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어가 사람이라면




"만약 상어가 사람이라면 상어가 작은 물고기들에게 더 잘해줄까요?" 주인집 여자 아이가 K씨에게 물어보았다. "물론이지"라고 그는 대답했다. "상어라 사람이라면 작은 물고기들을 위해, 식물성 먹이는 물론이고 동물성 먹이까지 들어 있는 커다란 통을 바다 속에 만들어주겠지. 상어들은 통 속의 물을 자주 갈아줄 것이고, 모든 위생 조치를 취하겠지. 가령 조그만 물고기의 지느러미에 상처가 나면, 즉시 붕대로 싸매 주겠지. 상어들은 물고기가 너무 일찍 죽는 것을 원치 않으니까 말이야. 물고기들은 우울해지지 않도록 가끔 성대한 수중 축제가 벌어질 거야. 왜냐하면 우울한 물고기보다는 유쾌한 물고기의 맛이 더 좋거든. 커다란 통 속에는 물론 학교도 있겠지. 이 학교에서 물고기들은 상어의 아가리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법을 배울 거야. 가령 어딘가에서 빈둥거리며 누워 있는 상어를 찾기 위해서는 지리학을 배울 필요가 있겠지. 물론 가장 중요한 일은 도덕 교육일 거야. 기꺼이 자신의 몸을 바치는 것이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과, 무엇보다도 상어들이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할 때는 그 말을 믿어야만 한다는 것을 배우겠지. 물고기들은 복종하는 법을 배워야 이러한 미래가 보장된다는 걸 터득하게 될 거야. 저속하고 유물론적이고 이기적이며 맑스적인 경향을 드러내면 즉시 상어들에게 신고해야 한다고 배울 거야. 상어가 사람이라면, 다른 물고기통과 다른 물고기들을 정복하기 위해 서로 전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물고기들을 전쟁터로 내보내겠지. 다른 상어들이 보호하고 있는 물고기들과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고 가르칠 거야. 물고기는 말을 못한다고 알고 있지만, 서로의 언어가 달라 침묵하고 있다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의사소통이 될 수 없다고 상어들은 발표하겠지. 전쟁 중에 서로의 언어가 달라 의사소통이 안 되는 물고기들, 즉 적의 물고기 몇 마리를 죽이는 물고기에게는 해조류로 만든 작은 훈장을 달아주고 영웅 칭호를 수여할 거야. 상어가 사람이라면, 그들에게도 물론 예술이 존재하겠지. 상어의 이빨이 화려한 색깔로 묘사되고 상어의 아가리가 멋지게 뛰어놀 수 있는 순수한 공원으로 묘사되는 아름다운 그림들이 있겠지. 바다 밑의 극장에서는 영웅적인 물고기들이 열광적으로 상어 아가리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것을 보여줄 거야. 악대가 앞장서서 연주하고 아름다운 음악이 울리는 가운데 꿈꾸듯이, 그리고 가장 행복한 생각에 젖어서 상어 아가리 속으로 몰려 들어가겠지. 상어가 사람이라면 종교 또한 존재하겠지. 물고기들은 상어의 뱃속에서야 비로소 제대로 살 수 있게 될 거라고 배우겠지. 또한 상어가 사람이라면, 모든 물고기들이 지금처럼 서로 동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겠지. 그들 가운데 일부는 감투를 쓰게 될 것이고 다른 물고기들의 윗자리에 앉게 되겠지. 심지어 큰 물고기들은 더 작은 놈들을 먹어치울 수도 있을 거야. 그렇게 되면 상어는 즐거운 비명을 질러대겠지. 왜냐하면 다음에 더 큰 먹이를 더 자주 얻게 될 테니까 말이야. 그리고 더 크고, 직함을 가진 물고기들은 물고기들 사이에서 질서를 세울 것이고, 물고기통의 교사와 장교, 엔지니어 따위가 되겠지. 요컨대 상어가 사람이라면, 바닷속에는 비로소 문화가 존재하게 될 거야."


―베르톨트 브레히트, 「코이너 씨의 이야기」 중  

#<즐거운 비판>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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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eed > [퍼온글] 근대 합리론에서 정념의 문제

*** 이 글은 출판 예정인 책의 일부로 들어갈 원고입니다. 아직 최종 교열이 끝나지 않은 원고이므로, 무단 복제나 인용을 불허합니다. 내용에 관해 지적할 사항이 있으신 분들은 코멘트를 달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 데까르뜨 정념론의 구조

근대 합리론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정념의 문제 역시 데까르뜨가 논의의 기반을 마련해 준다. 데까르뜨는 최후의 저작인 『정념론』(Passions de l'âme)(1649)에서 스꼴라철학의 정념론과 상이한 이론적 기초 위에서 정념의 문제를 체계적으로 다룸으로써 이후 합리론에서 논의되는 정념론의 이론적 모체를 제공해 주고 있다. 데까르뜨 정념론의 핵심 문제는 크게 네 가지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1-1) 정념론의 철학적 기초: 시초관념들

먼저 정념론의 철학적 기초에 관한 문제가 있다. 데까르뜨는 형이상학과 자연학에서 영혼과 물체, 사유와 연장의 엄격한 이원론에 기초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영혼과 물체는 사유와 연장이라는 전혀 상이한 속성에 따라 규정되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는 일체의 인과관계 및 상호작용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욕망과 같은 정념들은 외부 물체의 운동이 우리 신체에 미친 영향에 따라 생겨난 정기들(esprits animaux)의 운동이 뇌 안의 송과선에 전달되어 일어난 영혼 내의 결과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 정념론은 형이상학과 자연학의 차원에서 배제된 영혼과 신체의 상호작용을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데까르뜨는 정념이라는 현상에 직면하여 이론적 모순에 빠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원론적 틀에서 정념이라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시초관념들(notions primitives)에 관한 이론으로 제시된다(엘리자베쓰에게 보내는 1643년 5월 21일, 6월 28일 편지). 이 이론에 따르면 시초관념들은 우리의 모든 인식의 근거를 이루는 원천과 같은 것으로, 모든 학문은 이 관념들을 잘 구분하고 이것들을 각각의 영역에 잘 적용하는 데서 성립한다. 데까르뜨는 세 가지 시초관념을 제시한다. 먼저 사유가 있다. 이는 영혼과 신에 적용되는 것으로, 이를 기반으로 해서 형이상학이 확실하고 안전한 토대를 갖는 학문으로 성립할 수 있다. 그 다음 연장은 모든 물체들에 적용되는 것으로, 자연학은 이를 바탕으로 해서 구성된다. 데까르뜨가 제시하는 마지막 시초관념은 인간, 즉 “영혼과 신체의 연합”(union)으로서 인간이라는 관념이다. 사유라는 첫 번째 시초관념이 감각과 상상에서 분리된 순수 지성의 활동을 필요로 하고, 연장이라는 두 번째 시초관념은 상상의 도움을 받는 지성의 활동을 요구한다. 반면 세 번째 시초관념은 자신의 명석함을 감각으로부터 도출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세 번째 시초관념은 대상에 대한 이론적 인식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 아니라, 실천학을 추구함을 의미한다. 즉 이는 우리에게 유용하고 해로운 것을 식별함으로써 우리 존재를 잘 보존하게 해주는 실천적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데까르뜨의 형이상학과 자연학에 함축된 이원론적 관점은 정념에 관한 연구에서는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 그리고 이원론적 관점에서 정념의 문제를 사고할 때 제기되는 내적 모순의 문제 역시 제기되지 않는다. 즉 정념의 문제에서 상호작용은 영혼과 신체라는 상이한 존재론적 질서에 속하는 실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만약 그렇다면 데까르뜨의 철학체계는 내적 모순에 빠지게 된다). 상호작용은 영혼과 신체의 연합으로 사고된 인간과 외부의 대상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곧 데까르뜨에서 정념의 문제는 실천적 유용성의 관점에서 탐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1-2) 정념의 정의

그러나 데까르뜨의 정념론이 실천적 유용성을 목표로 하기는 하지만, 이는 그가 정념에 대한 탐구에서 학문적 엄밀성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념론의 실천적 유용성의 조건은 전통적인 정념론을 새로운 학문적 토대 위에서 개혁하는 것이며, 이는 정념에 대한 데까르뜨의 정의에서부터 잘 나타난다.

데까르뜨는 먼저 영혼의 분할이론에 기초하고 있는 정념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방식을 비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영혼은 열등한 부분과 우월한 부분, 감각적인 부분과 이성적인 부분 사이의 싸움터가 아니라 하나의 불가분한 실체다. 이는 불가분적인 영혼과 가분적인 물체를 엄격히 구분하고, 기능(faculté)의 구분 이외에 일체의 영혼의 분할을 인정하지 않는 데까르뜨의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필연적으로 비롯하는 결과다. 따라서 그에게는 전통적인 영혼 내의 갈등이라는 문제 역시 영혼과 신체 사이의 갈등의 문제, 또는 신체의 운동을 표현하는 정념과 영혼의 활동을 나타내는 의지 사이의 갈등의 문제로 제기된다.

데까르뜨에게 표상은 일반적으로 사물을 정신에게 표상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표상의 하나인 정념의 종별성은 사물, 대상에 대한 인지적 정보를 제공해 주는 데 있지 않고,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데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데까르뜨는 정념을 “지각(perceptions) 또는 감각내용(sentiments) 또는 영혼의 동요(émotions)”(『정념론』 27절)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정념이 지각이라는 것은 영혼의 활동인 의지와 구분하여 정념이 영혼에게 수동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념이 감각내용이라는 것은 지성의 지각과 달리 정념은 혼잡하고 모호한 지각이라는 점을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영혼의 동요라는 것은 인지적인 표상과 달리 정념의 특성은 영혼의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에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처럼 정념은 표상, 즉 사유의 일종이라는 점에서 영혼 안에 존재하지만, 정념을 발생시키는 원인은 영혼이나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외부 대상과 정기들의 운동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정념이 발생하는 최초의 원인은 외부 대상이 우리의 감각기관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 다음 이 자극에 따라 발생한 신경기관 내의 정기들의 운동이 뇌 안의 송과선(glande pinéale)을 자극한다. 그리고 끝으로 이 송과선을 통해 영혼 내에서 정념이 발생하기 때문에, 정기들의 운동은 정념 발생의 마지막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자신과는 상이한 본성을 지닌 것에 의해 수동적으로 발생하는 사유의 양태들이라는 데서 정념(passion), 즉 수동이라는 이름이 유래한다. 따라서 데까르뜨에서 정념들은 외부 대상 내지는 인간 자신의 신체의 운동을 원인으로 갖고 있지만, 영혼에 속하는 사유양태들로 정의될 수 있다.

이러한 정념의 발생과정에 대한 설명에서 중요한 것은 데까르뜨가 정념발생의 원인을 신체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데까르뜨가 전통적인 정념론의 문제점을 정념의 성격과 원인의 혼동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곧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스꼴라철학에 이르는 정념론은 정념의 원인을 영혼 자체에서 찾고 이에 따라 정념을 의지의 표현으로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데까르뜨에 따르면 이는 정념의 본성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서나 정념의 유용성을 올바르게 활용하는 데서 장애가 될 뿐이다.

1-3) 정념의 분류와 열거

데까르뜨의 방법의 이념에 비추어볼 때 정념의 분류와 열거는 정념론을 하나의 학문으로 확립하는 데서 핵심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데까르뜨의 보편수리학(mathesis universalis)의 이념은 모든 학문대상의 동질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각 학문영역에서 확실성을 수립하는 절차가 올바른 순서에 따라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형이상학과 자연학에서처럼 정념론에서도 이 보편적인 방법론이 적용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곧 정념의 분류나 열거로 표현된다.

데까르뜨의 방법은 우선 가장 단순한 것, 가장 기초적인 것을 찾고 이로부터 복잡한 것, 파생적인 것을 연역하도록 요구한다. 정념론에서 가장 기초적인 것은 여섯가지 기초정념들, 즉 놀람, 사랑과 미움, 욕망과 기쁨, 슬픔으로 제시된다. 이 여섯가지 정념들은 말 그대로 기초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다른 기초정념들로 환원되거나 포섭되지 않은 자율성을 지니고 있으며, 각각 자신의 하위 정념들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여섯 가지 정념들 사이에 위계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이것들을 분류하고 제시하는 순서는 존재한다. 이에 따르면 가장 먼저 제시되는 정념은 놀람이고, 그 다음 사랑과 미움이 뒤따르며, 마지막으로 욕망과 기쁨, 슬픔이 제시된다. 이러한 순서는 세 가지 기준에 의거하고 있다. 정념을 열거하는 첫 번째 기준은 새로움 또는 단순성이다. 여기에서 새로움이란 이제까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어떤 것이 우리에게 처음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항상 영혼을 놀랍게 만든다. 영혼의 변화가 모든 정념의 공통적인 특성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런 의미의 놀람은 정념의 가장 절대적인 기준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것은 아직 우리에게 이로운 것인지 해로운 것인지 알려져 있지 않고, 따라서 자신의 반대항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가장 단순한 것이기도 하다. 이 첫 번째 기준에 따르면 최초의 기초정념은 놀람(admiration)이다.

두 번째 기준은 우리에게 이로운 것인가 해로운 것인가이다. 여기서 이로움과 해로움은 대상 자체의 객관적인 성질에 따라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 부합하는지 아닌지에 따라 판별된다. 우리에게 부합하는 것으로 표상된 대상은 우리가 그것을 사랑하게 만들고 해로운 것은 그것을 미워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 기준에 따른 기초정념은 사랑과 미움이다. 사랑과 미움이라는 정념은 놀람에 비해서는 복잡하지만, 아직 시간과 관련을 맺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욕망과 기쁨, 슬픔에 비해서는 단순하며, 따라서 두 번째 순서에 위치하게 된다.

마지막 세 번째 기준은 시간이다. 이는 욕망과 기쁨, 슬픔이라는 세 가지 기초정념을 분류한다. 데까르뜨는 과거 및 현재보다는 미래가 정념에 고유한 시간성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중에서 미래와 관계하고 있는 욕망을 맨 앞에 위치시키고 있다. 욕망 다음에는 현재와 관련을 맺고 있는 기쁨과 슬픔이 따라나온다. 데까르뜨는 이 여섯가지의 기초정념들을 기준으로 다른 여러 정념들을 설명하고 있다(69절 이하). 당대의 정념 분류법의 표준을 제시해주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분류기준은 욕구하게 하는 것(concupiscibilis)과 성마르게 하는 것(irascibilis)의 두 가지 종으로 정념을 분류하고, 이 두가지 종들에 각각 6개와 5개의 하위정념을 귀속시켜 총 11개의 정념을 기본정념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분류법과 비교해 본다면 데까르뜨의 정념론은 두 가지의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그의 정념론은 욕구와 성마름이라는 영혼의 분할이론에 기초한 전통적인 종적 구분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리고 둘째,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달리 정념들 사이에 일체의 파생관계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1-4) 정념의 기능

데까르뜨 정념론의 또다른 독창성은 정념의 긍정성을 강조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정념은 배제되거나 될 수 있는 한 억제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데까르뜨는 정념을 영혼과 신체의 연합체인 인간의 고유성에서 비롯하는 자연적 조건으로 간주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재의 보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데까르뜨가 제시하는 정념의 기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데까르뜨 정념론의 두 가지 중요한 구분을 잘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먼저 정념과 의지의 구분이 있다. 데까르뜨에 따르면 정념과 의지는 각각 영혼의 수동과 능동을 나타낸다. 즉 정념이 자신과 상이한 존재론적 질서에 속하는 신체의 운동이 영혼에 산출한 결과로서 신체의 운동에 대한 영혼의 수동성을 나타낸다면, 의지는 영혼의 고유한 힘, 능동성을 나타낸다. 이 두 가지 구분이 갖는 첫번째 의미는 영혼에게는 정념을 발생시키거나 제거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점이다. 어떤 외부대상이 위협을 할 때 정기들의 운동에 따라 영혼에는 두려움의 정념이 생겨날 수밖에 없으며, 우리에게 해로운 대상이 표상될 때 미움의 정념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이는 신체가 영혼에 직접 작용할 수 없듯이, 영혼 역시 신체에 직접 작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번째로 이는 영혼의 활동이 신체에 속하는 정기의 운동에 의해 결정거나 구속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체와 결합되어 있다는 자연적 조건 때문에 영혼은 정념을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반면 영혼은 신체의 운동과 정념의 발생 사이의 습관적 인과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영혼이 지니고 있는 이 힘이 곧 의지의 능동성이다. 데까르뜨에게 의지의 능동성은 영혼이 신체의 직접적 요구를 표현하는 정념들의 힘에 좌우되지 않고, 삶을 잘 보존하기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행위들을 수행하게 할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능력의 요체는 신체의 직접적 요구와 정념 사이의 자연적 인과관계를 변화시켜 정념이 의지의 명령에 따르게 만드는 데 있다.

