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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 열화당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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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은 있지만 안다는 생각이 안 드는 분야가 있다. 몇 권의 책들을 읽어보아도 여전히 잘 모르겠고 그들의 견해에 동의하기도 어렵다. 내게 미술은 그런 분야이다. 미술관을 좋아해서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 등을 여러 번 다녀오기도 했다. 오르세 미술관 전시회나 보테로전, 유명한 국내 화가들의 전시회에 가 보기도 했다.

여전히 미술에 대한 지식은 늘지 않고 내 취향에 맞는 그림만 좋아한다. 솔직히 말하면 전시회의 그림보다는 전시회에서 파는 그림엽서나 마그넷을 더 좋아하기도 한다. 그런 탓에 나는 절대 교양인이 될 수는 없구나 좌절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제목부터 마음에 들었다. (물론 번역하는 과정에서 '다른'이란 말이 붙여졌음을 알았지만 원제 역시 "보는 방식들"이니 크게 걸리지는 않았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목차가 없다. 1-7이라는 숫자가 매겨져 있고 7장이 모두 글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세 편은 이미지만 있다. 네 편도 이미지와 글이 함께 실려 있다. 전체의 페이지수도 190쪽밖에 안 되는데 글마저 적으니 빨리 읽을 수 있다. 물론 함께 실린 이미지를 천천히 감상하며 읽는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1장에서 벤야민의 영향을 받았음을 대 놓고 밝히는 이 책은 이러한 미술작품이 왜 위대할 수밖에 없는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미술작품이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인가에 접근한다.

우리가 왜 원작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는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누드화가 왜 그러한 방식으로 그려졌는지, 유화가 왜 흔히 물건들을 묘사하는지, 유화로 그려진 인물화에 어떠한 배경들이 함께 포함되는지, 그들의 표정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는지에 주목한다. 나아가 유화가 현대의 광고와도 대비될 정도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까지 밝힌다.

이 책을 다 읽은 후, 미술에 관해 알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작가의 이야기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또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음(10쪽)"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현재에 남아 있는 미술작품이 갖는 가치가 단지 고차원적인 예술이 아님을 알게 해 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을 옮기며 서평을 마무리하겠다.

"개인적인 행복의 추구는 만인의 권리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실제의 사회적 환경은 개인으로 하여금 무력하게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그는 그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상태와 현재 그 자신의 상태와의 모순 속에 살고 있다. 그리하여 그 모순과 원인을 충분히 깨닫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적인 투쟁에 참가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의 무력감과 함께 뒤섞여서 백일몽으로 융해되어 버린 선망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야 한다.

왜 광고가 그럴듯해 보이는지에 대한 납득할 만한 대답은 바로 여기에 있다. 광고가 실제로 제공하는 것과 광고가 약속하는 미래 사이의 간극은, 광고를 보고 물건을 사는 사람 자신이 느끼는 현재의 처지와 그가 되고 싶어하는 처지 사이에 벌어진 간극과 일치한다. 그 간극은 하나가 된다. 그러나 실제 행동과 생생한 경험에 의해서 다리가 놓여져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간극은 매혹적인 백일몽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171-172쪽)

덧-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래 전에 읽은 <불손하고 건방지게 미술 읽기>가 생각이 났다. 유명한 화가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삶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그들의 작품을 조금은 삐딱한 시선에서 쓴 책이다. 나는 이런 책들에 끌리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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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정신 - 세상을 바꾼 책에 대한 소문과 진실
강창래 지음 / 알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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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가서 책을 고를 때 서문과 목차를 읽는다. 그 부분이 내 마음을 건드린다면 그 책을 구매한다. 이제는 오프라인서점보다는 온라인서점을 더 많이 이용하지만 책을 고를 때의 기준은 변함이 없다.

 

[책의 정신]은 내가 고른 책이 아니라 독서모임에서 선정된 책이지만 위의 방법으로 읽을 만한 책인지를 판단했을 때 충분히 가치가 있는 책이다. ‘들어가는 말에는 앞으로 저자가 이야기할 내용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다.

 

근래에 미국인이 쓴 (번역된) 책을 몇 권 읽었는데 모두 서문이 명료했다.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분명하게 밝히고 시작하는 그들의 전개방식(?)이 마음에 들었었다.

