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믈리에르 1 - 메시지
조 아라키, 카츠노리 마츠이, 켄이치 호리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중이미지보기중이미지보기중이미지보기

중이미지보기중이미지보기

신의 물방울 1~10권 발매, 연재중 vs 소믈리에르 1~3권 발매 연재중 


와인을 소재로 한 만화가 또 나왔다. 와인에 대한 붐이 한창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 중 <신의 물방울>은 가히 와인붐을 주도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바로 그 <신의 물방울>과 <소믈리에르>를 비교해보려고 한다. 

우선 두 만화는 이야기의 뼈대부터 다르다. <신의 물방울>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와인 평론가의 아들이지만 정작 와인을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던 아들(칸자키 스즈쿠)이 아버지의 유언으로 또다른 와인 평론가(토마네 잇세-배용준이 모델이라는)와 12병의 와인을 찾아내는 대결 구도이다. 유언에 담긴 와인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만으로 찾아내야하기 때문에 매병을 찾는 과정이 길게 나와 있다. 또한 더 많은 와인을 맞추는 사람이 (아버지의) 집과 와인 셀러를 차지할 수 있다는 갈등 구조가 이야기 전개의 긴장감을 부여한다. 

그에 비해 <소믈리에르>는 부모 잃은 이츠키 카나가 '존 스미스'라는 사람의 원조로 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이 살던 포도원이 있는 시설로 돌아와 아이들과 함께 와인을 만들고자 하나 존 스미스의 요청에 따라 도쿄의 한 레스토랑에서 일하게 된다. 옴니버스식 구성을 취하며 매회마다 여러 사연을 가진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래서 <신의 물방울>은 둘 사이의 대결이 중요하다. 따라서 이미 정해진 중심인물들이 어떻게 와인을 찾아가느냐의 내용이 주축을 이룬다. 그러나 <소믈리에르>는 카나가 근무하는 레스토랑 사람들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 매회마다 등장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흐름을 따라가면 된다. 

또한 제목에서 드러나 있듯 <신의 물방울>은 와인이, <소믈리에르>는 인물이 중심이다. <신의 물방울>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와인에 대한 고도의(?) 은유적인 표현들이 여러 번 나온다. 마트에 와인을 사러 가면 친절하게 설명되어 붙어있는 무슨 향이 어쩌고 무슨 맛이 어쩌고 하는 수준을 넘어 아름다운 여인의 뒷모습이 어떻고, 고향집의 향수가 어떻고 하는 공감이 안 되는 말들이다. 그에 비해 <소믈리에르>는 매회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연과 비슷한 와인을 주인공이 설명한다. 그럼으로써 인물 간의 갈등을 해결한다거나 위기를 모면케 해준다. 정작 와인에 대한 평가는 간단하다. "맛있다". 

마지막으로, 와인을 대하는 마인드가 다르다. <신의 물방울>은 최고의 와인을 찾아가는 과정이기에 와인은 찬사를 받아야 할 훌륭한 작품이며 그야말로 '신의 물방울'이다. <소믈리에르>의 와인은 와인만큼 와인을 함께 마시는 사람이 중요하다. 그래서 와인 자체보다는 와인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도구의 역할을 함을 더 강조한다. 그래서 <신의 물방울>이 여러 차례 디컨팅 과정을 보여주며 와인의 멋스러움을 연출하는데 비해 <소믈리에르>는 와인을 열어두고 그냥 일정 시간을 기다린다. 그 과정에서 인물들의 긴장이 완화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신의 물방울>은 한국에 번역되면서 와인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달라지게 했다. 와인은 그야말로 '신의 물방울'이기 때문에 와인이 아닌 다른 술은 좀 시시해졌다. 마침 와인 마시기 붐이 번지면서 <신의 물방울>은 일종의 경전(?)이 되었고 그 안에 소개된 와인들은 불티나게 팔리며 와인바에 가서 <신의 물방울>에서처럼 디컨팅을 해 달라는 요구도 많아졌다고 한다. 사실 디컨팅이 필요없는 와인들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작년 11월에서야 출간된 <소믈리에르>가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아직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신의 물방울>보다 <소믈리에르>가 훨씬 나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의 물방울>이 와인을 '술의 신'에 등극시켰다면 <소믈리에르>는 그저 누군가와 공감하기 위해 마시는 수단으로 재평가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와인을 잘 모르면서 와인을 좋아하는 겉멋 든 인간에 불과하지만 역시 술은 그냥 술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여타의 술과는 다른 와인만의 매력은 있다. 같은 품종이라도 지역과 풍토에 따라 다른 와인이 만들어지며, 어떻게 블렌딩하느냐에 따라, 어느 온도에 마시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각각의 개성이 있는 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와인은 정복할 것이 너무나도 많아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을 것 같은 무궁무진한 세계가 된다. 