또다른 중요한 구분은 정념과 내적 동요(émotions intérieures) 사이의 구분이다. 데까르뜨는 전통적인 영혼의 분할론을 비판하기는 하지만, 그 역시 영혼이 겪는 두 가지 동요를 구분하고 있다. 하나는 외부 물체의 작용에 의해 야기된 외적 동요, 즉 정념이며, 다른 하나는 영혼 자신의 힘에 의해 생겨난 내적 동요다(『정념론』 147-148항). 내적 동요는 정념과 마찬가지로 영혼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지닌 감정의 하나이면서 동시에 외부 대상이 아니라 영혼 자신을 원인으로 지닌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영혼이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개념적 장치가 된다.

데까르뜨에 따르면 영혼이 자신의 정념들을 제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자신의 정념들에 대한 영혼의 반성이다. 자신의 정념들에 대한 이러한 반성은 정념으로서의 기쁨, 즉 슬픔을 맞짝으로 갖고 있는 기쁨이 아니라, 정념들의 성격에 따라 좌우되지 않고 내적 평정을 유지하는 데서 오는 기쁨, 즉 지적 기쁨을 낳는다. 그리고 이러한 지적 기쁨은 영혼이 정념들에 좌우되지 않고 정념들을 잘 사용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준다. 데까르뜨가 “다른 모든 미덕의 열쇠”(『정념론』 161항)로 간주한 관대함(générosité)이 미덕이면서 동시에 감정으로서의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내적 동요 덕분이다.

2. 기회원인론과 정념의 일반화: 말브랑슈의 정념론

말브랑슈의 정념론은 『진리탐구』(1675)에서 체계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의 정념론은 데까르뜨의 이원론적 관점을 좀더 철저하고 일관되게 밀고나가면서 이를 기독교적 관점과 화해시키려고 한 점이 특징이다. 즉 말브랑슈는 데까르뜨가 영혼과 신체의 연합이라는 세번째 시초관념을 통해 정념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을 비판하면서 기회원인론의 관점에서 정념을 일반화하고 원죄론의 관점에서 정념의 유용성의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

2-1) 기회원인론과 영혼과 신체의 연합의 부정

말브랑슈 정념론의 이론적 기초는 기회원인론에 있다. 앞서 본 것처럼 데까르뜨는 사유와 연장이라는 두 가지 시초관념 이외에 영혼과 신체의 연합이라는 세번째 시초관념 위에서 자신의 정념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세번째 시초관념이야말로 말브랑슈의 기회원인론의 주요한 비판대상이며, 이 비판이 그의 정념론의 기초를 이룬다. 말브랑슈가 세번째 시초관념에서 문제삼고 있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이질적인 두 실체인 영혼과 신체의 상호작용, 따라서 정신과 물체 사이의 인과관계라는 점이다. 데까르뜨의 형이상학적 원리를 충실히 따르려는 말브랑슈에게 이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론적 후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념이라는 현상이 어떤 식으로든 영혼과 신체의 연관성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말브랑슈는 이원론의 틀을 유지하면서 이 연관성을 해명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게 된다.

말브랑슈의 해결책의 요체는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먼저 말브랑슈는 기회원인론을 통해 신체만이 아니라 영혼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을 과감하게 탈실재화하는 길을 제시한다. 기회원인론에 따르면 인과적 힘은 신에게만 존재할 뿐이며, 일체의 유한한 존재자에게는 독자적으로 운동을 일으킬 만한 힘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외부 물체의 인과 작용에 의해 우리의 신체가 변용되고 이것이 다시 정기들의 운동을 통해 송과선에 전달되고, 그 결과 영혼 안에 어떤 정념이 발생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외양에 불과하다. 말브랑슈에 따르면 이는 사실은 각각의 경우마다 작용하고 있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비가시적일 뿐만 아니라 비가지적인 것으로 남아있는 신의 의지의 연속적인 활동의 표현일 뿐이다(『형이상학과 종교에 관한 대화』 7권 13장).

둘째, 말브랑슈는 신과 정신의 연합, 신체와 정신의 연합으로 연합 개념을 이중화한다. 이 두 가지 연합 중 사유라는 속성을 공유하는 신과 정신 사이의 연합만이 실재적 연합이며, 이 연합은 수동적인 정신에 대한 능동적인 신의 활동을 사고하기 위한 범형적인 틀을 제공해준다. 신에 대한 정신의 이러한 원초적인 수동성은 뒤에서 볼 것처럼 말브랑슈에서 정념 개념이 일반화되는 존재론적 근거가 된다. 이처럼 신과 정신 사이에는 무매개적인 연합관계, 또는 오히려 의존관계가 존재한다. 반면 데까르뜨가 정신과 신체의 연합이라고 부른 것은 항상 이미 신과 정신의 연합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 더 나아가 정신과 신체/물체가 전혀 상이한 이질적 실체인 데다가 정신에 비해 신체/물체의 존재론적 위상이 훨씬 낮기 때문에, 사실은 엄밀한 의미에서 연합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과 신체의 연합이라 불리는 것은 사실은 합리적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우연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것이 우연적이게 되는 만큼 전능한 신의 의지의 작용력은 더욱 더 강화된다.

이 두 가지 논변의 결과 영혼과 신체의 연합이라는 데까르뜨의 세번째 시초관념은 실재성과 합리성을 상실하게 되며, 정념의 본성에 대한 이해 역시 광범위하게 변모된다.

2-2) 정념의 재분류와 일반화

기회원인론이 낳은 주요 결과 중 하나는 정념의 재분류다. 말브랑슈는 형식적으로는 데까르뜨의 정념의 분류와 순서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다. 즉 그는 데까르뜨와 마찬가지로 놀람을 첫번째 정념으로, 사랑과 혐오(aversion)를 그 다음에 오는 정념의 쌍으로 제시하고, 마지막에 기쁨과 슬픔, 욕망의 정념들을 위치시킨다. 하지만 이런 외양과는 달리 데까르뜨와 말브랑슈의 정념 이해와 분류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존재한다.

말브랑슈에서 정념은 신체의 운동의 결과로 영혼이 겪게 되는 표상이라는 데까르뜨의 정의와는 달리 “정기들의 외재적 운동의 기회에 영혼이 자연적으로 느끼게 되는 모든 동요들”(『진리 탐구』 5권 1장)로 규정된다. 즉 기회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유한자들에게 일체의 인과적 작용력을 박탈하는 기회원인론의 결과로 정념은 외부 물체에 의해 신체가 변형되는 순간에 신에 의해 영혼 안에 생산된 심리 현상으로 규정된다. 이 정념에 대한 새로운 규정은 데까르뜨의 정념론에 대한 세 가지의 변형을 함축한다.

먼저 이는 정념들을 신의 원초적 사랑의 양상들로 파악하는 것을 뜻한다. 외부 대상이 우리의 지성이나 감각에 나타나고 이것이 정념을 촉발할 때, 우리의 의지는 이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보이면 이를 추구하고, 나쁜 것으로 보이면 이를 회피한다. 그런데 말브랑슈에 따르면 의지에 의한 이러한 추구와 회피의 작용은 실은 자기자신에 대한 신의 사랑의 표현에 불과하다. 즉 신이 자기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것을 의지하게 되며, 따라서 우리가 좋은 것을 추구하고 나쁜 것을 회피하는 것은 신이 설정한 선 일반에 대한 우리의 자연적 이끌림의 표현이다. 바로 이 때문에 말브랑슈는 의지를 “우리를 비규정적이고 일반적인 선으로 향하게 하는 자연적 운동 또는 인상”(『진리 탐구』 1권 1장)으로 정의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런 정념 이해는 사랑을 모든 정념의 원형으로 제시하게 된다. 즉 놀람은 데까르뜨와 마찬가지로 첫번째 순서에 놓이지만, 말브랑슈에게 이는 “불완전한” 정념으로 간주된다. 놀람은 선에 대한 관념이나 감각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어떤 새로운 것에 대한 놀람만을 표현하기 때문이다(『진리 탐구』 5권 7장). 그리고 데까르뜨에서 사랑과 미움에 해당하는 정념인 사랑과 혐오는 사실은 사랑의 두 가지 표현에 불과하다. 혐오는 사랑의 부정적 표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기쁨과 욕망, 슬픔이라는 나머지 정념들 역시 말브랑슈에 따르면 각각 “기쁨의 사랑, 욕망의 사랑, 슬픔의 사랑”으로 나타난다. 슬픔은 우리가 추구하는 선이 우리에게 금지된 상태를 표현하며, 따라서 슬픔은 이러한 금지를 벗어나 선을 추구하려는 우리의 의지, 즉 사랑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또한 기회원인론은 데까르뜨가 능동적인 것으로 간주했던 의지를 근원적으로 수동적인 것으로 만드는데, 이는 곧 정념의 일반화를 가리킨다. 데까르뜨는 영혼의 상이한 능력을 구분하면서 의지에 능동성을 부여하고 지성에게는 수동성을 부여했다. 반면 말브랑슈에게는 기회원인론의 결과로 인간의 의지는 능동성을 결여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인식과 의지 모두는 인간 영혼 안에서 각자가 맡고 있는 기능에 따라 분화되기 이전에 신의 능동적인 작용의 수용이라는 공통적인 특성에 따라 규정된다. 따라서 말브랑슈에서 정념은 매우 일반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이는 아르노와의 논쟁을 통해 잘 드러나듯이 말브랑슈가 관념을 자체적인 인과적 작용성을 보유한 신의 본질의 일부로 간주하는 데서 비롯하는 결과이기도 하다.

2-3) 정념의 기능

말브랑슈에게 정념의 기능, 정념의 유용성의 문제는 그의 종교철학, 특히 원죄론의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데까르뜨와 마찬가지로 말브랑슈도 정념의 자연적 유용성을 긍정한다. 즉 인간이 영혼으로만 이루어진 존재자가 아니라 신체와 결합되어 있는 한 정념은 불가피하게 생겨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정념은 우리의 신체를 보존하는 데 유용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정념이 유용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조건은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신체에 대한 통제력을 지니고 이를 신이 설정한 질서를 추구하는 데 잘 활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 이후의 인간들은 원죄 때문에 신체에 대한 이러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오히려 신체의 감각적 욕구에 좌우되어 선 일반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지니게 된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욕구(concupiscence)다. 말브랑슈에 따르면 욕구는 “원죄에 의해 생겨난 자연의 무질서”(『진리 탐구에 대한 8번째 해명』)로서, 모든 인간은 원죄 때문에 처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고 이에 따라 욕구의 운동에 좌우된다. 아담도 역시 그의 후손들과 마찬가지로 영혼과 신체가 결합된 존재였으나, 원죄를 범하기 전에는 감각적 자극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영혼이 원하는 방향대로, 즉 신이 설정한 질서에 따라 신체를 잘 통제할 수 있었다. 따라서 말브랑슈에 따르면 모든 악덕은 원죄 이후에 생겨난 이러한 신체의 반역에서 비롯하며, 반대로 미덕은 오직 신이 설정한 질서를 잘 따르는 데 있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미덕은 그때그때의 상황에서 질서가 요구하는 행동을 그대로 수행하는 것(이는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다)이 아니라, “질서를 잘 따르려고 의지하는” 것이다. 즉 의지적 노력이야말로 미덕을 특징짓는 핵심적 요소다.

하지만 원죄에 의해 사람들이 욕구에 따르게 되었다면 어떻게 미덕을 지니는 것이 가능한가? 말브랑슈에게 이는 답변하기가 쉽지 않은 질문이다. 원죄 이후의 인간에게 습관 개념과 욕구의 개념이 일종의 악순환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더 그렇다. 신체와 정신 모두가 행동을 용이하게 해주는 습관에 따라 작용하고, 원죄 이후 이 습관은 욕구를 강화하는 쪽으로 형성되어 왔다면, 어떻게 이 악덕의 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말브랑슈는 그리 낙관적이지는 않지만, 원죄를 지니고 있는 모든 인간들은 항상 자신 안에 또한 질서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이 유덕한 활동의 능력을 교육을 통해 잘 길러낸다면 욕구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질서에 대한 사랑의 습관을 기를 수 있으리라는 것이 그의 희망어린 답변이다.

3. 정념에서 정서로: 스피노자의 정서론

우리가 본 것처럼 데까르뜨와 말브랑슈는 심신이원론에 기초하여 자신들의 정념론을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한편으로 정신과 신체가 자율적인 질서에 따라 존재하며, 따라서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도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긍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코나투스론을 통해 이를 일원론적으로 통합하고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정서론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 그는 정서의 문제를 코나투스라는 존재론적 기초 위에서 다루고 있으며, 둘째, 정서의 문제를 역량의 증대와 감소 및 수동성과 능동성의 문제와 결부시켜 논의하고 있다.

3-1) 정서론의 존재론적 기초: 코나투스

스피노자의 정서론은 코나투스(conatus) 이론에서 출발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든 유한한 존재자는 자신의 역량에 따라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는 노력으로서의 코나투스를 자신의 현행적 본질로 갖는다. 인간의 경우 이는 충동(appetitus), 또는 충동에 의식이 결합된 욕망으로 표현된다. 이처럼 코나투스를 유한 양태의 현행적 본질로, 그리고 욕망을 인간의 본질로 정의하는 것은 정서론과 관련하여 세 가지 주요한 의미를 갖는다.

먼저 코나투스론은 데까르뜨와 말브랑슈와 달리 일원론적 관점에서 정념 또는 정서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존재론적 기반을 제시해준다. 데까르뜨는 정념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형이상학과 자연학의 이원론적 관점 대신 영혼과 신체의 연합이라는 세번째 시초관념을 도입했다. 하지만 그는 신체의 작용과 영혼의 작용을 매개해주는 송과선이라는 신비스러운 가설을 도입함으로써 후배 철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말브랑슈는 기회원인론을 도입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정신과 신체의 존재론적 통일성을 함축하는 코나투스 개념에 근거하여 데까르뜨의 문제설정을 변화시키고 있다. 즉 코나투스는 정신과 신체 중 어느 한 쪽의 존재 및 활동 역량이 아니라 이 양자를 통해 동시에 두 가지 형태로 표현되는 동일한 역량이다. 그리고 이처럼 유한자가 지니고 있는 존재 및 활동 역량의 증대와 감소를 표현하는 것이 바로 정서들이다.

둘째, 스피노자에게는 데까르뜨 및 기회원인론자들을 포함한 당대의 데까르뜨주의자들의 정념론의 근본 문제였던 영혼과 신체의 상호작용이라는 문제가 더 이상 하나의 문제로 제기되지 않는다. 그 대신 그에게는 정서의 능동성과 수동성의 문제가 근본 문제로 제기된다. 데까르뜨에서 정념의 문제는 영혼에 신체가 작용한 결과의 표현, 곧 ‘영혼의 수동’의 문제로 제시되었다. 이는 곧 영혼과 신체, 정념과 의지의 반비례 관계를 나타낸다. 반면 “관념의 질서와 연관은 사물의 질서와 연관과 같다”(『윤리학』 2부 정리 7)는 스피노자의 평행론에 따르면 사유와 연장 사이에는 일체의 인과적 상호관계가 존재하지 않지만, 양자는 동일한 존재론적 통일성을 표현한다. 따라서 스피노자에서는 데까르뜨와 달리 정신의 능동과 수동은 신체의 능동과 수동과 비례한다. 이에 따라 스피노자 정서론에서는 영혼에 대한 신체의 작용, 즉 정념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과 신체를 통해 동시에 표현되는 존재 및 활동 역량을 증대하고 능동적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셋째, 정서는 수동성만을 함축하지 않으며 능동성도 함축하고 있다. 이는 스피노자가 역량(potentia)의 표현으로서 코나투스를 유한한 존재자들의 본질로 규정함으로써, 유한자들에게 능동성의 존재론적 근거를 마련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유한자들은 신의 본질의 표현으로서 코나투스를 자신의 본질로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유한자들은 실체와 같이 본질과 실존이 일치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항상 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으로 능동화의 경향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정념들의 능동화는 적합한 인식, 즉 이성의 활동을 요구하며, 역으로 적합한 인식의 두 가지 유형으로서 제 2종의 인식과 제 3종의 인식은 정서들의 능동화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정서론의 또다른 특징은 정서와 이성의 지속적인 결합을 추구한다는 데 있다.

3-2) 정서의 정의와 분류

스피노자에게 정서(affectus)는 신체의 활동역량을 증진하거나 감소시키는 신체의 변용들(affectio)인 동시에 이 변용들에 대한 관념으로 정의된다(『윤리학』 3부 정의 3). 이 정의의 의미를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정의에서 동원되고 있는 스피노자 철학의 다른 두 가지 주요 개념, 즉 관념 및 변용과 정서의 차이점을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정서는 관념의 한 종류이지만, 인지적 기능에 따라 정의되는 일반적 관념과 달리 신체와 정신의 역량의 증대 및 감소를 나타낸다. 그리고 변용은 외부 물체가 우리의 신체에 작용을 미쳐 생겨난 신체적 상태를 가리키는 반면, 정서는 변용되는 사물의 존재역량의 증대나 감소, 그리고 더 나아가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과 결부되어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스피노자 정서 개념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역량의 증감 및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데까르뜨나 말브랑슈가 정념으로 간주한 것, 즉 놀람,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욕망 등이 스피노자에게는 정서의 한 부분, 즉 수동적인 정서로 한정됨을 의미한다. 또는 이 각각의 정서들은 수동성과 능동성의 분화 과정 속에서 사고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말브랑슈가 기회원인론을 통해 유한자들의 역량을 최소화한 데 비해, 스피노자는 처음부터 정서를 역량의 변화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는 점도 주요한 차이점 중 하나다. 그 결과 스피노자 철학에서 정서는 윤리적, 정치적 실천을 사고하기 위한 필수적인 범주로 제시된다.