 

이 책 역시 서문부터 기대를 갖게 했다. 내 기대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채워졌다. 책은 다섯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포르노소설과 프랑스대혁명”, “아무도 읽지 않은 책”, “고전을 리모델링해드립니다”, “객관성의 칼날에 상처 입은 인간에 대한 오해”, “책의 학살, 그 전통의 폭발. 흥미로운 제목이다. 흥미로운 제목에 비해 내용이 부실했을 경우에 우리는 낚였다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이 책은 분명 낚는책은 아니다. 제목만큼 흥미로운 내용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야기 포르노소설과 프랑스대혁명에서는 혁명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과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 억압되는 과정이 있었음을 제시한다. (내 생각에는 저자가 의미하는 포르노소설과 우리가 소위 야동이라고 부르는 영상물과는 약간의 괴리가 있다고 본다. 저자가 이야기한 포르노소설은 사회적 배경을 가진 이야기인데 비해 우리가 아는 야동은 행위에 몰두하기 때문에 배경이 삭제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 같은 기본적인 욕망을 왜 억압하게 되었는지의 과정 역시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으로 대변되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두 번째 이야기 아무도 읽지 않은 책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는 조금 다른 갈릴레오뉴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동설의 시작은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임에도 교황청에서 쉽게 출판 허락을 받고 훌륭한 책으로 인정도 받았다. 오히려 그 영향을 받은 갈릴레오의 대화라는 책이 논란을 일으키고 종교재판을 받게 된다. 이유는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이론을 정면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데에 비해 갈릴레오는 천동설을 믿는 사람을 바보로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당대에 지동설이 왜 신성모독으로 인식되었는지는 책에 자세히 나온다.)

 

또한 종교 재판을 받고 자신의 이론을 철회했던 갈릴레오는 기억되지만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조르다노 브루노는 잊혀졌다는 슬픈 사실 역시 알려준다. 갈릴레오가 유명해진 이유는 그가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거나 혼자서 그 이론을 주장했기 때문이 아닌 종교재판을 받았기 때문에 계몽주의자들이 좋은 선전 재료로 활용할 수 있었다는 역사적 맥락도 짚어준다.

 

뉴턴이 쓴 프린키피아는 어렵기 때문에 거의 읽히지는 않은 책이며 논리적인 오류도 많았다. 또한 뉴턴은 과학자라기보다는 연금술사에 가까웠다. 그런 그가 유명해지게 되는 맥락에는 뉴턴의 만유인력이 계급사회가 정당한 구조가 아님을 암시하게 되는 또 하나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후대의 계몽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사람이 뛰어난 사람이라기보다는 역사적으로 필요한 맥락들과 만나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들의 이론이 오류 없이 완벽한 이론이기 때문이 아니라 후대에 또 다른 생각이 싹 트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임을 알려준다. 이런 저자의 입장에 공감했다. 역사에 남은 인물들이 가진 빼어남에 주목하기보다는 그들이 주목받을 수 있었던 당대의 맥락이 무엇인지를 짚어내야 한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승자가 아닌 패자를 헤아릴 수 있을 때 우리 사회가 더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같은 이야기는 세 번째 이야기 고전을 리모델링해드립니다에도 이어진다. 우리가 훌륭하다고 믿는 소크라테스공자의 진면목을 짚어낸다. 소크라테스는 독재정권을 지지하는 인물이었으며 그를 고발했던 인물은 민주투사였던 아니토스였다. 아테네보다는 스파르타를 지향했던 소크라테스가 재판에 끌려나오게 된 시기는 민주정권이 들어섰던 시기였으며 그의 죄목에는 평등권에 대한 부정과 독재자에 대한 옹호가 있음을 밝힌다.

 

공자의 논어역시 상식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공자가 유명해지게 된 배경에는 한무제가 중앙집권적 국가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유교를 국교로 채택했고 공자의 제자였던 자공에서 맹자로 이어지는 공자의 성인화 작업이 있었을 뿐이다.(201)”

 

오래 된 고전들은 원래의 것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 어쩌면 그것들은 오랜 세월 동안 시련을 견디고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때마다 주류 이데올로기를 가진 편집자의 의도에 맞게 적당히 변경되어 오늘에 이른 것일지 모른다.(176)”

 

전체주의자인 소크라테스를 읽게 만들면 민주주의자인 페리클레스나 솔론을 읽을 시간과 여유가 줄어들고, 엘리트주의자인 공자를 읽게 하면 평화주의자이며 하층민의 대변자였던 묵자를 읽을 시간과 여유가 없다.(177-180)”

 

, 라는 질문을 던져보는 일은 삶에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고전이라고 믿는 책들을 대할 때도 그래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저자를 통해 깨닫는다. ‘유명함에 주목하기보다는 유명할 수 있었던 이유가 왜일까를 질문할 때에 그 이면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하기는 이데올로기에 속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니까.