그러나 역시 술은 그냥 술이다. 함께 하는 사람들과의 끈끈함이 있다면 그저 좋은 술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 해도 술을 '신'의 경지에까지 등극시키며 고가의 와인만이 '진정한 와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건 아무래도 억울하다. 나 같은 소시민이 마실 수 있는 저가의 와인에서도 와인의 매력은 충분히 빛을 발하며 그건 역시 술만이 줄 수 있는 관계 속의 어울림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걸 알려주는 <소믈리에르>가 훨씬 나중에 출간되었지만 <신의 물방울>만큼 사랑받는 만화가 되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 구미를 당기는 소설이 있었으니, 80년생이 썼다는데 유명 인터넷 서점 추천도서에 올라가서 내내 내려오지 않는 바로 이 '달려라, 아비'였다. 도대체 어떤 작가 그리고 소설이기에 이리도 주목을 받는 걸까. 내내 궁금했었다. 그러면서도 과연 80년생이 얼마나 좋은 소설을 썼을까 하는 의문어린 시선이 있었다. (나이에 대한 이 지독한 편견이여~!)

며칠 전 우연히 구립 도서관에서 이 소설집을 발견했을 때 주저하지 않고 빌려 읽어내려갔다. 그러나 나는 첫번째 페이지에서부터 과연 80년생이, 하는 그 시선을 버려야 했다. 정말 잘 쓴 '소설들'인 거다. 이런! 낭패다.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질투인지, 동경인지 모를. 차마 어떻게든 설명해 낼 수 없는. 그리고 그저 머리를 스치듯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이만 먹는 사이 사람들은 성장하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사실 김애란의 소설이 뛰어나다고 말하는 이유는 '동서고금을 막론할 위대한 가치를 담고 있는 명작'이어서가 아니다. 그녀는 그녀가 살고 있는 동시대를 그녀만의 시선과 문체로 해석해내고 있으며 이는 그녀가 살고 있는 이십대 중후반기의 보편적인 세계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한국 그리고 서울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이십대 중후반 소시민적인 노동자의 삶의 현주소를 이리도 정확하게 밝혀낼 수 있느냔 말이다. 농을 치면서 하지만 또 그렇게 진실할 수 있냔 말이다. 마치 때론 소설 안에서 거울을 보듯 이렇게 똑닮아 있을 수 있냔 말이다.

뭐 하나 버릴 게 없는 김애란의 소설을 평단에서 주목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툭 나타난 김애란에게 80년생과 그 즈음의 전후 세대들은 감사해야 할 것이다. 현실 사회를 살아가는 고독과 우울함과 답답함을 소설로나마 공감하고 치유받음을 수 있음에. 그리고 그 세대를 형상화하여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남겨줌을 말이다.

그녀보다 조금 먼저 태어난 나는 그녀가 그린 소설 세계 속에서 위안받으며 질투하며 웃으며 울고 싶다. 그리고 나도 그녀가 작가의 말에서 밝혔듯 "소설 안의 어떤 정직이 (앞으로도 계속) 그녀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언제고, 곧 다시 볼 수 있도록".

덧붙임- 김애란에 대해 이렇게 오버된 반응을 하는 건 몇몇 작품들 속에서 거울을 보는 듯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일 거다. 타자화되지 않는 자아화...의 비극이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나 NANA 1
야자와 아이 지음, 박세라 옮김 / 학산문화사(만화) / 200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나나>는 아주 간단히 말하면, 동명이인인 두 명의 나나의 우정과 사랑 이야기다. 조금 더 길게 말하면 <블랙스톤즈>라는 보컬의 리드싱어인 '오사카 나나'와 특별한 직업도 없이 알바로 돈을 벌며 남자를 사랑하는 일을 인생의 목표로 여기는 '고마츠 나나'의 이야기다.