스피노자는 정서 분류에서도 데까르뜨 및 말브랑슈와 큰 차이를 보여준다. 데까르뜨가 여섯가지의 기초정념을 제시한 데 비해(이는 말브랑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스피노자는 세 가지 기초정서를 제시한다. 이중 첫 번째는 욕망이며, 그 다음은 좀더 작은 완전성에서 좀더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을 가리키는 기쁨의 정서와 좀더 큰 완전성에서 좀더 작은 완전성으로의 이행을 가리키는 슬픔의 정서가 있다. 이 세 가지 중 욕망이 첫번째 순서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 인간의 코나투스, 인간의 현행적 본질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정서 분류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데까르뜨에게는 최초의 기초 정념으로 제시된 놀람이 아예 정서의 영역에서 배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보기에 놀람은 어떤 적극적인 원인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알려지지 않은 어떤 것에서 생겨난 것이며, 따라서 우리의 역량의 증대나 감소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하지만 놀람은 우리를 놀라게 한 외부 대상에 우리의 주의를 고착시키는 경향이 있고, 이에 따라 사물에 대한 부적합한 인식을 낳는다는 점에서 수동성의 한 요인이 된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데까르뜨가 두번째로 위치시킨 사랑과 미움을 주요 정서들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이는 사랑과 미움이 각각 외부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과 슬픔이며, 따라서 기쁨과 슬픔의 변형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랑(적어도 그 일부)과 미움은 기쁨과 슬픔을 제공해 주는 원인이 직접적으로 작용하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기억이나 유사성 등의 표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기쁨과 슬픔의 효과를 산출하기 때문에 가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3-3) 수동성과 능동성

스피노자 정서론의 독창성 중 하나는 능동적 정서의 존재와 역할 그리고 메커니즘을 설명한 데 있다. 스피노자의 정서론은 자연주의적 관점, 즉 어떤 정서는 그와 대립적이면서 그보다 더 강력한 정서에 의해서만 억제되거나 제거될 수 있다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윤리학』 4부 정리 7). 따라서 『윤리학』의 목표인 윤리적 해방(이는 『윤리학』 4부의 제목이 [인간의 예속에 관하여]이며, 5부의 제목은 [인간의 자유에 관하여]인 데서 잘 드러난다)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동적 정서에서 생겨나는 예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스피노자 정서론에서 이는 능동적 정서의 작용으로 설명될 수 있다.

스피노자는 능동을 “우리가 그것의 적합한 원인인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 또는 우리 바깥에서 일어날 때, 즉 우리의 본성에 의해서만 명석판명하게 인식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우리 안에서 또는 우리 바깥에서 따라나올 때 우리는 능동적”(『윤리학』 3부 정의 2)이라고 정의한다. 반대로 수동은 “우리가 단지 부분적 원인에 불과한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 일어날 때 또는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따라나올 때 우리가 수동적”(같은 곳)이라고 정의된다. 이 정의에 따르면 우리가 능동적인가 수동적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사건의 적합한 원인인지 아니면 부적합한 또는 부분적인 원인인지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는 다시 우리가 사물에 대한 참된 인식을 획득할 수 있는지에 의존한다.

따라서 스피노자에서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의 문제는 부적합한 인식에서 적합한 인식으로의 이행의 문제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부적합한 제 1종의 인식에서 적합한 인식으로의 이행은 공통 개념의 형성에 의존한다. “부분과 전체에 공통적인”, 따라서 항상 참된 공통 개념은 보편적 인식을 형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독특한 사물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게 해준다. 마찬가지로 정서의 문제에서도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은 내재적인 전환을 가능하게 해줄 일종의 보편적 매개를 요구한다. 신을 향한 사랑(amor erga Deum)이 바로 이러한 매개의 역할을 담당한다. 앞서 본 것처럼 사랑 자체는 외부 원인에 의해 촉발된다는 점에서 수동적인 정서다. 더 나아가 보통의 사랑은 쉽게 반대의 것, 즉 미움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상과 예속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신을 향한 사랑은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지속적인 정서일 뿐 아니라, 이것의 반대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 역량의 증대라는 사랑의 정서를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정서다. 따라서 신을 향한 사랑은 수동적인 정서로서의 보통의 사랑이 능동적인 사랑, 즉 신의 지적 사랑(amor intellectualis Dei)으로 전환될 수 있게 해주는 매개로 간주될 수 있다.

3-4) 신의 지적 사랑

사람들은 보통 신의 지적 사랑이라는 개념을 “인간이 신을 지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이를 “신에 대한 지적 사랑”으로 번역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잘못된 생각이다.

첫째, 신의 지적 사랑은 보통의 사랑처럼 주체-객체 관계에 있는 외부 대상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지 않는다. “외부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3부 정리 13의 주석)이라는 사랑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사랑은 상상적이며, 따라서 지적 사랑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아울러 바로 이 점에서 신의 지적 사랑은 신을 향한 사랑과도 구분된다. 곧 신을 향한 사랑은 여전히 상상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사랑이지만, 신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과 대립하는 정서로 전도될 수 없으며, 따라서 최대의 기쁨을 가져다 준다. 이에 비해 신의 지적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며, 이 때문에 항상 능동적이다.

둘째, 신의 지적 사랑은 신을 향한 인간의 사랑만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을 뜻한다. 그리고 이는 좀더 근원적인 자기자신에 대한 신의 사랑의 두 측면을 이룬다.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한에서의 신은 인간들을 사랑하며, 따라서 인간들을 향한 신의 사랑과 신을 향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5부 정리 36의 주석) 이는 자기원인으로서의 신(1부 정의 1, 정리 11)이라는 정의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결과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잘못은 세번째 측면에 있다. 스피노자에서 신의 지적 사랑은 제 3종의 인식, 곧 독특한 사물들의 본질에 대한 인식의 구체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5부 정리 36에서 스피노자가 말하고 있듯이, “신을 향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인간정신의 본질에 따라 설명될/펼쳐질 수 있는 한에서의” 자기자신에 대한 신의 사랑이다. 스피노자가 바로 덧붙이듯이 이는 “곧 신을 향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신이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무한한 사랑의 일부”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각각의 개별 정신의 신을 향한 사랑은 자기자신에 대한 신의 사랑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보편화의 운동이며, 반대로 자기자신에 대한 신의 사랑은 개별적인 영혼의 지적 사랑으로 표현되는 개별화의 운동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처럼 각각의 영혼의 지적 사랑이 가장 보편적인 신의 사랑, 곧 능동화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신의 지적 사랑은 보편적인 인식을 목표로 하는 두번째 종류의 인식을 넘어서, 합리적 인식과 능동적 정서가 결합되는 세번째 종류의 인식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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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브리치, 서양미술사, 예경.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창비.
알베르토 망구엘, 나의 그림읽기, 세종서적.
고바야시 다다시, 우키요에의 미, 이다미디어.
진 쿠퍼, 그림으로 보는 세계문화상징사전, 까치.
데이비드 호크니, 명화의 비밀, 한길사.
오주석, 한국의 미 특강, 솔출판사.


2차

1. 역사이야기
강명관, 조선의 뒷골목 풍경, 푸른역사.
슈바이츠, 어제의 세계, 지식공작소.
반 룬, 인류이야기, 아이필드.
단턴, 고양이 대학살, 문학과지성사.
홀랜드, 공화국의 몰락, 웅진닷컴.

2. 문화
미치너, 소설, 열린책들.
임석재, 땅과 인간/기독교와 인간, 북하우스.
라이히-라니츠키, 사로잡힌 영혼, 빗살무늬.
베리, 현대 문학이론 입문, 시유시.
벌린, 낭만주의의 뿌리, 이제이북스.

3. 자연과학
해리스, 작은 인간, 한길사.
길리스피, 객관성의 칼날, 새물결.
웹스터, 과학기술과 사회, 한울.
로버츠, 석유의 종말, 서해문집.
사이키스, 이브의 일곱딸들, 따님.

4. 경제와 세계화
신이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동아시아.
마르틴, 세계화의 덫, 영림카디널.
이정전, 시장은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한길사.
갈브레이드, 불확실성의 시대, 범우사.
하일브로너, 고전으로 읽는 경제사상, 민음사.

5. 인물평전
갈로,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푸른숲.
허마이오니 리, 버지니아 울프, 책세상.
김현우, 안토니오 그람시, 살림.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4-5(율리우스 카이사르), 한길사.
박홍규, 카프카 권력과 싸우다, 미토.

6. 정치사상
블룸, 셰익스피어의 정치철학, 집문당.
강준만, 나의 정치학 사전, 인물과사상사.
뮬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한울.
로크, 통치론, 문학과지성사.
폴라니,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책세상.

7.사회과학
부르디외, 과학의 사회적 사용, 창비.
엘리아스, 기득권자와 아웃사이더, 한길사.
하비, 파리 모더니티의 수도, 생각의나무.
일리히, 학교없는 사회, 미토.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나남.

8. 철학
가라타니 고진, 윤리21, 사회평론.
브루노 스넬, 정신의 발견, 까치.
박해용, 철학용어용례사전, 돌기둥.
야스퍼스, 위대한 사상가들, 책과함께.
프리틀라인, 서양철학사, 서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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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xceptional Political Theology of Saint Paul

 

PHILIP GOODCHILD

 

 

The recent reception of Paul’s thought in European philosophy concurs with a contemporary strand of historical-critical scholarship (Elliott 1994; Horsley 1997; Wright 2000): Paul’s gospel is believed to announce a radical politics.  At the opening of Romans we read this gospel as a heraldic announcement of Jesus as king or Davidic messiah, demanding the ‘obedience of faith’ (Rom. 1.1-6).  Caesar has been superseded by a crucified, Jewish messiah.  This announcement is both scandalous and incredible.  Indeed, such a political reading has remained scandalous and incredible for the much of the history of theological and critical scholarship.  How can Paul’s gospel have a directly political import, when the main focus of his epistles seems to lie elsewhere – on the death of Christ, on communal relations, on the place of Jews and Gentiles, on the practice of circumcision, on the body of Christ, on justification by faith, on life in the Spirit?  If Paul’s gospel is political, then Paul must hold an exceptional understanding of ‘politics’.  This will indeed be our argument: Paul holds an exceptional, indeed, eschatological understanding of politics.  Paul summarises it thus:

 

Then comes the end when he hands over the kingdom to God the Father, after he has destroyed every ruler and every authority and every power.  For he must reign until he has put all his enemies under his feet.  (1 Cor. 15.24-5)

 

Eschatology involves the displacement of every other principle of authority.  The exceptional character of Paul’s political theology is therefore denatured when it is interpreted simply in relation to its context of Jewish piety, Roman politics, or Hellenistic wisdom, for each of these appeals to a subsidiary power or principle.  The messianic innovation announced by Paul offers a new principle for the reconstitution of religion, politics and reason alike.  Then neither historical-critical scholarship nor philosophical commentary will be able to disclose the full radicality and exceptionality of the political theology of Paul.

 

 

Eschatology

Eschatology is not universality.  Eschatology must be distinguished from universality in several ways.  Any confusion between them is regrettable.  Of course, when judged from the perspective of a universal reason, the eschatological will seem to hold a universal significance.  Nevertheless, the universal is only established in eschatology as an enemy, in subjection.  For the universal establishes a single form or principle to comprehend all things, but Pauline eschatology subjects all forms or principles to Christ.  There is little hope of a reconciliation of principles here.  For every authority and every ruler and every power that claims universality sets itself up as a supreme power; yet insofar as it falls short of Christ, it does not know Christ, and its universal claim excludes all that is of Christ that it cannot comprehend.  In addition to the universal, there is always an eschatological remnant who are too exceptional to be included under the universal.  This is the first problem of political theology: who are those ‘in Christ’, the righteous remnant, the community or kingdom founded on Christ himself?

             Universality expresses a point of view according to which all things may be comprehended under a single form.  In relation to the universal, the particulars do not matter; individuals may be freely substituted for each other.  Only the form that comprehends them all in a synchronic moment of understanding is glorified.  Universality belongs to the order of law, whether a law of nature or a moral law.  Law has a universal application; yet law remains abstract and transcendent until it is applied in an actual act of judgement, in accordance with the truth of the case.  Law, truth, and sovereign power exist in reciprocal presupposition in the order of universality.  In eschatology, by contrast, the individual is glorified; the individual becomes a ‘judge of angels’ (1 Cor. 6.2-3).    No doubt there is also judgement at work here.  Yet such a judgement finds in favour of the individual and against the law.  In the final judgement, the law and its judgements of death are suspended.  All sovereign powers are suspended and subjected to Christ.  Eschatology replaces subjection to the sovereign with adoption as an heir.  Eschatology remains a judgement, but a judgement in relation to someone unique and singular.  It dissolves the order of universality and law in favour of a unique order for every heir.

             Universality is synchronic and atemporal.  Eschatology is diachronic and suspended.  Eschatology proceeds by promise and fulfilment, by announcement and arrival, by downpayment and full inheritance, by calling and justification, by suffering and the revelation of glory.  The end approaches.  It is eagerly awaited.  This is the second problem of political theology: what is the messianic temporality, given that glorification is still awaited, yet the messianic era has already arrived?  When will the messianic politics be accomplished?

             Universality expresses a sovereign power enacted through judgements.  Sovereign power is exercised through the threat or execution of exclusion from the sphere of the universal.  Sovereign power is exercised through death.  Eschatology, by contrast, expresses the arrival in power of a crucified messiah.  Such a messiah expresses the power to die, to be executed by sovereign power.  The death of Jesus discloses God’s power and righteousness.  This is the third problem of political theology: what is the divine power, where strength is made perfect in weakness?  How can the messiah triumph over those who execute him?

Eschatology, then, involves the overthrow of the world, including its present authorities, by the authority of a new creation.  It announces a new faith, a new politics, and a new reason.  It will no longer be possible to judge the eschatological by the universal; the universe will be judged by the eschatological.  In short, eschatology involves a difference in principle or authority – a new people, a new temporality, a new truth, a new power.  Formal categories are replaced by personal relations.  Transcendental principles are replaced by lived experiences.  For eschatology, truth is a faith, hope and love that exceed knowledge.  For the world, faith falls short of knowledge, hope falls short of power, and love falls short of governance.  Knowledge, power and governance give guarantees that they are suited to their ends – that knowledge will be correct, that power will accomplish the means, and that governance will direct the end.  Faith, hope and love may lack the guarantee of the end, lack the sign that announces the end, lack the end as already achieved, but faith, hope and love exceed all guarantees in one respect – they endure in a time before the end.  They endure in an experience.  It is a time of an ordeal or a proof.  It is a time the world wishes to avoid.  It is a time that the world wishes to save.  It is a time outside of the universal.  It is a time of contingency, and perhaps of chaos. It is a time of life, and a time of thought.  For living and thinking take time.

What, in the meantime, does Paul teach us of a new religion, politics and ontology?

 

 

Universal reason

The merit of recent readings of Paul by Jacob Taubes, Alain Badiou, Slavoj Žižek, and Giorgio Agamben is to have brought out the contemporary relevance of Paul’s thought.  Paul’s thought holds a significance which exceeds that of his immediate political context of the Roman Empire as well as exceeding his historical influence over the development of Christianity.  Paul, while not regarded as a philosopher, makes a unique contribution to understanding philosophical concepts such as law, subjectivity, truth, temporality and community.  Paul, regarded by Badiou as the founder of universalism, contributes to concepts that are philosophical because of their universality, whether formal or transcendental.  In order to contribute to such a philosophical discussion, Paul’s thought must be abstracted from its specific theological content.  One attains to the universal by means of formalism; yet formalism leaves a nostalgia for the concrete, and Paul’s thought is invoked to concretise the universal.