 

적용하자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자본주의가 인류의 시작과 더불어 발행한 것이 아닌데 자본주의를 넘어서지 못할 것처럼 믿게 만드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또한 물어볼 필요가 있겠다.

 

네 번째 이야기 객관성의 칼날에 상처 입은 인간에 대한 오해는 인간이 본성을 타고나는가, 아니면 양육으로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최근의 동향은 타고난다 쪽으로 더 무게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지만 이 또한 이데올로기의 영향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음을 저자는 제시한다.

 

본성과 양육을 다루는 책들은 좀더 조심스럽게,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스티븐 제이 굴드(1941~2002)의 말대로 과학에 대한 지식 역시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 때문이다. 심각한 경우 이 논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상대방에 대해 어떤 주장을 전개했는지를 자세히 따라가 보면 잘못된 인용, 왜곡된 인용, 의도적인 엉터리 해석, 잘못된 해석 등이 너무 많(본성과 양육, 142)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221-222)”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선 완전히 객관적인 것은 없다는 점을 인정하자. 어떤 논픽션에도(과학이라는 것에도) 일정 정도의 픽션(저자의 주관이)이 더해진다고 봐야 한다. 객관적이란 주관성의 페르소나이기도 하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인간의 감각은 사실이 아니라 해석을 인지할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좋은 책이란 명확한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을 던짐으로써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239)”

 

저자는 본성과 양육의 역사를 되짚으며 각 관점의 문제점을 살펴본다. “본성을 극단적으로 옹호하는 이론이 우생학, 사회생물학, 유전공학 그리고 진화심리학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살피고 그에 대한 문제점을 이야기한다. “양육 쪽으로 치우친 이론이 행동심리학으로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려고 했지만 이 또한 문제점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이해할 때 무엇이 맞다는 결론은 내릴 수 없다. 인간은 유전에 의해 타고나기도 하지만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한다. 둘 중 하나를 가지고 설명하려고 들 때 데이터는 왜곡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이야기 책의 학살, 그 전통의 폭발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라는 책에 관한 이야기이다. 책이 학살되었던 사건들을 통해 책의 의미를 생각해보도록 하고 있다.

 

이 책이 내게 의미 있었던 이유는 비판적 사고를 권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짝이는 것을 동경하지만 반짝이는 것의 이면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일에는 게으르다. 왜 반짝일까, 반짝이게 되는 과정에서 무엇이 희생되었을까를 생각해 본다면 단지 반짝임을 동경하지는 않게 될 것 같다. 당신과 같이 그 이면을 짚어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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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자본주의 - 자본은 감정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에바 일루즈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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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내용은 '부제'를 읽으면 명확해진다. '자본은 감정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자본주의가 감정을 어떤 방식으로 이용(?)해 왔으며 (현재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렵다. 첫번째는 번역자의 놀랍도록 어색한 번역이다. 영어의 경우, 이젠 자연스럽게 번역을 하는 사람들이 꽤 늘었다. 불행히도 이 책은 자연스러운 번역과는 거리가 멀다. 번역자의 국어 실력 덕분에 독자가 이 책을 더 어렵게 느끼게 되었다.

 

다른 이유는, 저자가 (사회학, 철학, 정신분석학 등의) 이론에 대한 자세한 설명 없이 '이 정도의 이론은 모두 알지?'라는 전제 하에 쓰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 속에서 이해해야 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한국의 상황과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교양서보다는 학술서에 가깝다.

 

하지만 저자는 꽤 명확한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논증하기 때문에 첫 장만 견디면 뒤는 더 이해하기가 쉽다. 물론 내용이 뒤로 갈수록 쉬워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책은 총 3장의 챕터로 되어 있다.