이, <나나>'라는 만화가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며 영화로, 애니메이션으로, 게임으로, 흥행붐을 일으키는 이유를 나는 모른다. 어쩌면 <나나>가 가지고 있는 트랜디한 매력 탓일지도 모르겠고, 여타의 순정만화와는 다르게 서사 구조가 탄탄하면서도 만화다운 점을 잃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오사카 나나'가 보여주는 화려한 연예계의 세계를 '고마츠 나나'라는 평범한 존재를 통해 대리만족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나나>를 나를 미치게 하는 몇 가지 코드 중 하나로 선정한 이유는 <나나>에 등장하는 인간군상 때문이다.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진 여러 명의 등장인물들의 공통점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는 거다. 그들의 외모는 완벽하고 화려할 수 있어도 그들의 내면은 상처투성이의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다양한 상처의 일면들을 보여주며 그런 캐릭터들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방법들을 그려낸다. 공감 200%인 대사들은 '야자와 아이(혹은 스토리 작가)'가 인생을 참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나나>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같으면서도 그렇게 또 현실과 닮아 있다. 그래서 나는 등장인물과 종종 동화가 되어 얼른 그 인물이 상처로부터 벗어나 조금 더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열망으로 가득하게 된다.

그러나 '야자와 아이'는 좀처럼 그럴 생각이 없나 보다. 그들, 등장인물들은 여전히 불안정하며 상처투성이이며 외로워하고 상처를 넘어서는 걸 두려워하며 그래서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너무나도 행복을 열망하지만 어떤 게 행복인지조차 잘 몰라서 감히 행복의 기운을 찾아내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런 게 오히려 더 '삶'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서서히 관계를 맺으며 성장하는 모습들도 보이지만, 그건 조금씩 더디게 진행이 된다. 삶의 과정처럼.)

묘하게도 너무나도 만화적인 인물들이 등장해 만화적인 상상력들을 풀어내며 만화적인 상황들을 만들어가는데도, 동시에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한 구석을 풀어헤쳐보이는 듯한 이 만화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쩌면, 무수한 <나나>의 팬들도 나와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과 나는 같은 면을 보고 이리도 열광하는지도 모르겠다.

서서히 <나나>도 끝을 향해 나가고 있다. -연재물은 언제나 그러하듯 상업성과 관련이 있기에 좀처럼 끝내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수많은 팬들이 있는데 어찌 그리 쉽사리 끝낼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어쩐지 끝은 해피엔딩은 아닐 것 같다. 중간중간 비극을 암시하는 문구들을 떠올려보면.

하지만 나는 그 비극의 얼굴도 정면으로 바라보리라. 그게 삶의 한 모습이라면 나도 이제 당당하게 맞서 보리라. '꿈'을 꾼다는 건 비현실적인 판타지를 말하는 게 아니니까. '꿈'을 꾼다는 건 역시 현실을 벗어날 수는 없는 거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지음, 정현종 옮김 / 물병자리 / 200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관계에 대한, 믿음에 대한 총체적 난국에 직면해 있다. 무식하게도 믿음은 실천이라고 생각했고 실천은 행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배운대로 믿었고 믿은 대로 행동했다. 그러나 그 결과 나는 지쳐버렸고 총체적 난국에 진면하게 된 것이다.

과연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람은 이기적인 자아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질문을 절망으로 가득 채워놓았을 즈음 이 책을 만났다. 우연이란 결국 필연일 수밖에 없는 게 읽으면서 나는 지금 이 책을 너무 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결국은 '자기 포기'가 사랑을 아름다움을 완성한다고 말한다. 사랑은, 아름다움은 있다고 말한다. 관찰자인 내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존재하는 사물을 그저 존재함으로 바라볼 때 가능하다고 말한다.

충분히 동의하지만 실천을 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얻은 것은 절망이 아니다. 다시금 희망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제 희망할 수 있음은 내부에 있지 않고 외부에 있음도 말이다. 사랑은 의미있다. 아름답기 때문이다.