The context for such a surprising rapprochement between Paul and a purely secular philosophy is the contemporary ‘return of the religious’: if the foundation of a modern state has been an attempt to separate politics from theology by deploying a universal reason, the actual effect of a multitude of critiques of pure reason, from Schelling, through Nietzsche and Derrida, to contemporary critical thought, has been to demonstrate that such a universality never completes itself.  Universal reason is displaced by an undecidable yet particular element that substitutes for it in order to establish it, as an exception establishes a rule.  Exceeding the mastery of reason, one relates to this undecidable element in the way that one relates to a god.  The central problem of contemporary political philosophy is the nature of this element.  Is it excess or lack, subject or signifier, fiction or real, concealment or disclosure, exception or concrete universal, event or thing, difference or repetition, affirmation or void?  Can one substitute whatever particularism one chooses for an empty and dominating universal?  The central difficulty in identifying such an element is that one deploys an immanent, universal reason to track down the undecidable exception that substitutes for it, reproducing the very effect of undecidability that one wished to explain.  Where one hopes to encounter the fullness of life, one merely finds a symptom of its absence in a concept devoid of determinate content.  Žižek explains this logic according to which universality acquires actual existence in a particular element that is unable to achieve its full identity:

 

the point is, rather, that the singular agent of radical universality is the Remainder itself, that which has no proper place in the “official” universality grounded in exception.  Radical universality “covers all its particular content” precisely insofar as it is linked through a kind of umbilical cord to the Remainder – its logic is: “it is those who are excluded, with no proper place within the global order, who directly embody true universality, who represent the Whole in contrast to all others who stand only for their particular interests.” (Žižek 2003: 109)

 

             Paul is invoked by Agamben as a theorist of the remainder; he is invoked by Badiou as the true founder of universalism.  In practice, Badiou, Žižek and Agamben utilise Paul as a singularity, exception or remainder who confirms their philosophical systems: he guarantees a passage from abstraction to the truth of singularity.  Agamben explains this explicitly: the law is suspended in a state of exception in order to capture all that is outside the law (Agamben 2004: 178).  Then the recent turn to religion – or rather, ‘religion without religion’ – in contemporary critical philosophy does not affirm religion as such; instead, it is an attempt to recapture the obstinate and persistent cult for the sake of a resurrected, universal, secular reason.  The cult of universal reason is re-established by including its exception; at the same time, religion is de-fused of its cultic potential.  The turn to Paul as the founder of universalism is thus an attempt to maintain an immanent piety – a religion of the Son without the Father, of the event without the Resurrection, of the messianic without the messiah, of religion without religion – so as to contain an obstinately inescapable political theology once more within the limits of reason alone, that is, within the sphere of the universal.

Philosophical universalism is necessarily hostile to the essence of Paul’s message: far from monotheism deriving from universality, as Badiou maintains in saying that the ‘One is only insofar as it is for all’ (Badiou 2003a: 76), universality derives from monotheism: the all only is insofar as it is subjected to the One.  This is manifest in the stubborn persistence of political theology in the secularised cult of the universal.  Or as Paul puts it, ‘yet for us there is one God, the Father, from whom are all things and for whom we exist, and one Lord, Jesus Christ, through whom are all things and through whom we exist’ (1 Cor. 8.6).  Moreover, such universality is eschatological: ‘When all things are subjected to him, then the Son himself will also be subjected to the one who put all things in subjection under him, so that God may be all in all’ (1 Cor. 15.28).  Paul has no need of universality because he worships God.  Paul has no need to understand all things because he still hopes to be transformed by God who has the power to subject all things to himself (Phil. 3.21).  There is no evidence for Agamben’s unargued assertion that eschatology is a ‘dangerous misunderstanding’ of Paul’s messianic announcement (Agamben 2002: 5).  Paul never ceases to proclaim a final judgement and coming end.

For a political theology, the nature of divine power explains the nature of messianic temporality and the nature of the messianic community. For the fundamental question of political ontology, or what constitutes a political subject, and the fundamental question of political agency, or how to bring about an event, can only be resolved in political theology by a solution to the fundamental question of piety: what is true worship?  Beyond the legal power of the constitution of a people, and beyond the sovereign power of agency, there remains a power that is made perfect in weakness, apart from law and dominion: piety.  The messiah brings neither law nor power but piety.  The revelation of this impotent power is the true contemporary significance of Paul’s political theology.

 

Secular piety

Paul’s announcement contradicts the guiding assumption of our secular age that the religious qua religious has been superseded in the political constitution of our world.  In secular thought, religion can only return to undermine the pretensions of a purely secular, universal reason in a form stripped of its authority and essence.  Yet if the secular universal can never be fully constituted, then neither can the secular world.  The political constitution of our world must also still be built on religious foundations – there remains an obstinate and persistent cult at the source of power even in capitalist democracy.  Just as it is the temporality of truth that has called modern notions of reason into question, it is also temporal existence as such that demonstrates the persistence of piety.  For the singular nature of temporal existence escapes comprehension by the universal.  Worship is inevitable for any thinking that takes time – that receives the gift of its time by passing it on – for one shows value, respect, concern or interest by spending time.  In practice, we determine ourselves by the ways in which we distribute our attention and order our action.  Yet here there is no necessity linking cause to consequence – we do not know precisely what effects our attention will have.  Since the pivot linking our attention to its result is invisible, any act of attention is an act of faith – we trust that we will be granted a suitable future.  We appeal to an invisible causality.  Radical contingency implies transcendence.  The persistence of piety may be discerned in our temporal conduct itself.

             Such piety is manifest in both theoretical abstraction, the substitution of symbols for actual entities, and economic abstraction, the substitution of symbols of value for use-values. Saving time forms the essence of the Enlightenment project of emancipation: if we are liberated from the constraints of natural necessity that may foreshorten our lifespans, and if we are liberated from the constraints of social obligation that occupy our time, then we have true freedom to become what we wish to be.  Economic rationality depends on a symbolization of time, so that a calculation can be performed that minimises our relative expenditure, while maximising our control over nature through technology, and maximising control over social obligation through money.  The certainty that attaches to economic rationality derives from its proofs in practice – technological invention and acquisition of wealth.  Yet the knowledge, power and wealth acquired are always local and partial – projecting a future when liberation will be complete, economic rationality is faith seeking understanding.  In this total future, abstract symbols of time will effectively represent a time that has become open, empty, and undetermined, in a glorious, heavenly future where the passage of time is no longer constrained by natural necessity or social obligation.  Only as such will the ‘secular’ sphere be constituted, the sphere of the present age untrammelled by obligation to repeat the past, or anxious expectation of the judgements of the future.

             Failing the arrival of this universal, we substitute a particular representation of a universal value: money substitutes for the universal equivalent it does not have time to become.  The particular price of things represents what their universal value might be.  Yet this substitution of the particular for the universal – a key issue for contemporary philosophy – has significant effects.  In the first place, the value of money is transcendent: it is a promise, taken on faith, and only realised to the extent that this faith is acted out in practice in exchange.  In the second place, since money is both a means of acquiring value as a particular commodity and a measure of value as a universal equivalent, then it posits itself as the supreme value, the precondition of access to all other values that involve social interchange beyond bonds of reciprocity or communities of shared faith.  Whatever our own individual or collective values, we must value money first as the means of access to all other values.  In the third place, money is only ‘value in motion’: one cannot achieve profitability without investing that money.  Here, again, the value of assets is deterritorialised from their intrinsic worth since it is determined by their expected yield, their anticipated rate of return.  The value of assets is determined by speculative projections.  In the fourth place, capital is essentially a speculative value – it is a promise of future wealth.  It is credit: an offer of value in advance.  It cannot be understood according to an eternal ontology as accumulated wealth; it cannot be understood according to a temporal ontology as ‘value in motion’. Both appeal to the promise of a future return. Being transcendent to material and social reality, yet the pivot around which material and social reality is continually reconstructed, financial value is essentially religious.  A new political ontology will be required to explain how our contemporary world order is founded upon an idolatrous and unrealistic eschatology.

             The essence of contemporary money – created by fiat in the form of credit or loans by being entered by banks onto records of accounts – is debt.  Credit offers an ambivalent eschatology: on the one hand, credit may promise a means to realise future wealth; on the other hand, credit incurs a liability to produce future wealth in order to repay the loan.  On the one hand, capital offers to the faithful the promise of future prosperity; on the other hand, capital offers to the unsuccessful a future of expanding debt, of endless labour as debt-bondage, or of exclusion from the means of production and subsistence.  Credit leads to the ultimate form of judgement by works: one is judged upon economic performance.  In contemporary capitalism the saved or elect are those who prosper, can gain access to credit, and so can render their demands effective.  Capitalism selects a prosperous remnant.  Moreover, for this remnant, final judgement is perpetually deferred: for if the value of all assets is essentially a speculative value then at every stage the value of assets is determined by the next wave of anticipations about the future.  Thus this future never comes: it is purely ideal.  Financial value is essentially a degree of hope, expectation, trust, or credibility.  It holds no reality.  It offers no proof.  It is a spectral power, invulnerable to law and force alike.  It is the power of piety.  The critical discourse on such a power is political theology.

 

 

Paul’s gospel

Paul’s concern is political theology as such – in the sense explained two centuries earlier by Varro, and later cited by Augustine: deum colere kata ta nomina, the correct and public interaction with the gods (City of God 6.5, cited in Terpstra and de Wit 322).  The sphere of the political is not confined to law and right on the one hand, and sovereignty, agency, force and subjectivity on the other.  It also consists in piety: the polis constituted itself in public through cult, sacrificial rituals, ceremonies and festivals.  At the heart of Paul’s discussions are circumcision, the observation of special days, the eating of meat offered to idols, and ‘works of the law’ – primarily the temple cult as prescribed in the Torah.

             Such an assertion may seem all the more paradoxical, given that the Pauline churches practised what must have appeared to the ancient world as a form of atheism.  For ancient religion centred around sacrifice, around rites relating to home and family, and around agricultural and commercial productivity, all overlaid by a thin veneer of piety relating to the state.  All this, the heart of ancient religion and society (whether Jewish, Greek or Roman), was missing from the Pauline churches (Stowers 2001: 87).  Paul’s astonishing assertion that there is no longer Jew or Greek, slave or free, male or female amounts to an abolition of the ancient social order.  In contrast, Paul attempted to establish a new order, the ecclesia, based on Christ.

For Paul’s political thought we must turn to his announcement of the gospel at the opening of his epistle to the Romans:

 

Paul, a slave of king (christos) Jesus, called to be a herald (apostolos), appointed to the task of the proclamation of the kingdom of God (euangelion theou), which God had promised beforehand through his proclaimers in the sacred writings, the proclamation of the God’s Son, the successor to king David, who was revealed as God’s king (huios theou) in power and holiness by resurrection of the dead, king Jesus our master, through whom I have received the commission and power to bring about the loyalty of all the Gentiles to honour him, including yourselves who are called to his service. (Rom. 1:1-6 – my translation[1]).

 

The lengthy argument of Romans is bracketed by this and a concluding quotation from Isaiah: ‘The root of Jesse shall come, the one who rises to rule the Gentiles; in him the Gentiles shall hope.’ (Rom. 15.12) To write this to Rome is to announce that Caesar has been superseded by the Jewish messiah.  Paul’s ‘gospel’ or euangelion recalls the good news of Isaiah that God is returning to Zion to judge and redeem the nations (Is. 40.9, 52.7 – cited in Rom. 10.15); it also echoes the imperial announcement of a great victory or the accession of an emperor (Wright 2000:165).  The phrase ‘son of God’ has Davidic messiahship as its primary meaning (as in Ps. 2.7, 2 Sam. 7:14; see Wright 2000: 167); it also parodies the divine pretensions of the Roman imperial dynasty (Elliott 2000: 23).  If Jesus has been crucified under Roman authority but vindicated by God – as in Paul’s vision of the risen Christ at the right hand of God – then God is already at work bringing about his kingdom (Elliott 2000: 23).  Paul’s eschatological message could hardly be more political: ‘Then comes the end when he hands over the kingdom to God the Father, after he has destroyed every ruler and every authority and power.  For he must reign until he has put all his enemies under his feet.’  (1 Cor. 15. 24-5)  Such is Paul’s gospel announcement: not justification by faith, not peaceful coexistence between Jewish and Gentile Christians, but an eschatological victory.  It is hardly surprising that Paul was so frequently silenced and persecuted by the authorities; it is hardly surprising that Paul was persecuted by other Jews, since open dissemination of the messianic gospel could put the entire Jewish community at risk (Horsley and Silberman 2002: 143-9).  It is hardly surprising that Paul’s scandalous gospel has rarely been heard in the history of interpretation.

We therefore propose that Paul was attempting to found a new social order based on rational worship of the one true God. It will be objected that Paul rarely discusses politics, and even when he does so, he counsels submission to the governing authorities.  This objection belies the biographical evidence.  In spite of Paul’s boldness, we learn of necessary precautions in his biography, and can infer their existence in the epistles.  We may note that the famous passage on submitting to the governing authorities is framed by an exhortation to ‘overcome evil with good’ (Rom. 12.21) implying that submission may be a part of non-violent resistance, and a clear allusion to Jesus’ saying on taxes, ‘paying honour to whom honour is due’ (Rom. 13.7) implying that the authorities need to earn honour.  Indeed, to demote the emperor to the status of a temporary servant appointed by God to administer justice leads one to infer how poorly such a role is currently being fulfilled (O’Donovan 1996; Stubbs 2004).

Yet the obedience of faith does not require direct political revolt.  Paul’s supreme political and revolutionary gesture was to proclaim a rational worship (logiken latreian):

 

to present your bodies as a living sacrifice, holy and acceptable to God, which is your spiritual worship.  Do not be conformed to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s, so that you may discern what is the will of God – what is good and acceptable and perfect. (Rom. 12.1-2)

 

Paul’s principal aim was the renewal of worship of the one true God in spirit and in truth.  In the Christian communities, love was to fulfil the law (Rom. 13.10), superseding the constitution of governing authorities; Christ was to be the new Lord, superseding all principalities and powers (Rom. 8.38-9); and spiritual worship in Christ was to replace sacrificial ritual.  If Paul’s political programme now seems invisible, this is simply because it consisted of a renewal of worship, rather than a direct renewal of social structure or sovereign agency. If this is interpreted merely as a Hellenizing call to reason (Boyarin 1994) then such a political theology would appear to have little contemporary relevance; we have despaired of people ever becoming reasonable.  Yet divine wisdom, for Paul, remains entirely different from human logic: it is demonstrated ‘not with plausible words of wisdom’ but with Spirit and power (1 Cor. 2.4).  At the heart of Paul’s gospel, his call to worship, was a defence of God’s honour by proclaiming his power and justice: he aimed to convert worship from one code of honour to another.

For Paul, the gospel was a public demonstration of the righteousness of God.  A different conception of ‘proof’ is offered here.  For to proclaim God’s honour among the Jews and Gentiles of Rome was to meet with hostile accusation; God’s honour had not been directly demonstrated, as had the rule of Caesar.  For the imperial cult was justified by works, both in terms of victories won and benefits established for the people: the benefits accrued by works were regarded as due reward for righteousness (Rom. 4.4).  This is precisely the ideology of empire: that power is evidence of righteousness, and weakness the evidence of failure.   Paul’s strategy is not only to cast shame on the achievements of pagan morality under the justice of the Caesars (Rom. 1.18-32), but also to name as sin and idolatry the very principle of judgement and accusation.  For it is this principle that formed the basis of pax Romana: the rhetoric of power attributes imperial success to a combination of force, fortune and virtue; it imposes judgement upon all those who question the peace and prosperity achieved by force.  Jacob Taubes has suggested that ‘the concept of law  . . . is a compromise formula for the Imperium Romanum’ (Taubes 2004: 23).   The paradox of passing judgement is that you condemn yourself (Rom. 2.2, echoing the Jesus tradition in Matt. 7.1-5).  The very act of moral condemnation exercises a symbolic violence to justify actual violence; the condemnation of imagined enemies is the essence of imperialism.  Paul takes issue with both Hellenistic and Jewish notions of nomos expressed in the formula, ‘We know that God’s judgement on those who do such things is in accordance with the truth.’ (Rom. 2.2). This is the imperial pretension: the universalisation of law.  Paul discloses how law can become an autonomous power opposed to God.  For there must be a temporal separation between law and the divine will: if God acted instantaneously to repay each according to their deeds, then there would be no distinction between moral and natural law, and both sin and grace would be unworkable in practice.  Instead, God allows an interval of kindness and forbearance before the day of wrath when God’s righteous judgement will be revealed in order to allow for repentance (Rom. 2.4-5).  Indeed, an eschatological suspension of judgement is essential to allow for divine transcendence and freedom, as well as to allow for true human repentance and worship.  Temporal delay is essential for piety.

             Paul’s gospel is that God will judge the secret thoughts of all through Jesus Christ on a future day (Rom. 2.16).  It is the futurity of such judgement that undermines any pretension to embody a divine order within the world.  Although such a future judgement may be in accordance with the law for those under the law, and in accordance with deeds for those apart from the law, Paul’s main point is that the law does not make righteous.  Indeed, judging by the law leads to sin.  Paul therefore explores a temporal lapse in the law that belongs to the law as such.  This is not to overthrow the law but to uphold it (Rom. 3:31) – for judgement will come in the end.  Although the law is holy and just and good, there is another law at work in the body, the law of sin (Rom. 7:23).  It seizes an opportunity in the commandment: Paul’s strange condemnations of Jews for breaking the very laws that they teach – including accusations of stealing, adultery, and robbing temples (Rom. 2.21-2) – make little sense according to the standard interpretation, that prohibition arouses an uncontrollable desire.  The famous passage in Romans 7 should not be interpreted anachronistically in subjective or psychoanalytic terms: only the prohibition against coveting could lead to temptation.  Instead, it should be understood in public and political terms: law leads to boasting, judging, condemning and death.  Law is supplemented by dominion – the dominion of sin, the passion to dominate (Rom. 6.14).  Only by submitting oneself as an instrument of righteousness can one escape the dominion of death (Rom. 6.13).