 

저자는 '감정'을 "지극히 주관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고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 "행동의 한 측면, 곧 "에너지가 실린 측면"으로 정의"한다. "극도로 압축되어 있는 문화 의미들과 사회관계들"이며 "심리단위"이기도 하지만 "문화 단위이자 사회 단위"라고 이야기한다. "감정을 통해서 인간됨의 문화 규정들을 구현하게 되기" 때문에 감정을 사회학으로 끌어들여 논의할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첫 장 "호모 센티멘탈리스의 탄생"에서는 미국의 심리학자들이 감정을 경제활동의 영역과 결합하여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증대시킬 수 있었던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엘튼 마요'의 실험은 '치료면담'과 거의 흡사한 '면담법'이 실제로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증대시켰음을 증명했다. 이 과정을 통해 노동자들의 생산성이 노동자 자신의 삶과 관련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노동자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 그들의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방식임을 깨달았고 그로 인해 생산성을 증대시킬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심리학의 치료 내러티브는 자연스럽게 기업에 수용되었다. 기업은 '소통'을 통한 리더십을 강조하게 되었고 그 안에는 '인정 내러티브'가 작동한다. 이러한 방식은 단지 기업에서 그치지 않고 "노동관계와 결혼관계에 널리 퍼지게 되는데"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을 인정해야 한다는 새로운 필요를 포함하고 수용하고 있다".

 

노동자의 삶은 노동현장에서만 이루어지지 않고 실제로는 가정생활에서 시작된다. 일상적인 결혼이나 가족관계가 노동자가 노동현장에서 일을 할 때 영향을 미침을 알고 치료언어를 통해 노동자를 기업에 적합하도록 치료(?)한다. 그리고 그러한 치료가 가정 내에도 영향을 미치다는 의미이다. 노동자가 스트레스 받지 않는 환경, 긍정적 감정을 형성하기 위해 소통하고 인정받아야 하며 하기 때문에 '감정'은 더 이상 '노동자 자신의 감정'이 아니며 기업의 성과를 좌지우지하는 '감정'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에서 '감정'이 중요해졌다.

 

두 번째 장 "고통, 감정, 장, 감정자본"에서는 1960년대 이후부터 심리학이 대중문화 속에 깊숙이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아란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존재로 바라보았던 심리학자들을 통해 나아가 자아실현과 건강이 같은 것이라고 바라보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를 실현하지 못한 사람은 보살핌과 치료학이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치료 내러티브는 자기계발 내러티브와 만나며 결국 고통 내러티브와도 만나게 된다. 자아실현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를 더욱 계발하는 사람은 결국은 끊임없는 노력의 반복을 통해 고통과도 만날 수밖에 없기 떄문이다.

 

그래서 "19세기 자서전의 유형이 "가난뱅이가 부자가 되었다"라는 즐거리였다면 오늘날의 자서전은 부와 명예를 누리는 중에도 닥쳐올 수 있는 정신적 번민을 다룬다." '오프라 윈프리의 자서전'이 대표적인데 아무리 유명하게 살아도 자신 안의 번민은 있으며 그 안의 번민들과 끊임없이 싸울 수 밖에 없음을 이야기한다. 결국은 "미완의 자아가 등장하는 전기, 고통이 정체성의 구성요소가 되는 전기"가 등장한다.

 

이런 치료 담론은 페미니즘과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재향군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는 미국의 제약회사와 DSM(아마도 정신질환진단)가 정신적인 고통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주체로 등장하게 한다. 폭넓은 정신질환진단을 통해 정신과용 의약품을 처방받게 하여 경제적인 이득을 얻게 되었다.

 

정상(자아실현을 추구하는 존재)과 비정상(자아실현을 추구하지 못하는 존재)로 나눔으로써 비정상은 정상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런 노력이 자기계발로 이어지게 된다. 노력만으로 가능하지 않다면 치료를 받고 처방약을 먹어서라도 정상이 되어야 한다.

 

마지막 장 "로맨틱한 웹"에서는 온라인 데이팅이 왜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한다. 온라인 데이팅을 하기 위해 온라인 상에 올리는 정보는 사람을 하나하나의 설명되는 언어로 분절시킨다. 온라인 데이팅에서 우리는 한 명의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에 올려진 정보(언어)로 만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 쓰는 사람은 '부풀리고 최상을 적게 된다.'

