만 막상 왜 1+1=2인지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학창 시절에 배웠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증명해봤자 달라질 것은 별로 없다. 결론이 2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과정을 충실히 밟아간다. 독자는 그 증명을 따라가면서 논리적(혹은 철학적)인 사고 없이 믿을 수 있는 것들은 실상 아무것도 없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의 인식 범위 역시 생각만큼 당연하지 않으며 확실한 것조차 없다. 확실하다고 믿을 수 있다면 그것은 증명을 거쳐 확정된 것들밖에 없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조차 확실한 것이 없는데 인식할 수 없는(형이상학적인 것들)은 더더욱 알 수 없지 않겠는가. (그것이 러셀의 입장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토록 확실한 것이 없는데도 증명(혹은 사고)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를 15장에서 밝힌다. "철학적 사유의 가치"라는 제목의 15장은 14장까지의 피로감을 어느 정도 해소해주는 역할을 한다. (15장이 없었으면 나 역시 러셀을 좋아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앞에 실려 있는 '책의 내용 소개'에 의하면 비스겐슈타인은 이 책을 싫어했고 특히 15장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고 하지만, 내가 비스겐슈타인까지 알 바 없지 않은가!!! 과감하게 지른다.)

 

"철학이란 무지한 것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으나, 하찮고 세세한 문제들을 따지며 어떤 지식이 불가능한가에 관한 문제를 놓고 쓸데없이 따지는 논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경향(200쪽)"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철학적 사유의 가치"를 감동적으로 설파한다! 15장까지 다 읽고 나면 이 책을 읽은 것이 마치 대단히 뿌듯한 일을 한 것과 같은 착각까지 생길 정도로 감동적이다! 그 감동은 1-14장까지 충실히 읽은 독자만이 느껴야 할 몫이다!

 

형이상학(혹은 관념론)을 과감히 무시('칸트, 헤겔 따위야 우습지'로 가볍게 무시)하는 러셀의 무례함에 너그러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덧1- 러셀은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여타의 철학자와 다르게) 장수했고, (여타의 철학자와 비슷하게) 결혼도 여러 번 했으며, (놀랍게도) 노벨문학상도 받았다. 사회참여(촌스러운 용어지만)에도 열성적이라 반전운동도 했다. (<철학의 문제들>에서 보이는 태도를 보면) 거만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 같다.

 

덧2- 리뷰의 허접함을 <곁에 두고 읽는 철학 가이드북>을 읽으며 용서하시길.

 

덧3- <철학의 문제들>이 <철학이란 무엇인가>보다 별로였던 점(몇몇 번역 제외하고)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쓸데없이 앞 부분에 "책의 내용 소개"를 넣어두었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또 하나는 중간중간에 '옮긴이의 주석'을 달아놓았는데 없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 같다. 두 가지 모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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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16-12-27 0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가 아닌 알라딘 메인에서 보면 왜 자꾸 문단 앞에 물음표가 붙는 것인가. ㅜㅜ

cyrus 2016-12-27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보라빛우주님이 소개한 리뷰도 잘봤습니다. 이 책을 읽을 때 연보라빛우주님의 글을 참고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연우주 2016-12-28 01:48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리뷰는 이미 나와서... 별로 크게 도움이 안 될 거에요. ^^ Cyrus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용. ^^
 
곁에 두고 읽는 철학 가이드북 - 플라톤부터 곰돌이 푸까지, 지적 수다를 위한 철학 에센스
제임스 M. 러셀 지음, 김우영 옮김 / 휴머니스트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독서모임을 새로 시작하면서 알라딘 사이트에 들어가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책을 한 권 검색해서 책 아래 달린 서평들을 읽는다.  서평을 읽다 보면 이 책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알게 된다. 또 알라딘은 이 책을 산 사람들이 산 다른 책들 역시 링크해두었기 때문에 이 책과 (어쩌면) 성향이 비슷한 다른 책들 역시 볼 수가 있다. 

 

그런 과정들을 거쳐 좋은 책이나 좋은 서평가를 만나기도 한다. 이 책 역시 그 과정에서 만난 책이다. 철학 공부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철학사의 흐름이나 철학자를 요약한 책들을 여러 권 읽었는데 이 책 역시 그런 책 중에 하나인 줄 알았다. 다만, 한 권의 책을 중심으로 작가의 견해를 쭉 제시하는 정도의 차이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읽어보니 유머 책(!)이었다. 올해 내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다. 작가는 철학의 고전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한다. 1부에서 7부까지로 나누어 재기발랄한 제목을 붙여 놓고 나름의 흐름을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한 권의 책을 중심으로 그 책에 대한 작가의 견해를 풀고 말미에, "Speed Read"라는 제목을 붙여 그 책에 대한 작가의 요약을 붙인다. 

 

작가가 쓴 책에 대한 평가도 재미있지만 말미에 붙인 "Speed Read"는 웃지 않을 수가 없는 내용이다. 누가 이토록 재기발랄하면서도 정확하게 서평(?)을 쓸 수 있을까 싶다. 작가의 필력에 놀랄 수밖에 없다. 

 

내가 이 책을 산 이유는 이 책에 첫번째로 실린 책이 바로 러셀의 <철학의 문제들>이었기 때문이다. 본인의 이름도 러셀이라서-두 사람이 관련이 있는 것도 같다. 둘다 영국 사람이고 성이 특이하니까.- 버트란드 러셀의 책을 가장 먼저 실어둔 것인지 아니면 러셀의 이 책이 '철학'의 문제들을 대중에게 쉽게 제시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해서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겠다만.)

 

어쨌든 정말로 동감이 가는 평가라서 이 책에 대한 호감도가 급상승했다. 덕분에 다른 부분들도 발췌독을 했는데 읽은 부분들 중에서 박장대소를 한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이 책의 장점은 책의 흐름은 분명 있지만 한 권, 한 권씩의 평가를 담아두었기에 발췌독 역시 편하고 발췌독을 해도 상관없다는 점이다.

 

요즘 웃을 일이 없었을 많은 분들에게 강력 추천하고 싶다.

 

덧- 이 책에는 '알랭 드 보통'에 대한 평가도 있는데 "Speed Read" 부분이 정말로 웃기다. 읽으면서 박장대소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안 웃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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