Paul replaces a public judgement on the basis of present evidence according to a universal law with a future judgement on the basis of secret thoughts according to the Spirit.  This is not a rejection of judgement nor an indifference towards deeds.  Paul could hardly be more explicit that even Christians will be judged by works, ‘so that each may receive recompense for what has been done in the body, whether good or evil’ (2 Cor. 5.10; see also Rom. 14.10; Phil. 1.10, 2.12-13, 3.13-14; 1 Cor. 6.9-10).  The Christian innovation (Matt. 6.1-24) that Paul shares is that the basis on which people will be judged will be their secret thoughts, not their public works, for justification by public works leads to boasting – and, by implication, to the condemnation of others.  The central point is as follows: ‘Now to one who works, wages are not reckoned as a gift but as something due’ (Rom. 4.4).  To justify oneself by one’s works is to attempt to make a claim upon the divine; it is to exercise impiety.  It is an attempt to establish a contractual relation to the divine, to equalise what is unequal.  It is an abuse of sacrifice.  Moreover, the benefits accrued by works are regarded as due reward for righteousness.  This is precisely the ideology of empire: that power is evidence of righteousness, and weakness the evidence of failure.  There is no reason to read justification by works as a particularly Jewish phenomenon: the rhetoric of empire justified imperial power by the works performed for the people.  Paul will consistently invert such self-justifications in his epistles: if one is to boast in one’s hope of sharing the glory of God, one may also boast in suffering (Rom. 5.3).

In place of the axis combining law, public evidence, and imperial force, one finds an axis combining temporal delay, secret thoughts, and divine righteousness.  Paul inhabits the interval between law and final judgement, between the vindication of the messiah and his return in power, between temporal worship and ultimate glory.  As such, universality is not yet possible.  Truth is conceived rigorously as that which is to come.  Nevertheless, in the meantime, Paul neither laments nor celebrates such incompletion, he neither negates nor affirms all things, but ‘forgetting what lies behind and straining forward to what lies ahead,’ he presses ‘on toward the goal for the prize of the heavenly call of God is Christ Jesus’ (Phil. 3.4).  If the interval of eschatological suspension is a test or ordeal, if it is filled for Paul with sufferings, if he is to be judged as having the righteousness of God based on faith, if he is to be found in Christ, then it is only by his spiritual worship, his orientation towards God in Christ, his abiding in faith, hope and love, that he may be saved.  It is piety itself that is the missing, undecidable element.  Piety is the ‘secret thought’ attaching to the deed.  For piety is an endurance in time.

 

 

The Righteousness of God

Worship is offering glory and honour to God.  In the context of a dominant imperial cult, worship of the true God must be vindicated – it is a vindication of Judaism that Paul is called to proclaim: Christ confirms the promises given to the patriarchs (Rom. 15.8).  For true piety to be possible, God’s righteousness must be revealed.  God’s faithfulness to his covenants is called into question if the promises of God to the patriarchs are not fulfilled – if his people are not faithful, or if they do not dwell in peace but under Roman law and domination.  To vindicate God, the messiah must first renew worship, before returning to renew a political order.  If worship by conducting ‘works of the law’ leads to self-justification or boasting, then the messiah must demonstrate how worship can be vindicated even without such evidence of its piety.  The work of the messiah is an ordeal or a proof – a public test of the righteousness of piety. 

             Paul’s gospel also offered its own proof in ‘Spirit and power’ – a proof quite unlike any abstract or empirical proof one might offer today.  It is closer to Duns Scotus’ proof of contingency, cited by Arendt and Agamben (Agamben, 2004: 69-70): anyone who denies contingency should be tortured until they admit the possibility that they might not be tortured.  Such an ordeal concentrates the mind; it enables the perception of that which matters supremely, but may be concealed under normal conditions of thinking.  Apart from the law, prior to circumcision, Abraham’s faith was similarly tested in order that it be reckoned as righteousness (Rom. 4.5).  The heart of worship is located in faith in God’s eschatological promise rather than the sacrificial cult prescribed by the law.  The ordeal undergone by the messiah was a proof of the glory of God, showing the possibility of righteousness when all dominion, all external evidence or ‘works’, and all public respect is stripped away.  Moreover, piety before such righteousness is the true divine power.  The paradox of honour is that to be truly honourable one remains loyal to one’s calling in weakness and shame.  The true glory of God can only be shown in weakness and by means of weakness:

 

But we have this treasure in clay jars, so that it may be made clear that this extraordinary power belongs to God and does not come from us.  We are afflicted in every way, but not crushed; perplexed, but not driven to despair; persecuted, but not forsaken; struck down, but not destroyed; always carrying in the body the death of Jesus, so that the life of Jesus may also be made visible in our bodies.  For while we live, we are always being given up to death for Jesus’ sake, so that the life of Jesus may be made visible in our mortal flesh.  So death is at work in us, but life in you. (2 Cor. 4.7-12; emphasis added)

 

Paul reveals the power of Christ by recounting the matters that show his own weakness and shame.  Escaping from Damascus in a basket let out of a window epitomises Paul’s encounter with imperial authority (2 Cor. 11.30-2).  The heart of Paul’s honour is as follows: ‘We are treated as impostors, and yet are true; as unknown, and yet are known; as dying, and see – we are alive; as punished, and yet not killed; as sorrowful, yet always rejoicing; as poor, yet making many rich; as having nothing, and yet possessing everything.’ (2 Cor. 6.8-10)

             It is precisely such an ordeal that is undergone by the messiah.  The eschatological suspension is not merely of nomos – a cosmic and social law – but also of power, of honour, and, at the limit, a suspension of life itself.  What is at stake, here, is the fundamental question of ontology: what is the remainder?  The messianic experiment is a ‘purificatory’ approach to the Real, stripping away layers to reveal the kernel within (Žižek 2003: 64 borrows the terminology from Badiou).  If Being is nomos, then nothing exists but a set of particular judgements.  The identity of the remainder fails to coincide with itself as a thing differs from the judgement or truth about it.  According to this conception, the transcendence of the divine is maintained in the gap between accusation and punishment, between a thing and its truth.  This ontotheological conception of truth is maintained, in the Western tradition, whenever truth is ‘presented, after Plato, as localizable in the proposition’ (Badiou 2003b: 59).  The Nietzschean charge of ressentiment against life may be applied here.  If truth is submitted to thought, by contrast, not as a judgement but as a process in the real (Badiou 2003b: 61), then it admits a universal affirmation.  For Badiou, Paul preaches not a cult of death as Nietzsche maintained, but the killing of death, the foundation of a universal ‘yes’ (Badiou 2003a: 71): in Christ ‘every one of God’s promises is a “Yes”.’ (2 Cor. 1.20)  Badiou contrasts a traditional, transcendent ontology of judgement with a modern, immanent ontology of pure affirmation.

             Paul’s own ontology goes beyond law and power: it is neither a transcendent judgement nor an immanent affirmation.  It cannot be consistently maintained that Paul has no path of the cross, and attributes no redemptive significance to the apostle’s tribulations (Badiou 2003a: 67): Paul’s ministry of reconciliation, as an ambassador for Christ, makes the life of Christ visible through being given up to death (2 Cor. 4.11, 5.19-20); Paul wishes to know the power of Christ’s resurrection through the sharing of his sufferings (Phil. 3.10).  Paul maintains a purely theological ontology:

 

For I am convinced that neither death, nor life, nor angels, nor rulers, nor things present, nor things to come, nor powers, nor height, nor depth, nor anything else in all creation, will be able to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God in Christ Jesus our Lord.  (Rom. 8.38-9)

 

For Paul, the Real is neither Event, nor Void, nor displacement of the Void, but the ‘love of God in Christ Jesus’. 

             Divine affirmation replaces both transcendent judgement and immanent affirmation.  There is no necessity for such a love, no argument for its existence.  There is only the evidence of testimony – the testimony of the messiah, the apostolic testimony to the resurrection of the messiah, and the testimony of the Spirit.  Testimony itself does not constitute proof.  The true proof, the true reasoning, is the ordeal.  Only through an ordeal do secret thoughts become public.

 

 

The Time of Salvation

If Paul’s preaching aims to convert his listeners from one code of honour to another, one cultic practice to another, it is through the renunciation of all spiritual benefits (Phil. 3.7-10).  Insofar as one no longer claims a ‘righteousness of one’s own’, an ontological independence, one can be considered to have become like Christ in his death (Phil. 3.10), to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Gal. 2.20), to have been ‘united with him in a death like his’ (Rom. 6.5).  Paul’s gospel, however, announces that one still has a truth beyond death, beyond all powers and events, a free gift of righteousness, the righteousness from God, consisting of the love of God in Christ Jesus.  Then just as one is united in Christ’s death, one may also be united in his resurrection.  ‘The death he died, he died to sin, once for all; but the life he lives, he lives to God.’ (Rom. 6.10)  The modern belief that it is rigorously impossible to believe in the resurrection of the crucified (Badiou 2003a: 5) is irrelevant: Paul affirms that all people are mortal.  We are concerned with an eschatological ontology of piety, not a universal ontology of human mortality.  We are concerned with the end, the limit of human existence.  Is the believer included under a universal law of nature, the law of death, or is there any remainder when the flesh is stripped away?  Can temporal existence be delimited as being-towards-death (as in Heidegger)?  This is to assume that the person constitutes itself in its temporal orientation.  Is the believer constituted by an immanent self-affirmation (as in Nietzsche)?  This is again to assume that the person constitutes itself in its temporal orientation.  It is to assume that time is constituted by the person as a project, rather than time happening to the person.  Both the law of mortality and the affirmation of power are temporal orientations, modes of piety.  They offer no universal proof, for time has not yet come to an end; the possibilities for modes of orientation to time are not yet circumscribed.  To determine our true ontological constitution it is necessary to put the matter to the test.

             Life itself consists in the delay between deed and judgement.  It is in the time that remains, between and beyond synchronic universals, that one may be saved.  It is a time of pure contingency, beyond reason.  Sin, as idolatry, is an attempt to anticipate the end, to enclose all possibilities within a universal limit, whether a limit of judgement or a limit of power. It is an attempt to bring death forward, so that life may be judged from the perspective of its anticipated completion, from the perspective of death.  This very life of sin is a life of death; it is a life that leads to death, as well as anticipating death in its every moment.  In short, the ‘secret thought’ of sin is a worship of death.  By contrast, the ‘secret thought’ of the resurrection is that ‘the sufferings of this present time are not worth comparing with the glory about to be revealed to us’ (Rom. 8.18; cf. 2 Cor. 4.17).  As in Adam all die, so in Christ shall all be made alive:

 

So it is with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What is sown is perishable, what is raised is imperishable.  It is sown in dishonour, it is raised in glory.  It is sown in weakness, it is raised in power.  It is sown a physical body, it is raised a spiritual body.  (1 Cor. 15.42-4)

 

The eschatological message is that ‘the perishable body must put on imperishability, and this mortal body must put on immortality’ (1 Cor. 15.53).  Alternatively, ‘if the earthly tent we live in is destroyed, we have a building from God, a house not made with hands, eternal in the heavens’ (2 Cor. 5.1).  At any rate, ‘if anyone is in Christ, there is a new creation: everything old has passed away; see, everything has become new!  All this is from God’ (2 Cor. 5.17-18).

             The proof in power of this coming glory is therefore already available to those who are willing to undertake the ordeal of baptism into the death of Christ.  It is not a proof based on evidence or plausibility; indeed, the very suggestion is incredible.  Yet the work of universal reason, which consists in the substitution of atemporal symbols for temporal experiences, eliminates in advance the possibility of such a proof.  Disavowing the temporal thinking that makes it possible, universal reason attempts to save time by aspiring to a knowledge that is potentially universal, based on evidence that is repeatable, public and exchangeable.  Such a truth is for anyone or about anything, it does not matter which; it is independent of value – it does not matter.  Such a truth projects a time when thinking will be complete, when reason will follow of necessity; it projects the end of time – it is thoughtless.  Such a truth assumes the objectivity of objective truth, an objectivity that can never be demonstrated since no truths are demonstrated independently of thinking – it rests on a faith.

             Paul, by contrast, bears witness to an ordeal that is against reason.  It is an ordeal that matters, a duration that is thought-provoking, a faith oriented around a singular awareness.  The notion of a crucified messiah is scandalous to Jew and Gentile alike: what kind of God puts forward his servant as a sacrifice of atonement (Rom. 3.25)?  It is difficult to know which reception betrays love the more: on a sceptical reading, God’s sending of his son to die is a betrayal of love; to hold out self-sacrifice as a paradigm of love is destructive, nihilistic and oppressive.  Life as a whole is not affirmed and loved.  Yet such a law of affirmation allows of no exception; it admits no true demonstration of love.  On a pious reading, one enters into a costly exchange of self-sacrifice: if Christ dies for us, then bought by him, we become slaves of righteousness (Rom. 6.18).  If Christ dies for all, it is so that those who live might live no longer for themselves but for Christ (2 Cor. 5.15).  In short, the pious reading submits us to a costly exchange once more, where an infinite obligation is owed to God.  Moreover, God is submitted to a new law of love, whereby those he hoped to redeem become enslaved.  This is the reading that Paul appears to adopt, although he does qualify that he is speaking in human terms because ‘of the weakness of your flesh’ (Rom. 6.19).  Now in both these readings, what is obscured is the voice of Christ himself.  If Christ is merely objectified in a transaction between God and humanity then it is hardly surprising that God and humanity will become objectified too.  Paul maintains the rigorous transcendence of divine wisdom over and above any manifestation in law or in gift-exchange (Rom. 11.33-5):

 

O the depth of the riches and wisdom and knowledge of God!  How unsearchable are his judgements and how inscrutable his ways!

“For who has known the mind of the Lord?

     Or who has been his counsellor?” [Is. 40.13-14; cf. Job 15.8]

“Or who has given a gift to him,

     to receive a gift in return?” [Job 35.7]

 

Paul refuses to objectify Christ: at the centre of Paul’s thought is the ‘mind of Christ’ (Phil. 2.5): Christ is vindicated and exalted because ‘he humbled himself and became obedient to the point of death – even death on a cross’ (Phil. 2.8).  Christ is the supreme exemplar of true piety: Christ’s death cannot deal with sin – essentially idolatry (Rom. 1.23) – unless his ‘secret thoughts’, his mind, his righteousness is revealed.  If Jesus is to be regarded as ‘Lord’ in anything but name, his own words – echoed at many points in the epistle to the Romans (largely from the ‘Q’ material, a common source for Matthew and Luke) – should be regarded as the key to the interpretation of the whole. As Paul writes, ‘So faith comes from what is heard, and what is heard comes from the word of Christ’ (Rom. 10.17).[2]

             A key allusion qualifies Paul’s rhetoric of ‘slavery’ to God:[3]

 

For you did not receive a spirit of slavery to fall back into fear, but you have received a spirit of adoption.  When we cry, “Abba! Father!” it is that very Spirit bearing witness with our spirit that we are children of God, and if children, then heirs, heirs of God and joint heirs with Christ – if, in fact, we suffer with him so that we may also be glorified with him. (Rom. 8.17; cf. Gal. 4.6)

 

This echoes Jesus’ desperate prayer of ‘Abba, Father’ in the garden of Gethsemane (Mark 14.36).[4]  If Paul aims to found a community on a renewed worship based on having the mind and Spirit of Christ, then such worship is explained as the attitude of one who receives adoption as a child of God.  One is redeemed from slavery to the elemental spirits of the world by adoption as a child of God (Gal. 4.3-6; Rom. 8.18-39).  It is thus Christ’s Gethsemane protest, like Job’s lament, that accomplishes redemption.  One only has the opportunity of becoming a joint heir with Christ by suffering with him (Rom. 8.17), by ‘being united with him in a death like his’ (Rom. 6.5), by being ‘crucified with Christ’ (Gal. 2.20), and ‘sharing in his sufferings by becoming like him in his death’ (Phil. 3.10).  It is by having the mind of Christ that one works out one’s salvation (Phil. 2.12).

             The eschatological condition of the believer in Christ is that of having already died to sin (Rom. 6.2).  If death comes through sin (Rom. 5.12), and Christ died to sin, then ‘the life he now lives, he lives to God’ (Rom. 6.10).  Instead of relying on a mythological or magical effect of baptism, Paul urges his unknown Roman addressees to die to sin so as to live to God (Rom. 6.11-12).  It is here that eschatological suspension gains a new dimension.  Instead of referring only to the judgement that is to come, as though one’s true being was not one’s mortal body but the divine judgement on one’s deeds, and instead of referring only to the event of resurrection, as though one’s true being was not one’s mortal body but one’s eternal body in heaven, one’s true being is the Spirit as a guarantee or downpayment (arrab­­on) of salvation (2 Cor. 5.5).  One dies to the flesh by setting one’s mind on God through Christ: instead of setting one’s mind on earthly things, one’s citizenship is in heaven (Phil. 3.19-20).  Thus the only possible demonstration of the truth of Paul’s scandalous gospel is its proclamation in Spirit and in power (1 Cor. 2.4).  For no one understands God’s secret wisdom, or what is truly God’s except the Spirit of God (1 Cor. 2.11).  One only understands by having the mind of Christ (1 Cor. 2.16).  In short, it is only by encountering the glory of God shining in the hearts and minds of Christ’s ambassadors that Paul’s gospel makes its appeal.