 

반대로 읽는 사람은 부풀려진 정보를 통해 더 나은 상대를 기대하고 되고 오프라인에서 상대를 만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온라인 데이팅이 오프라인에서 실현될 때 잘 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리고 너무나도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에 대한 정보가 '온라인'에 올려지기 때문에 이 또한 일종의 '시장'을 형성하게 되기 때문에 데이트를 할 때조차 더 나은 상품을 구매해야 할 것 같은 심정이 생기게 되기도 한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더 나은 사람을 만나야 할 것 같기 때문에 더 나은 상대를 원하게 되고 쉽게 만족할 수가 없어진다.

 

하지만 정말 인간은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만나야 하며 단지 언어로 표현되는 상대보다는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상대에 사랑을 빠질 수도 있다. 그러니까 "얼굴 대 얼굴의 만남은 속성들 일체로 환원될 수 없는 "전인적" 만남이다. 이런 만남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낱낱의 속성이 아니라 속성들 사이의 상호관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로맨틱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인지"가 아닌 "감지"를 통해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감정' 또한 '자본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예전처럼 자본주의 체체를 벗어나 비판할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 내부에서 비판하는 일을 멈출 수는 없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이데올로기란 우리로 하여금 모순들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게 해 주는 어떤 것인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듯하기" 때문에 바로 그 지점에서 (비판을 혹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연구를) 시작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

 

책을 읽으며 감탄을 하게 만드는 사유였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개인적인 감정'마저도 활용하고 있구나 깨달으며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 자본주의에서만 살아본 나는 자본주의의 대안을 구체적으로 그릴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비판하고 그 모순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삶을 포기할 수 없을 뿐이다. 저자의 말처럼 이데올로기가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될 때 그 틈 사이에서 또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아직은 그 구체적인 모델을 밝힐 수는 없더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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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작가들은 어떻게 글을 쓰는가
루이즈 디살보 지음, 정지현 옮김 / 예문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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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Slow Writing>이다. 위 제목은 출판사가 원제를 가장 '나쁘게' 번역한 예이다. <느린 글쓰기>라는 제목을 "작가들은 어떻게 글을 쓰는가"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으로 번역한 부분도 문제지만, 최악은 "최고의"라는 표현이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최고의"라는 단어에 연연하는지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번역해야 팔린다고 생각했을까? 그리고 실제로 이런 제목을 붙여서 책을 의도대로 많이 팔았을지 궁금하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책을 소개하는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분명 그 기사에는 <느린 글쓰기>라는 원제가 언급되어 있었다. 원제에 끌렸다. 기사를 읽고 책의 내용이 지금의 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내 꿈은 오랫동안 작가였다. 대학을 진학한 이후의 삶이 나를 '글쓰기' 같이 고상한(!) 일에 하기에 앞서 '생존'에 몰두하기 했기에 꿈은 꽤 오래 이루어지지 못했다. "꿈은 이루어진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은 내겐 마치 희망고문처럼 느껴진다. 사실은 꿈이 잘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기에 주문을 외우는 심정으로 그렇게 얘기하는 것처럼. 이루어지기보단 포기하는 쪽이 빠르다고 생각했었고 한동안 실제로 포기했었다.

 

하지만 '생존'만으론 삶이 너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십여 년의 시간이 흘렀기에 이제 단지 '생존'에 목메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쓰기로 돌아가야 한다고 올해에서야 다짐을 했다. 어떻게 (쓰기로) 돌아가야 하는지, 너무 늦지는 않았는지 불안했었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을 만났다.

 