오늘 이 책을 알게 한 인연에 감사한다.

덧붙임- 리뷰를 검색해보니 어떤 분께서 번역이 엉망이라고 지적하셨던데, 반대로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이만한 번역은 오랜만에 본다는 생각을 했다. 문학을 한다는 게 역시 뛰어난 재능이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또 역시 문학을 하는 사람이 번역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한 문장을 번역할 때 이토록 정성이 들어간, 어휘가 풍부한, 한국말다운 번역은 쉽게 볼 수 없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왜 번역이 엉망이라고 하셨을까. 그게 궁금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력 삐에로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0
이사카 고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하루가 이층에서 떨어져 내렸다."

라는 말을 우리 말로 번역하면 "봄이 이층에서 떨어져 내렸다"가 된다. 당연히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저자가 소설에 썼듯이 '억지로 멋을 부린 말투라거나 어울리지 않는 비유"라고 말할 법하다. 그러나 하루는, 봄은 '나'의 동생이었을 뿐이다.

첫머리부터 흥미를 자극하는 말로 시작된 이 소설은 소제목을 중심으로 중구난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앞부분을 읽을 때에는 그런 방식이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기는 하지만 어쩐지 난삽하지 않냐는 생각을 했었다. 갑자기 과거로 갔다가 현재로 돌아왔다가 이 이야기를 했다가 저 이야기를 했다가 하는 지나치게 일관적이지 않아 보였던 소제목 속 이야기들은 끝으로 갈수록 하나로 모아져 딱딱 들어맞으면서 정리가 된다. 그러니 480여 페이지나 되는 이 소설이 결코 지루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야기의 전개방식도 흥미로왔지만 내용 역시 만만치 않다. 누군가 벽에 낙서를 하면 꼭 그 지역 근처에서는 방화가 일어난다. 과연 벽의 낙서와 방화는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또 왜 낙서를 하고 방화를 저지르는 것일까. 를 밝혀가는 과정이 마치 추리소설을 연상하게 한다. 때문에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좀처럼 중간에 책을 내려놓을 수 없는 긴박감을 준다.

뿐이 아니다. 우리나라 드라마 소재로 가장 많이 쓰이는 한 집안의 내력과 한 사람의 출생에 관한, 자칫 진부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이처럼 딱 들어맞는 구성과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들로 채우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인류의 탄생사인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의 적자생존법칙에서부터 피카소에서 DNA 설계도를 이루는 염기세포에 대한 이야기까지 망라한다. 그러나 그 어느 소재도 과잉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고 하나의 이야기를 일관성있게 하는 중요한 소재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주인공을 바라보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에도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첫머리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똑같이 써서 시로 말하자면 수미상관법을 이용한 표현방식에도 경탄을 한다.  

쓰고 보니 마치 추상적인 겉핥기 같은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 소설에 깊이 감명받았다. 향후 몇 년 간 동안 읽은 소설 중 이 소설을 뛰어넘는 소설은 없었다고 단정지어 말할 정도이다. 그동안 알만한 일본 소설가의 소설은 대강 읽었지만 결론은 늘 하나였다. 일본 소설은 나와 정신 세계가 맞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이제 그 말을 수정할 때가 되었다.

일본 소설 중에서도, 일본 소설가 중에서도 탄성을 내지를만한 소설이 있고 소설가가 있다고 말이다.

내가 이 소설을 뛰어나다고 말하는 건 소위 문학에 필요하다고 말하는 쾌락과 감동이 모두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재미도 있으면서 감동도 주는 소설을 쓰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거기에다가 독자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구성이면서도 이야기 전체의 통일성과 완결성을 갖기도 쉽지 않다. 또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확실하면서도 유치하거나 치졸한 방식으로 말하지 않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 모두를 갖추었다.

쓸수록 무슨 암호 같다. 최대한 정보를 노출하지 않고 훌륭한 소설이라고 추천하는 일은 역시 쉽지가 않구나. 단언컨대 이 소설은 향후 몇 년을 통틀어 가장 추천하고 싶은 소설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주어본 적 없는 별 5개를 이 소설에 주었다. 이런 식의 주례사식 찬탄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소설은 충분히 찬탄할 만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