 

 

 

 

Conclusion

Paul’s political theology is truly exceptional.  It lacks plausibility; it lacks universality; it lacks a law or sovereign power.  It cannot be reasonably recommended; it can only be proclaimed.  What, then, are we to make of its contemporary significance?  Does it hold any significance beyond the secret thoughts of the believer or the eschatological resolution of time?  Paul’s gospel proclaims Christ as the final end of reason, power and worship.  In the interval before the end, in default of a final demonstration or parousia of truth, power and glory, can anything be learned of a new ontology, politics, and religion?

             For the philosopher, Paul’s thought raises a number of problems.  Reasoning itself is a temporal activity, suspended between the significance of the problems it divines and the truth towards which it aspires.  The predicament of philosophy is itself eschatological.  Between the formal universal of thinking and the concrete universal of being there lies a remnant, a time of thinking.  This time of thinking is to be saved or spent, disavowed or given.  Yet whether saved or given, the experiential ordeal of the test of time may be concealed or objectified.  Eschatology draws attention to the dimension of piety that is present in all thinking.  It exposes the illusion of a universal reason capable of judging religion, and replaces it with a typology of determinate modes of thinking. Formal categories are replaced by personal relations.  Transcendental principles are replaced by lived experiences.   Whatever the truth of Paul’s gospel, it creates a new reason, a new era for philosophy.

             For the political thinker, Paul’s thought revives the question of the public cult in politics.  Whereas in Paul’s time the public cult revolved around worship of the state or emperor, in our own day the public cult revolves around the worship of money.  For the principal political determination is not the legal constitution of a people nor the power of sovereign agents or democratic subjects, but the social ordering of time in work, in leisure, and in worship.  Whatever the truth of Paul’s gospel, it creates the possibility of a new kind of political action consisting in the social re-ordering of time.

             For the theologian, Paul’s eschatological thought continues to offer a distinctive challenge: instead of explaining divine power in terms of law or subjectivity, divine power itself becomes the principle upon which all else must be explained.  The task of theology is to subordinate reason to God rather than God to reason.  Far from this limiting the power of reason, it is an enriching of reason with new powers that it would not otherwise possess.  If the work of God is manifest in temporal experience, then it will no longer be possible to understand divine power in terms of anthropomorphic analogies drawn from a universal human nature.[5]  The righteousness of God may only be revealed in the determinate character of the piety of God’s servants.  Whatever the truth of Paul’s gospel of Jesus as the Christ, its very proclamation produces a new creation of philosophy, politics and religion.  No doubt, such a new creation has not yet come to fruition.  It can, nevertheless, be regarded as nothing less than a downpayment of the Spirit of God.

             In each of these respects, the political theology of Paul remains truly exceptional.


References:

 

Agamben, Giorgio (2002)  ‘The Time that is Left’, Epoché 7(1): 1-14.

 

Agamben, Giorgio (2004)  Le temps qui reste, trad. Judith Revel (Paris: Editions Payot et Riv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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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nsley, E. J. (1960)  The Imitation of God in Christ: An Essay on the Biblical Basis of Christian Spirituality (London: SCM).

 

Wright, N.T (1997)  What Saint Paul Really Said.  Oxford: Lion.

 

Wright, N.T. (2000)         ‘Paul’s Gospel and Caesar’s Empire’, in Richard A. Horsley (ed.), Paul and Politics.  Harrisburg: Trinity Press International.

 

Žižek, Slavoj (2003)         The Puppet and the Dwarf: The Perverse Core of Christianity.  Cambridge, MA: MIT Press.

            

 

 

 

 

 



[1] This translation is inspired by the discussion in Wright 1997.  Wright cannot be held responsible, however, for any deficiencies.

[2] Indeed, if Jesus is only present as a name, event or fable, then the entirety of Christian theology collapses into a nominalism, docetism or gnostic redeemer myth – as the majority of readings of Paul tend to do (an exception being that of E. J. Tinsley (1960) who placed the imitation of Christ at the centre of Pauline thought).

 

[3] The other key allusions for this reading of Romans are as follows: ‘for in passing judgement on another you condemn yourself’ (Rom. 2.1, echoing Matt. 7.2, Luke 6.37, John 8.7) has already been discussed.  Paul later repeats this allusion as a fundamental principle for life in the Christian community (Rom. 14.4, 10, 13): it is his reason for tolerating both particular observances and none.  Secondly, ‘For those who live according to the flesh set their minds on the things of the flesh, but those who live according to the Spirit set their minds on the things of the Spirit’ (Rom. 8.5) – it echoes the meaning of the sayings on storing treasure in earth or in heaven and of the eye as the lamp of the body (Matt. 6.19-23).  Jesus enjoined his followers not to worry about food, but to ‘strive first for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shall be given to you as well’ (Matt. 6.33).  Conduct will be judged on whether it is undertaken ‘in honour of the Lord’ (Rom. 14.6).  It is by having the mind or Spirit of Christ that God will give life to those in Christ; indeed, life comes through such a Spirit (Rom. 8.11).  Thirdly, there is a set of allusions concerning the foundation of a messianic community: one should ‘outdo one another in showing honour’ (Rom. 12.10, echoing Mark 10.42-5; Luke 14.7-11); one should ‘bless those who persecute you’ (Rom. 12.14, echoing Luke 6.28); one should not repay evil for evil (Rom. 12.17, echoing Matt. 5.39); one should pay taxes to whom taxes are due, but honour to whom honour is due (Rom. 13.7, echoing Matt. 22.21, Mark 12.17, Luke 20.25); and, most significantly, love is the fulfilling of the law (Rom. 13.10, echoing Matt. 22.40, Luke 10.25-8).  If Christ is the fulfilment, goal or end (telos) of the law (Rom. 10.4), then the mind of Christ is the eschatological instantiation of the righteousness aimed at by the law.  The righteousness aimed at by the law is based on faith (Rom. 9.32).  If Paul sums up such righteousness in terms of ‘love’, it is a love that essentially consists in showing honour rather than judging.  Other allusions to the Jesus tradition recorded in the synoptics are also highly significant: the image of missionary work as a harvest (Rom. 1.13), judgement by deeds (Rom. 2.6), the justification of doers rather than hearers (Rom. 2.13), that God will judge secret thoughts (Rom. 2.16), teachers of the law as a guide to the blind (Rom. 2.19) who should teach themselves (Rom. 2.21), that one should await the unexpected arrival of the kingdom in sobriety (Rom. 13.13), that all will stand before the judgement seat of God (Rom. 14.10), that one should be wise (as serpents) in what is good yet innocent (as doves) in what is evil (Rom. 16.19, cf. Matt. 10.16).

 

[4] There is considerable doubt about the historicity of Jesus’ usage, given that Peter, James and John are portrayed as having fallen asleep immediately afterwards – nevertheless, the context of suffering with Christ in Paul’s passage in Romans alludes to the Gethsemane experience, and it is possible that the use of this Aramaic word entered the Jesus tradition because Peter remained awake long enough to hear it, on this or another occasion.

[5] This point is frequently noted, for example by Breton (1988), but rarely acted up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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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교단의 생명선교연대 홈피에 가서 긁어온 것입니다.>



교회의 해체, 해체의 신앙


김진호

(한백교회 담임목사/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당대비평>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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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찬송가공회 편 찬송집의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은 우리나라 개신교도들이 가장 애창하는 노래의 하나다. 또한 미국의 그리스도교도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또한 바로 이 '어메이징 그레이스'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주옥같은 가사 한 절 한 절이 소중하게 느껴졌던 것이리라. 사실 신실한 신앙 경력을 가진 이 가운데 자신의 죄스런 심성과 치열한 격전을 벌이지 않았던 이가 있을까? 그러나 어느 누가 이 싸움에서 승전가를 부를 수 있으랴. 번번이 실패한 채, 깊은 번뇌에 시달리던 때를 생생히 기억하는 이라면, 바로 그때 부르던 이 찬송에서 뿜어져 나오는 감동을 잊을 수는 없으리라.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는 어쩔 도리 없이 죄인으로밖엔 드러날 수 없다는 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그 죄 사함의 시혜를 베풀어줄 이를 갈망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러니 그 은혜는 놀랍고 감사하기 그지없다. 바로 이것이 이 찬송이 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공감대일 것이다. 그런데 이 찬송가의 해설에 의하면, 그 노래말의 기원은 이러하단다.



이것은 존 뉴튼의 자전적 찬송시이다. 존 뉴튼은 11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소유한 노예선에서 선원 생활을 시작하였다. 1748년 3월 10일, 그는 배를 타고 아프리카에서 영국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그때 마침 성난 폭풍우가 배를 강타하였다. 심각한 위험에 처한 뉴튼은 이때의 자신을 요나와 같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영적인 깊은 자각을 체험하였다. 그는 이날을 '영적 출생의 날'이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1754년 그는 자신을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고백하며 점차로 자신의 모든 삶을 그리스도께 헌신해 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우리가 가장 애창했던 찬송가 탄생의 배후라는 것이다. 과연 작사자 존 뉴튼에게 자신이 겪은 고통을 신앙의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 외에, 타인을 보는, 타인의 시선에서 세계를 보는 눈이 있었을까? 그에 관한 다른 정보를 전혀 갖고 있지 못한 나에게 더 이상의 질문은 봉쇄되어 있다. 어쩌면 그는 내가 품고 있는 악의에 찬 혐의에서 벗어날 자기 이력을 가진 인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다. 한데, 내가 주목하는 것은 별로 관심 기울이고 싶지 않은 그 인물이 아니다.

이 노래말을 해설하는 글귀 속에는 존 뉴튼에 관한 해설자의 깊은 존경심이 담겨져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노예선'이란 게 타인의 죽음을, 죽음 같은 삶을 대가로 해서 자신의 생명을 연명해 왔던 제도의 한 가운데 있는 장치라는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오늘날, 더구나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한 '신앙심 깊은' 그리스도교 지식인이 이렇게 해설을 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한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노랫말이 실린 찬송가가 수많은 그리스도교도들, 특히 종교적 실행practices의 전문가라는 이른바 '성직자'들의 시야에서 결코 차단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그들 대다수는 그것을 문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작가 황석영이 황해도 신천에서 있었다는 양민학살이 그리스도교도들에 의해 자행된 것이라는 사실을 소설 『손님』을 통해 발굴해낸 것은 우리 역사에서 결코 이례적인 사실이 아니다. 일제 시대 그리스도교의 항일 경력으로 자랑해마지 않은 신사참배 거부 운동의 배후에 종교적 동기 이외의 다른 것을 찾아내는 게 과연 가능한가? 이 운동에 참여했던 우리의 '자랑스런' 신앙의 선조들 가운데 제국주의의 반인간성을 읽어내려 했던 이들이 얼마나 될까? 일제로부터의 독립 이후, 그리스도교도들에 의해 남한 곳곳에서 자행된 그 잔인한 '분노의 정치'가 그리스도교 신앙과 반공주의의 결합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신사참배 거부 운동이 벌어지던 1930년대에 이미 그리스도교 신앙 속에 뿌리내린 것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한국 국가 형성 초기, 기득권 집단으로서 권력 게임에 몰두했던 그리스도교 엘리트 집단의 정치 행태가 오랜 기간 반성 없이 지속되면서 '신앙의 정치화=권력화'라는 등식이 내재화되어 '신앙의 무의식'으로 견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한편, 군부 독재정권에 의해 추진된 그 파행적 근대화가 '국가주의적 발전 전략'statist developmental strategy에 의해 가능해진 것이라면, 그것의 배후에는 일제에 의해 구축된 과대 성장한 국가적 권력기구over-developmental statist apparatus가 미군정을 매개로 하여 남한의 국가 체제 및 근대화의 토양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현실이 있다. 거기에는 중앙정부의 정책에 맹목적으로 공조하는, 전국적으로 조직된 국가기구의 협력자들collaborators(상하위 관료뿐 아니라, 동장/이장·교사·각종 종교기관장 등)의 혁혁한 공로가 밑바탕이 되고 있다. 그런데 군정기간 중에, 일제하에서 과대 성장한 국가기구의 '협력자들'과 군정당국을 중계한 주요 세력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교 지도자였다는 사실은―그리스도교 역사가들이 애써 감추려함에도―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요컨대 한국 근대의 파행성이 과도한 국가주의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은 식민주의가 한국 국가와 민족주의의 저류를 형성하고 있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그것은 군정기간의 그리스도교의 부정적 개입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 언급할 것은 독립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국가로부터 가장 큰 특혜를 받은 종교집단이 개신교와 천주교의 교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한국이 선택받은 땅이요 복음의 세계화의 새 거점이어서가 아니라, 한국 근대 국가의 야만성을 방조하고 나아가 보다 적극적으로 협력해온 그리스도교의 처세술의 소산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한국의 현상만은 아닌 듯이 보인다. 최근 미국에서 벌어진 테러 사태에 즈음해서 미 대통령 부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정의의 전쟁을 선포했다. 가해자의 역할만을 해오다 오랜만에 비로소 피해자의 자리에 서자, 분을 참지 못해 복수의 칼부림을 다짐하는 미국 대통령이나 그것에 열렬히 환호하는 그 나라 백성의 잔임함에 하느님은 무척이나 협조적이다. 미국의 현 정부가 이전 정권이 규정한 '깡패국가'라는 가상의 적에 대한 정치적 수사어를 '악의 축'이라는 종교적 어투로 재기술한 것은 이러한 패권주의적 제국의 광폭성이 신앙심과 얼마나 밀접히 연루되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 유럽인에 의해 일어난 수많은 종교적 전쟁 및 학살을 일일이 열거할 것도 없이, 몇 년 전에 벌어진 보스니아 사태에서도 그리스도교는 그 호전성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폭력의 역사에서 그리스도교의 부정적 개입의 흔적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아니 많은 경우에 교회는 그런 야만성의 역사에 가장 적극적인 행위자였다. 이것은 그 참을 수 없는 자기 중심주의를 신앙심이라고 옹호해왔던 그리스도교 역사의 필연적 부산물이라고 하면 너무 지나친 평가일까?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도 "어메이징 그레이스 ......"를 불러대며, 우리 자신만을 위로하는 종교 행위에 몰두하고 있다.

이 글에서 나는 '교회적 주체로서의 신앙'을 문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역사상 범해온 죄악상에 대한 단순한 열거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함축한다. 타자에 대한 배타적 적대성은 이미 신앙의 아비투스(習俗)abitus가 되었다. 더 이상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히 수술해서 종양 부위만 제거하면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미 내면화된(무의식화된) 신앙적 습성으로부터의 탈주가 요청되는 것이다.

예수 시대 유대교가 '성전-회당'이라는 '장소'place와 신앙을 결합시킨 종교 운동(회당적 주체화로서의 신앙)이었다면, 예수 운동은 그러한 '장소-신앙'을 탈영토화de-territorization함으로써 유대교 신앙으로부터의 탈주를 추구했다. 초기 떠돌이 예언자들의 이 운동은 특정한 장소가 담보하는 질서를 삶 자체로 오인하게 하는 담론적 장치의 부정이며, 그 장소성을 통해 형성된 질서(=영토화)에 의해 대변되는 삶의 사회적 배치 메커니즘에 대한 가로지르기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운동이 교회운동으로 전화되면서, 초기 예수 운동의 유랑적 성격이 다시 '정주settlement의 신앙'에 의해 대체되며, 유대교 회당의 그것처럼 교회운동으로서의 그리스도교는 특권화된 장소를 통해 삶의 경험 전체에 질서를 부여하려 했다. 이러한 장소의 정치, 즉 영토화territorization는 직제화 및 정전화라는 제도적 모색을 통해 구현되었다. 영토화는 경계를 중심으로 내부와 외부를 가르고 내부를 포섭하고 외부를 배제하는 담론적 장치를 통해 실행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는, 예수 시대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신앙 담론의 지배적 장소인 교회의 '외부'를 인식하는 사유 능력의 결핍을 초래했고, 삶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을 결여하게 됐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 '장소-신앙' 자체를 원천적으로 문제시할 수는 없다. 예수운동의 탈영토화가 교회 중심으로 재영토화re-territorization되는 초기 그리스도교 형성 과정의 맥락에서 본다면, 그 자체는 불가피한 선택의 하나이자 공동체 재생산의 위기에 대한 하나의 대안적 선택일 수 있었다. 다만 우리는 예수운동을 다시 성전-회당 체제의 그것과 같은 권력화된 신앙체제로 회귀시켜버린 교회주의로의 발전을 문제시하는 것이며, 오늘의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러한 라삐적 유다주의의 변형에 다름 아닌 교회주의에 불과하다는 혐의를 제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수와 교회 사이에는 유대교 회당체제에 대한 상이한 '탈주선'a line of escape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는 유대주의의 권력을 향한 욕망 메커니즘을 해체하려 했다면, 교회는 유대 종족주의로부터 탈주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반면 교회는 유대주의적 질서 체계를 하나의 모델로 삼았다. 이런 점에서 최근의 예수에 대한 역사적 읽기는 오늘날 교회주의에 대해 신랄한 비판이 될 수 있었다. 아무튼 예수가 선포했던 하느님 나라 지평이 사라져버린 교회, 그 '무신성'의 메커니즘을 넘어서기 위해, 나는 '교회의 해체'라는 문제설정을 제기하고자 하며, 이러한 '반신학'적인 문제제기를 통해 '해체의 신앙'을 대안적으로 제안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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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로서 그리스도 교회는 예전, 직제, 정전과 교리를 통해서 규정된다. 그것은 긴 세월을 반복적으로 지속하면서 정형화된 것이며, 이것들이 특권화된 지위를 구축함으로써 사람들의 삶과 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메커니즘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원사건으로, 신앙의 자기 검열장치라 할 수 있는 예수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특권성에 이의를 제기하기 한다.