이 책은 느리지만 꾸준히 써 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자의 말처럼 "수십 년간 글쓰기 과정과 진짜 작가들의 작업 습관을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했". 그러한 과정을 통해 모든 글쓰기 과정이 "느린 글쓰기"임을 깨달았기에 "느린 글쓰기"가 무엇인지, 어떻게 책을 완성해가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저자가 미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의 출판 상황과는 다른 이야기도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쓸 때에 작가가 될 수 있다는 맥락은 세계 어디에서든 같은 것 같다. 유명한 작가들의 일화를 들어, 글을 쓸 때 겪는 어려움은 평범한 나만 겪는 어려움은 아니라는 위로를 안겨 준다. 글쓴이 역시 작가이기 때문에 실제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얻은 정보도 제공한다.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작가가 되는 법을 스스로 배워야 하"며 "아무도 도와줄 수 없으며 오로지 혼자 자신의 길, 즉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116-117)"고 말한다. 그리고 "매일 연습하라"고 권한다. 이라 글래스의 말을 인용하여 "너무 일찍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글쓰기에 관한 책을 열 권쯤 소장하고 있고 스무 권 이상 읽었다. 그동안 읽은 책과 비교해 볼 때, 이 책이 획기적인 깨달음을 더해주었다고는 말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나이를 많이(!) 먹었기 때문에 빨리 써야 할 것 같은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아는, 유명하고도 훌륭한 작가들이 ()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책을 완성했음을 배웠고 그들도 나처럼 쓰기 싫고 쓸 수 없을 것 같은 수많은 시간이 있었음을 배웠다. 그래서 이 책의 원제처럼 "느린 글쓰기"를 지향해도 좋겠다고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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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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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몇 달 전 나는 한 분이 돌아가시는 과정과 장례식을 치르는 과정을 가까이서 경험했다. 그 일을 겪으면서 한때 자살을 생각해 보았음에도, 정작 '죽음'을 '추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구체적'으로 와닿는 죽음은 '추상적'으로 대하던 죽음보다 복잡했고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불필요한 과정들도 많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죽음을 준비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 책을 만났다.

저자는 인도계 미국인 의사다. 의사로서 현대 의학이 죽음을 그동안 '일종의 의학적 경험'으로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인식하지 못했던 면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의학적인 해명이나 논리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게 아닌 의사로서 본인이 경험한 사례들 중심으로 풀어내고 있다. 때문에 읽기도 쉽고 이해하기도 어렵지 않다. 더욱이 꽤 유려한 문장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를 가지고 있다. 이는 비단 저자의 탁월한 글쓰기 능력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번역자의 자연스러운 번역도 한 몫을 하지 않았나 싶어 번역자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물론 의역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출판사가 붙인 제목과 달리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기보단 저자가 서문에 밝힌 대로, "죽음에 이르는 경험을 정직하게 살펴보고 죽음의 불가피성을 조망"하는 입장에 가깝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죽어가는' 과정 속에서도 '인간답게' 죽어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저자 나름의 해석에 가깝다. 원제인 <Being Mortal>에 가까운 이야기다. 그러니 만약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해답을 찾는다면 이 책이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책은 8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고 사람이 "독립적인 삶"을 살 수 없어지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죽음은 생물학적으로 인간이 경험하는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에 인간의 신체는 성장을 끝마치면 노화 즉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체에 기능적인 문제가 생기고 점점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이로 인해 "무너지고 의존"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의 필요한 "도움"은 무엇이며 "더 나은 삶"이란 무엇인지를 묻는다.

더 이상 고쳐질 수 있는 병이 아닌데도(혹은 고쳐진다고 해도 다른 신체에 문제가 생겨 또다른 치료를 받아야 하거나 또다른 부작용을 경험한다고 해도) 계속 치료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수술을 받으며 더 오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좋은지, 죽음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종말임을 받아들이고 현재의 삶의 질을 높이는 곳에 관심을 두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맞는 것인지. 저자는 후자의 삶이 "더 나은 삶"이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려놓고" 죽음에 관한 "어려운 대화"를 통해 끝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꼭 저자의 말을 인용하지 않아도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사고사로 갑자기 죽게 되는 게 아니라면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통해 죽음에 대한 생각의 폭을 조금이나마 넓힐 수 있었다.

덧붙임- 최근 들어 한국에서도 '잘 죽는 법'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지난 7일 ​서울시설공단에서 주최한 '생사 문화의 날'이란 행사가 열렸다. 장례에 관한 행사였는데 장례 문화에도 어떠한 대안이 있는지에 관해 논의되었다. (http://omn.kr/faui)

또한 말기암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호스피스 의료'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올해 7월부터는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는 환자들이 의료보험의 혜택도 볼 수 있게 되었다. (호스피스란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한 말기암 환자들에게 '치료'를 하지 않는 대신 '통증이나 증상 완화'만을 제공하는 의료를 말한다.​ 말기암 환자들이 경험하게 되는 극심한 통증을 벗어나게 해 주고 삶을 연장시키기보단 현재 삶의 질을 높여주는데 의의를 두고 있다.곧 닥쳐올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준비하고 죽기 전까지 인간다운 삶을 누리게 해 주는데 목적을 둔다. 실제로 호스피스 의료를 제공받은 사람들이 더 편안하게 살다가 죽는다는 통계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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