예수 사건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기억은 '신의 육화'라는 고백 속에 포괄된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신이 스스로를 '퇴행'시켰다는 주장이다. 구원받아야 할 존재의 치욕스러움의 현장 '밖'에서 자신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듯 군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자신을 해체하고 그 안으로 개입해 들어왔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것은 '타자적 존재로서의 신/신상의 자기 부정'을 선언한다. 거꾸로 말하면, 이 신조를 고백하는 사람, 즉 그리스도인임을 자임하는 사람은 궁극자 초월자 전능자 등, 인간에 대한 타자성the otherness을 통해 신상을 표상하려는 욕망까지도 해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의 주류적 사유 속에서 구원/해방을 향한 메시아주의가 악을 정복하는 승리의 서사를 통해 간직되어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스도교의 원류적 사유는 '역설적 메시아주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탈권력적 실천을 통해 역사의 무대 위로 등장한 신1)인 야훼의 신상이, 후속의 역사 속에서 유대교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에서도 권력의 얼굴로 표상되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전화canonization나 교리화dogmatization는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파생된 성서의 권력화된 얼굴에 다름 아니다(「보론 참조」). 또한 직제화도 이 과정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담당한, 권력화된 '존경의 메커니즘'이었다. 요컨대 우리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는 역설의 진리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낮아짐의 역사 개입의 전통은 그리스도교에게 있어서는 매우 낯선 기억이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교가 오늘날 가로질르는 실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한데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 정통 사상의 범주 내부로 포함될만한 신상들까지도 부정한다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의 이분법은 더 이상 불필요해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는 필연성은 무엇인가? 나아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 자체가 존재할 이유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라는 '기원의 망상'을 전제한다. 마치 '상상의 공동체'(근대적 상상력의 결과로 형성된)에 다름 아니었던 민족이 국민의 존재 이유와 뿌리에 대한 인식을 선험적으로 규정했던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은 예수 자신은 그리스도인도 비그리스도인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예수와 교회를 잇는 의미의 코드화에 대한 가로지르기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그러한 코드화를 선험적으로 전제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문제제기 자체를 폐기하라는 강요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문제는 오랜 동안 의심받지 않은 채 우리의 존재를 규정해왔던 그리스도인'임'(être, 존재)이라는 선험적 가정에서 탈주하여 예수 제자'됨'(devenir, 생성)이 무엇인지를 묻는, 예수를 따르는 우리 자신의 신앙의 정당성에 대한 근원적인 되물음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어떤 담론 공동체가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과정은 통상 외부와 내부를 가르는 경계boundary를 명료화해 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다. 유대교와 자신을 구분하고, 무수한 이교들과 구분하고, 이단들과 구분함으로써 그리스도교라는 종교가 출현하게 된다.2) 하나의 종교 제도로서 탄생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타자와의 구별짓기 욕망의 소산이다. 이제까지 구별짓기의 대상이 아니었던 자들과의 차이가 특별히 부각되고, 그 차이에 절대적 의미를 부가하면서 그들과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단절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이렇게 그리스도교는 타자들, 즉 구원담론 외부의 존재들을 탄생시키게 된다. 주후 1세기 팔레스틴에서의 예수의 실천이 동시대 유대교의 배제주의적 체제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되었음에도, 주후 4세기에 이르면 이미 강력한 반민중적인 배제주의적 담론으로서 그리스도교는 그 위상을 확고하게 정착시키게 되었던 것이다.3)

그리스도교 공동체라는 배타주의적 자의식은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절대화된 경계 내부라는 개념 속에 안주하고 있지만, 이렇게 역사적 점검을 받는 순간 그 경계가 상대화된다. 그러므로 나의 반신학적 해체론의 배경에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적 정체성의 형성 및 발전 과정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스스로를 사회의 다른 범주들로부터 근본적으로 '타자화'하려는 욕망과 결부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즉 종교는 사회의 다른 범주들과 필연적인 연계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그리스도교적 인식론, 바로 이것을 문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를 철거하려는 기획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한데 이때 이들이 말하는 그리스도교는 도대체 무엇인가? 두 말 할 것도 없이 역사적으로 현존하는 종교적 체제를 가리킨다. 요컨대, 이 체제를 위협하는 것은 곧 예수로부터 시작된 신앙에 가하는 위협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며,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해서 이 체제가 무너진다면 신앙도 끝장나고 만다는 생각이다. 이 체제를 개혁하는 것은 허용될 수 있으나, '그것을 넘어서는 것' 운운하는 것은 안될 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개혁'과 '그것을 넘어서는 것' 간을 구분하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준거는 그리스도교 당국이 허용할 만한 비판인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원칙적으로 자기 갱신을 원치 않는 이들에게 개혁의 내용과 실행의 규칙을 정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종교 체제는 역사 속에서 하나의 권력 블록으로 실재해 왔고, 그 성쇠는 권력을 행사할 능력, 즉 세계의 다양한 자원을 전유할 능력의 정도에 따른 결과였다. 그렇다면 내가 다시 그들에게 이렇게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방식, 즉 힘의 논리, 맘몬의 논리에 의존하여야만 교회와 그리스도교가 존속하며 성공을 구가할 수 있는 것이라면, 도대체 당신은 왜 굳이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를 선택해야 하느냐?", 라고.

주류적 그리스도교의 언술은, 크게 세 가지 점에서 '존재론적 타자론'을 담고 있다. 첫째는 신이 인간의 타자적 존재라는 이분법이다. 물론 이 타자론이 신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서는 신과 인간 사이의 어떠한 접점도 없다는 것이 강조된다. 그리고 예수를 통하여 신의 육화가 실현되었다는 신학적 수사는 전적으로 신의 은총에 따른 것임을 부각시킨다. 다시 말하면 예수로 말미암아 신과 인간 사이에 비로소 접점이 놓이게 되었는데, 그것은 신의 은총의 귀결이지 인간의 행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언술은 행업주의行業主義4)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함축하고 있는 신학적 레토릭이다. 그래서 이것은 1930~40년대 일단의 독일 신학자들에겐 진보에 대한 과도한 낙관론에 몰입되어 있던 나치즘을 비판하는 유용한 신학적 논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언술은 인간을 성숙한 사유의 주체로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또 다른 유형의 파시즘적 지배를 가능하게 한다.5) 왜냐하면 이러한 담론은 인간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자신을, 자신의 운명을 위탁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권력, 성직자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담론적 기초였다. 그러므로 신학은 인간의 타당한 행태에 관한 윤리를 다룰 필요가 없게 된다.

둘째, 인간에 대한 인간의 타자성 주장이 있다. 그리스도교적 언술에서 이것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지점은 '교회'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과 분리된 존재론적 실재라고 가정되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교회는 존재론적/선험적으로 '세속적 세계'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함의를 갖는다. 교회가 윤리적으로 어떠한 처신을 해 왔든 간에 말이다. 이러한 논변은 교회 외부의 인간 세계에 대한 논의를 동반해야 할 필연성으로부터 신학을 격리시킨다. 즉 신학은 '세계와 인간'을 향한 윤리를 구성해야 하는 의무감을 떨쳐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혹 세계와 인간에 대한 윤리가 있다면, 그것은 교회를 경유한, 즉 교회의 통제/관리 아래 있는 세계와 인간에 한정된다. 이른바 '교회 중심주의'인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두 가지 상반된 사회윤리적 태도로서 구체화된다. 교회가 세계의 관리자적 위상을 확보하고 있을 경우엔 역사에 대한 개입주의를 강하게 표방해 왔던 반면, 교회가 세속권력을 통제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 경우엔 탈역사주의를 지향했던 것이다. 실제로 교회는 이 양자 사이를 편리하게 오간다.

마지막으로, 주류적 그리스도교의 언술 속에는 인간의 비인간적 실체에 대한 타자성 주장이 함축되어 있다. 가령, 우주의 모든 것 속에 깃든 생명력을 강조하는 정령신앙animism에 적대하는 언술로서 유일신 신앙이 도용되는 경우가 바로 이런 예에 속한다.6) 이것은 비인간적 혹은 준인간적 존재라고 여겼던 신분(노예)적, 인종적, 성적 타자들에 대한 배타주의를 정당화했고, 동식물을 포함한 생태환경 자체에 대한 정복주의 담론과 접맥되기도 했다. 교회가, 교회의 담론이 인류 문명사의 생태환경에 대한 착취와는 무관한 듯 빈 허공을 바라보는 '척'하고 있을 때조차도 말이다.

주류적 신학 속에 함축된 이와 같은 존재론적 타자론은, 정교분리가 확립된 근대 이후에는 세속적 역사에 대한 신앙적·신학적 언술의 반개입주의적 경향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조를 내면화하고 있는 사람들, 이른바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역사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마치 신앙의 본분과는 분리된, 부가적인 문제인 양 생각하곤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리스도교 식의 기억의 재현술이 관여되어 있다. 제의·신상·(종교) 건조물 등이 그러한 역할에서 혁혁한 성과를 이룩한 노하우들이다. 그리고 소위 신학이라는 전문가적 담론들이 이러한 노하우들의 경험을 이론적으로 변증하고 일반화·보편화하는 소임을 다해 왔다. 그리하여 이러한 기억의 재현술들은 그리스도교적 사유의 '규칙성'을 부여했으며, 이런 사유를 다양한 사회적 이해관계와 연계시킴으로써 이해집단 간의 '사회적 연결망'을 형성한다. 결국 그리스도교 체제는 종교 문화, 교회, 신학 등이 복합적으로 엮어진 제도적 실재institutionalized reality로서 존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제도화에 대한 비판으로서 '신학을 한다는 것'doing theology은 종교 문화, 교회, 신학 일체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이어야 한다.

그러니 결국 나의 반신학적 해체론은 그리스도교 자체를 문제시하는 셈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길게 이야기한 데서 드러나듯이, 그 비판은 종교의 해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다른 범주들과의 필연적인 연계성을 회복하는 '신앙적/신학적 체계로서의 종교의 재정립'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리해야만 그리스도적 신앙/신학은 비로소 인간의 문명 안으로 들어올 수 있으며, 그 안에서 문명에 대한 비판을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치 신이 인간 문명에 대해 비평하고 구원의 길을 제시하기 위해, 다른 방식이 아닌 바로 '육화의 길'을 택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서는 이제까지의 그리스도교적 제도화의 경로 자체를 문제시해야 하며, 그 귀결로서 형성된 제도적 실재인 종교 문화, 교회, 신학 자체를 돌파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반신학으로서의 신학하기'의 급진적 실천이 요청된다.7)





3



글을 마감하는 대목에서 나는 초기 그리스도교 형성 시기 요한복음서 공동체의 문제제기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1세기 말경에 이르면 그리스도교는 급속히 제도화되기 시작한다. 직제화 정경화 교리화 예전화의 경향이 뚜렷해지며, 종교생활과 일상생활은 외생적 관계로서 이해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대교 회당은 그리스도교의 비명시적 전거가 된다. 비명시적이라 함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서로 경쟁관계에 있기에 그 영향 관계가 명시적으로 표상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분명 그리스도교는 유대교 회당을 많이 참조했음이 분명하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유대교 성전-회당 체제가 붕괴하면서, 재건 유대교의 기수는 회당이었다. 얌니아를 중심으로 하는 재건 유대교는 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전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유대주의간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통합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교 운동의 주류를 이루는 흐름은 바로 이렇게 회당 체제의 제도화 방향을 모방하면서 전개되었다. 학계에서 '초기 카톨릭주의'라고 부르는 현상이 바로 이것이다. 재건 유대교가 지역의 '사도'(αποστολοι)를 활동의 기축으로 사회종교적 통합운동을 벌인 것처럼, 예수 운동 승계자들의 사도권은 교회 통합 운동의 상징적 주축이었다. 그런 점에서 사도권이라는 상징은―사도들 자신의 개인적 이력과는 무관하게― 교회의 권력화를 표상하는 아이콘이었다.

주후 1세기 말 소아시아 서부 지역의 일단의 그리스도 운동을 반영하는 요한복음서는 이러한 유대교 및 그리스도교의 제도화에 대해 저항하는 공동체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점에서 「요한복음서」 2장 20~21절(○그들이 예수께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 육 년이나 걸렸는데, 그래 당신은 그것을 사흘이면 다시 세우겠단 말이요?" 하고 또 대들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이었다)은 하나의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포함한다. 성전 파괴 예언으로 알려진 이 텍스트는 공관복음서에선 예수 활동의 종결부에 등장한다. 이것은 연대기적으로 타당한 배치이지만, 요한복음서는 그것을 서두에 위치시킴으로써, 성전이 상징하는 유대주의의 종말에서부터 예수전을 시작하고 있다.

여기에는 '46년간이나 짓고 있다는 예루살렘 성전'과 '예수가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는 새 성전'이 대립하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은 단지 하나의 건축물만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유대인에게는 '하느님의 집'을 뜻한다. 그것은 그들이 염원하는 세계를 상징하는 것이며, 동시에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인들의 삶의 질서를 표상한다. 곧 성전은 유대인에게는 '삶의 제도화'다. 나아가 그것은 회당 체제가 갈구하는 새로운 성전에 대한 비전을 함축하고 있기에, 회당 중심의 재건 유대주의를 포함한다.

그런데 예수는 그 성전이 무너질 것을 선언한다. 그리고는 사흘만에 지어질 새 성전을 예언한다. 특히 21절은 그 새 성전이 예수 자신의 몸임을 말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하라. 그것은 또 하나의 건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죽임당한 후에 사흘만에 되살아난 이의 몸이라는 것이다. 건조물은 보여지고 만져지는 실체다. 한데 예수의 몸은 그렇지 않다. 부활한 그의 몸을 보고 만진 이는 있으되, 그것은 단지 말로만 전해질 뿐이다. 「요한복음서」를 독서하는 1세기 말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복음서는 그가 떠난 이후의 공동체의 상황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몸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참조할 것은 이 보이지 않는 새 성전으로서의 예수의 몸을, 「요한복음서」 저자보다 최소한 한 세대는 앞선 시기에, 바울은 교회라고 묘사한 적이 있다(「로마」 12,5; 「고전」 12,12~27)는 것이다. 보이는 대상, 만져지는 대상으로 말함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 했던 것이다. 즉 기성 제도인 유대교 성전(-회당) 체제에 대해 새로운 질서 원리, 새로운 제도로서 '교회'가 제기되고 있다. 이때 그는 분명 제도로서의 교회를 함의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서」는 그렇지 않다. 예수의 몸은 교회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성)령'이다. 「요한복음서」에서 영, 그 '하느님의 기운'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무엇이다. 기원도 알 수 없고, 작동 원리도 알 수 없다. 인간의 질서관으로 보면 그것은 온통 무질서요 신비일 뿐이다. 그래서 유대인 가운데 학식 높고 신실한 지식인 니고데모, 즉 유대교의 공식적 지식 체계의 정통한 그는 그것을 도무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요컨대 공식적 지식의 관점에서 '영'은 은폐된 것, 즉 비의秘意인 것이다.

'46년 대 3일'이라는 대비는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46년간 짓고 있었고, 향후에도 한참을 더 공사해서 유대교의 성전은 완공된다. 거기에는 벽돌이 필요하고, 기술자가 필요하고, 설계자가 필요하고, 그 모든 것을 위한 기금이 필요하다. 어느 하나도 계산이 어긋나면 완성은 지연될 수밖에 없다. 한데 '3일'짜리 성전은 그와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모든 계산, 합리적인 판단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질서를 깨야만, 균형 있는 계산법을 무너뜨려야만 도달할 수 있는 진리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두 성전에 관한 위의 본문의 묘사는 기성 제도에 대해 도전하는 요한복음서 공동체의 문제의식이 함축되어 있다. 그것은 질서가 무질서를, 균형이 불균형을, 제도가 영을 질식시킨 세계를 직면하면서 제기하는 일단의 초기 그리스도인의 도전의식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1세기 말의 「요한복음서」의 도전은 주류 교회의 전통을 물려받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왜냐면,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제도화는 교회를 통해서 구현되었는데, 그 제도의 역사는 영을 신앙에서 소거시킨 역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질서'라는 그릇 속에 담겨 있는 영, 제도에 순화된 영만을 '영'이라고 규정하고, 다른 것을 이단으로 배제한 역사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교는 영이 제거되었다. 오직 거짓 영, 순화된 영만 살아 넘쳐나는 종교가 된 것이다. 그래서 자기 해체의 담론인 영을 상실한 교회는 교회 중심주의와 성직자 중심주의라는,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그리스도교 안팎을 향한 패권적 승리주의에 집착하면서 스스로를 형성해왔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자폐성이 자리한다.

영은 항상 제도를 통해서 역사 속에 구현된다. 그러나 제도는 그것의 규칙성을 단숨에 넘나드는, 어떠한 장치로도 규격화할 수 없는 영에 의해 도전받고 영향을 받지 않는 한, 그것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 교회의 역사가 그것을 보여준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에 구원의 담론을 유포할 자격을 상실하였다. 몸의 정치와 아울러 성찰을 향한 급진적인 해체의 담론인 영의 정치가 살아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

[보론] 교회에서 예수로, 그리스도교의 민중적 개입의 전통을 복원하기 위하여





예수 운동은 1세기 팔레스틴의 시골 지역에서 대중적 종교사회운동으로 발원하였다. 이 운동의 반도시적이고 반체제적인 기조는 대중적 종말론이라는 사상적 그릇을 통해서 시간적으로 과거 민중운동의 전통을 흡수할 수 있었고, 공간적으로 팔레스틴과 그 너머에까지 이르는 확대된 유대주의 영역과 대화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아직 예수 운동은 독자적인 제도적 장치들을 구축하지 못했으며, 단지 유대교 내의 하나의 일탈적 운동의 계보에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 운동이 질적 변화의 계기를 맞이한 것은 예루살렘으로의 진군(즉 도시로의 진군)과 깊이 연관된다.1) 이곳에서 지도자인 예수가 죽임당하고, 살아남은 제자들과 더불어 새로운 지도자들이 등장한다. 여기서 새로이 등장한 지도자들은 대략 다음 두 가지 사회생태학적 요소와 연결됨으로써 리더십의 새로운 유형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 두 요소란, 하나는 시골에 대해서 도시 친화적이라는 점, 그리고 다른 하나는 팔레스틴의 전통적 유대주의에 대해서 지중해 지역의 헬레니즘화된 유대주의에 보다 깊이 연루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예수 운동이 박해로 인하여 예루살렘에서 지중해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는 것을 계기로 더욱 현저해진다.

이 새로운 리더십은 흔히 '지역공동체 조직가'라고 불리우는 지도자 유형이다. 이들은 떠돌이 선교사들과 긴장 관계 속에서 점차 지도력을 확장해간다. 이러한 정주와 유랑이라는 행위 유형의 갈등은 바람직한 리더십이 어떤 것인가에 관한 논쟁을 야기시켰고, 나아가 그리스도인'다운' 윤리의 형성을 둘러싼 갈등도 이것과 관련되어 있다.

'유랑'이라는 행위 유형은 일상적 윤리로부터의 과격한 단절을 감행하는 데 용이한 삶의 양식이다. 이것은 예수 운동에서 혁명적 급진주의로 나타나는데, 그 사상적 기초에는 민중주의적인 급진적 종말론 전통이 있었다. 종말론은 시간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험 양식으로, '종말의 때의 임박성'을 공유하는 집단에게서 가장 강렬하게 수용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때의 지연'은 신앙의 위기를 초래하며, 이러한 위기는 신앙 유형의 전환을 통해서 극복되었다. 바로 여기서 '정주' 유형의 신앙이 발전할 계기가 마련된다.

정주의 신앙 양식은 불가불 기성 체제, 기성의 종교 등을 포함한 지역의 제도적 규범 메커니즘과의 긴밀한 관계를 동반하면서 형성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할 것은 로마의 지방 행정 당국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사회적 제도, 토착민들의 가족 제도, 도시 디아스포라 유대교 회당의 종교사회적 제도, 그리고 전쟁 등으로 인해 강제 이주된 다종족 집단의 대중적 종교운동 등이다.

지중해 지역 도시로 진출한 예수 운동의 떠돌이 선교사들은 처음엔 회당에서 활동공간을 찾았다. 이들은 회당 내에서 비판의 논리를 생산하는 데 주력하였고, 기성의 회당 체제에 대한 도전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이들의 비판은 일정한 효력을 발휘했다. 결국 그들은 회당 당국으로부터 축출되기에 이른다. 이제 예수 운동은 독자적인 공동체를 형성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비판담론의 생산자보다는 공동체의 결속을 위한 담론의 생산자의 활동이 중요해지게 되며, 후자를 중심으로 회당 종교의 예전을 모방한 종교의례가 발전하게 된다. 예전은 반복적 수행을 통한 의미의 재현 양식이다. 원사건의 의미는 삶과 직결되어 있었던 데 반해, 예전이 재현하는 의미는 그것을 아이콘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의미화 실천2)에 변수로 작용할 상황을 제거하고 반복적으로 패턴화된 제의 행위 수행 속에 의미를 가두어 둠으로써, 종교적 실천을 점차 삶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삶과 이반된 종교성의 발달이 탈이데올로기적 신앙으로 직결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전 속에 고정화된 의미가 행위자들의 주체형성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념할 것은, 지중해 지역 대도시 회당의 예전이 로마의 지배체제와 타협적인 가치를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 초기 그리스도교의 예전에서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고려할 때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의 하나가 바로 장소의 문제다. 회당에서 축출된 도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구성원 중 한 사람의 집에서 모였다. 이런 이유로 모임을 가질 만한 집의 소유자의 영향력이 공동체의 규범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데, 여기서 안정된 가족 규범이 신앙 윤리에 관여하게 된다.3) 요컨대 가부장제가 그리스도교의 윤리적 기반을 구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압도적으로 기층대중이 많았다. 처음에 유대인 저변층에서 확산되다가, 회당에서 축출된 후에는 비유대인 출신자들이 대거 몰려들게 된다. 로마 제국 시대 대도시 지역의 사회적 환경을 고려할 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에서 보듯이 매우 중요하다.

로마제국의 대도시는 법적 질서의 효력이 그리 크지 않았다. 도시 자체가 식민도시인데다, 빠른 속도로 여러 종족 출신의 사람들이 이주한 탓에, 기존의 가치 체계는 토착민의 안정된 가족 규범으로만 한정된 효력을 발휘할 뿐이었고, 대안적 가치 체계는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 당국은 반란의 혐의가 없는 한 형법의 적용을 최소한으로 사용했다.4) 그러므로 주민들의 일상생활은 그야말로 정글의 법칙에 의해 운용되었다. 이런 이유로 대도시 지역에는 각종의 결사체들이 형성되었는데, 대부분의 결사조직은 동족 출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대중종교와 결부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비유대인들이 들어옴으로써 종교 혼합주의는 필연적인 현상이었고, 특히 대중종교와의 접촉은 불가피했다. 이러한 갑작스런 종교간 혼합으로 인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재질서화의 필요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직제화가 가속화된다. 직제화란 공동체의 권위구조가 관례화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엘리트의 충원과정이 관례화되고, 서열화된 직제를 위계화하는 윤리 담론이 정착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그런데 이러한 직제화의 모델은 주로 로마의 지방행정 당국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며, 부분적으로는 안정된 가문의 가부장제적 권위 모델이 여기에 접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직제화로 인해 일단의 지도력이 공동체 주변부 혹은 외부로 밀려나게 되며, 특히 여성 지도력은 거의 전적으로 배제된다. 이들은 이단적 운동으로 규정되는데, 그 과정에서 정전이 형성된다.

정전화는 대중의 의미 해석 자격을 사실상 박탈하고, 공동체의 엘리트들에게 의미 독점권을 위임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이제 엘리트들은 정통적 텍스트들인 정전을 전유할 뿐 아니라, 상징을 통한 의미 재현 과정인 예전을 장악하는 종교귀족으로 탄생하게 된다. 그리스도 교회는 이런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탄생에 비판적 요소는 제거되거나 외부로 추방되었으며, 결국 교회 형성 과정에서 '유랑하는 카리스마적 지도력'은 배제되고, 기성 문화에 대해 일탈적/해체적인 에토스는 신앙과 무관한 요소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하여 교회는 배타적인 정착 문화를 구현하는 장이 되었고, 성직자 중심주의적인 종교제도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가 강력한 사회적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어 사회적 관계의 영역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확대되면서 다른 권력, 즉 교회 외부의 권력과의 관계에 대한 규정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른바 교권과 속권이라는 두 권력 유형은 배타적이고, 따라서 상대방을 하위에 두어야만 하는 속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교권이 속권과 수위권을 놓고 경쟁하는 중세기에 이르면 최후의 격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정복주의적 담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며, 그것은 교회 중심주의적으로 정향된 교리의 형성 과정과 맞물린다. 이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교회의 실천 원칙을 구성하게 되는데, 하나는 교회가 힘의 우위를 점하게 될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가 열세일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엔 교회는 강력한 개입주의를 통해 수위권을 한껏 발휘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엔 상호불간섭주의를 취하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 교회의 실천은 어느 한 편으로 한정되기보다는, 세속 권력과 갈등하는 동시에 다양한 경로로 제휴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즉 교회는 기본적으로 속권과 갈등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를 배제하지만, 동시에 공동의 적이 등장하면 서로 공조하는 모습을 띠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민중적 개입의 전통을 복원하려면, 다시 예수에게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교회로의 발전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물론 '정주'의 신학 자체를 문제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랑이 배제된 정주, 斷이 배제된 公의 실천은 신앙의 제도화 과정에서 패권주의, 승리주의 이데올로기와 연계되었음을 역사는 증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신학/신앙은 '차이'를, 낯설음을 포용해야 한다. 바울이 말한 바, 몸과 지체의 레토릭은 차이를 전제로 하는 연대의 에토스를 말하고 있다. 바울의 과제가 외부로부터 분리된 독자적인 예수 공동체의 형성에 초점이 있었다면, 지구화 시대를 맞은 오늘 우리는 자본과 주류 교회의 무신성을 극복하고 하느님나라 건설을 위해 서로 격리된 예수 공동체와 세계를 다시 연계시켜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몸-지체 레토릭은 민족공동체 나아가 지구촌공동체에서 차이와 연대의 신학적 레토릭으로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

1) 갓월드의 기념비적 역사 『야훼의 지파들』은 이스라엘의 형성에 관한 탁월한 해석을 내놓았다. 야훼 신의 이미지가 최초로 형상화한 것은, 주전 13세기경 가나안 지역에서 형성된 부족동맹의 역사적 경험과 맞물려 있다. 즉 성읍국가의 경계 외부로 이탈하여 동부산악지대로 이주한 기층대중이 점차 씨족적·부족적인 연결망을 형성하게 되고, 나아가 이스라엘이라는 부족동맹체로 결집하게 되는데, 이러한 연맹의 형성은 권력의 집중화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제도화하는 형태로 실현된다. 그런데 이러한 탈권력적 연결망의 질을 압축적으로 실현하는 데 야훼신앙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많은 연구자들은, 이스라엘의 사회적 정체성의 형성이 '어떤 혁명적 이행에 의한 의도된 과정의 소산'이라고 보았던 갓월드의 주장에 대해 비판적임에도, 이 종족적 공동체의 형성이 어떤 지향성을 갖는다면, 그것은 권력 집중화에 대한 거부감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한편 이들의 갓월드 비판은 대체로 신멜더스주의적인 편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비록 아직은 이러한 관점에서의 반비판이 거의 없음에도, 또 다시 비판적인 평가를 거쳐야 한다고 본다. 요컨대 이들은 행위자의 선택을 과도하게 인구결정론적 시각에서 조명하려 한다. 내가 보기엔, 바로 이 점에서 행위자의 합리적 의도성을 강조한 갓월드의 견해와 그에 대한 비판자들의 신멜더스주의적 견해는 상호보완적으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

2) 하지만 실제로는 그 순서가 거꾸로다. 즉 그러한 구분을 통해 이른바 정통과 분리된 이단과 이교가 출현한다.

3) 프렌드는 근대 이전기 그리스도교는 촌락 대중의 개종과 관련하여 크게 세 차례에 걸친 변화를 경험하였다고 한다. 주후 3세기 경에는 촌락의 대중이 대대적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고, 4~5세기경에는 그리스도교 내의 이교적 집단으로 전화되었으며, 7~10세기에는 점차 이슬람교로 옮겨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촌락 대중의 종교적 선호의 변화 과정의 배후에는 그리스도교가 반민중적 종교로 전화되는 역사가 있다.

4) '행업주의'란 '은총주의'의 대극에 있는 것으로, 인간의 자기 내적 태도와 행위를 통해 신앙적 의를 획득할 수 있다는 데서부터, 역사 내적 지양(종말론적 비약을 필요로 하지 않은 채)을 통해서 하느님나라를 실현할 수 있다는 신앙적/신학적 신념 체계를 일반적으로 지칭한다. 이러한 신앙적/신학적 태도는 대체로 신과 인간 사이의 친화성을 강조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5) '파시즘'은 지배체제의 폭압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흔히 사용된다. 하지만 이 개념의 특징은 '합의독재'라는 데 있다. 즉 지배체제가 상징 조작을 통해 대중을 체제의 자발적 주체로서 동원함으로써 체제의 재생산을 성공적으로 구축하는 지배 양식을 함축한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파시즘을 야기한 1930년대 독일 자본주의의 위기를 맞아 '대중의 강간'이라는 분노섞인 표현을 썼다. 이것은 그의 불후의 논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후기에 등장하는 어구인데, 파시즘의 '정치의 미학화'를 비판하는 데 사용하였다. 그는 자신이 '기술복제시대'라고 명명한 근대 과학 문명의 불가피한 변화를 '대중 문화의 등장'에서 본다. 비로소 대중(귀족이나 부르주아지가 아니라)이 문화의 주체가 된 것이다. 그는 이런 대중 문화의 근대적 매체를 영화에서 발견한다. 그에 의하면 기술복제시대의 총아인 영화라는 문화 매체는, 예술가의 '아우라'가 표현되는 장이 아니라, '대중 정치'를 야기시키는 공간이 되었다. 이른바 민중이 주인되는 사회가 대중의 정치에 의해 도래하리라는 믿음에 그는 고무된다. 그러나 그가 기대했던 이러한 희망의 가능성은 실제의 역사 속에선 철저하게 배신당하고 만다. 그가 본 것은, 역사의 주역이 된 대중의 대두가 아니라, 파시즘의 매체 조작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대중을 왜곡된 욕망의 분출자로 만들고, 결국 역사의 위선적인 진보, '진보라는 이름의 질곡'의 공범자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벤야민은 바로 이것을 '대중의 강간'이라는 노기 어린 표현으로 적고 있다.

동일한 문제의식을 아도르노는 1944년에 출간된 에세이집 『한줌의 도덕―상처입은 삶에서 나온 성찰』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지배세력이 생산해낸 고통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키는 일은 지배세력의 메커니즘에 속"한다. 또 빌헬름 라이히도 1933년의 자신의 대표적 저작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을 이와 같이 표현한다. "설명되어야 할 것은 배고픈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했다든가 착취당한 어느 노동자가 파업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들 중의 대부분은 왜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착취당하고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왜 파업을 하지 않는가 라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동시대의 대표적인 비판적 사상가들은 나치즘이라는 파시스트 정권의 등장에 공범자로 대두한 대중의 문제에 당황하고 있으며 그 가슴 아픈 현상을 설명하려 한다.

6) 구약성서에서 유일신 신앙은 식민지시대 초기인 '제2이사야'에 이르러서 비로소 처음 나타난다(「이사」40,18~20; 41,6~7; 44,9~20; 45,20~21; 46,1~7). 이것은 바벨로니아 제국 말기 메소포타미아 중원 지역의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배경으로 한 반체제적인 급진파 예언자의 창조신학에서 그 최초의 형태를 갖게 된다. 제2이사야는 이 창조신학을, 이스라엘 신앙의 토대이자 구원신학의 요체인 출애굽신학과 결합함으로써 완결시킨다(51,10). 즉 그의 유일신론적 창조신학은 처음부터 해방적 에토스를 담지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제2이사야의 유일신론적인 창조-구원신학은 정체성의 동요를 일으키고 있는 이스라엘 대중을 대상으로 하여, 바빌로니아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맞서는 제2이사야의 대항 이데올로기로 등장한다. 따라서 유일신 신학의 출발점은 반권력 지향의 체제비판 담론이었지, 종교적 패권주의의 수단이 결코 아니었다.

7) 도로테 죌레는 현대신학의 패러다임을 정통주의 자유주의 급진주의, 이 셋으로 대별하면서, 급진주의 패러다임의 정당성을 서구-남성 중심주의적 종교 제도를 근본적으로 폐절하지 못한 다른 유형의 신학의 어정쩡한 비평 자세와 관련시킨다.

1) 흔히 '예수 수난사'라고 얘기하는 이 설화의 출발 기조는 종말론에 고취된 일단의 집단이 "때가 찼다"는 확신 아래 예루살렘을 향한 메시아적 승리의 개선행진의 분위기를 띠고 있다.

2) 의미화 실천은 의미를 재생산하는 과정으로서 규정되는 실천을 뜻한다.

3) 신약성서에 여려 차례 언급되는 '가훈적 담론'들이 그러한 실례라 할 수 있다.

4) 물론 이것은 로마 당국자들이 합리적으로 행위 했을 경우에 한정해서만 옳다. 실제로 로마의 관료나 군인들은 개인적 욕심을 위해 적지 않은 비리를 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것은 직간접적인 폭력의 행사를 통해 수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은 공식적 법 테두리 밖에서 이루어졌고, 로마 당국의 공식적 개입은 대체로 반란과 관여된 행위에 한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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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06-08-22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들어 성경 공부를 하고싶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 안 간지도
거의 10년이 다 되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