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seed > [퍼온글] 근대 합리론에서 정념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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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까르뜨 정념론의 구조
근대 합리론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정념의 문제 역시 데까르뜨가 논의의 기반을 마련해 준다. 데까르뜨는 최후의 저작인 『정념론』(Passions de l'âme)(1649)에서 스꼴라철학의 정념론과 상이한 이론적 기초 위에서 정념의 문제를 체계적으로 다룸으로써 이후 합리론에서 논의되는 정념론의 이론적 모체를 제공해 주고 있다. 데까르뜨 정념론의 핵심 문제는 크게 네 가지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1-1) 정념론의 철학적 기초: 시초관념들
먼저 정념론의 철학적 기초에 관한 문제가 있다. 데까르뜨는 형이상학과 자연학에서 영혼과 물체, 사유와 연장의 엄격한 이원론에 기초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영혼과 물체는 사유와 연장이라는 전혀 상이한 속성에 따라 규정되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는 일체의 인과관계 및 상호작용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욕망과 같은 정념들은 외부 물체의 운동이 우리 신체에 미친 영향에 따라 생겨난 정기들(esprits animaux)의 운동이 뇌 안의 송과선에 전달되어 일어난 영혼 내의 결과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 정념론은 형이상학과 자연학의 차원에서 배제된 영혼과 신체의 상호작용을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데까르뜨는 정념이라는 현상에 직면하여 이론적 모순에 빠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원론적 틀에서 정념이라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시초관념들(notions primitives)에 관한 이론으로 제시된다(엘리자베쓰에게 보내는 1643년 5월 21일, 6월 28일 편지). 이 이론에 따르면 시초관념들은 우리의 모든 인식의 근거를 이루는 원천과 같은 것으로, 모든 학문은 이 관념들을 잘 구분하고 이것들을 각각의 영역에 잘 적용하는 데서 성립한다. 데까르뜨는 세 가지 시초관념을 제시한다. 먼저 사유가 있다. 이는 영혼과 신에 적용되는 것으로, 이를 기반으로 해서 형이상학이 확실하고 안전한 토대를 갖는 학문으로 성립할 수 있다. 그 다음 연장은 모든 물체들에 적용되는 것으로, 자연학은 이를 바탕으로 해서 구성된다. 데까르뜨가 제시하는 마지막 시초관념은 인간, 즉 “영혼과 신체의 연합”(union)으로서 인간이라는 관념이다. 사유라는 첫 번째 시초관념이 감각과 상상에서 분리된 순수 지성의 활동을 필요로 하고, 연장이라는 두 번째 시초관념은 상상의 도움을 받는 지성의 활동을 요구한다. 반면 세 번째 시초관념은 자신의 명석함을 감각으로부터 도출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세 번째 시초관념은 대상에 대한 이론적 인식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 아니라, 실천학을 추구함을 의미한다. 즉 이는 우리에게 유용하고 해로운 것을 식별함으로써 우리 존재를 잘 보존하게 해주는 실천적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데까르뜨의 형이상학과 자연학에 함축된 이원론적 관점은 정념에 관한 연구에서는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 그리고 이원론적 관점에서 정념의 문제를 사고할 때 제기되는 내적 모순의 문제 역시 제기되지 않는다. 즉 정념의 문제에서 상호작용은 영혼과 신체라는 상이한 존재론적 질서에 속하는 실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만약 그렇다면 데까르뜨의 철학체계는 내적 모순에 빠지게 된다). 상호작용은 영혼과 신체의 연합으로 사고된 인간과 외부의 대상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곧 데까르뜨에서 정념의 문제는 실천적 유용성의 관점에서 탐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1-2) 정념의 정의
그러나 데까르뜨의 정념론이 실천적 유용성을 목표로 하기는 하지만, 이는 그가 정념에 대한 탐구에서 학문적 엄밀성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념론의 실천적 유용성의 조건은 전통적인 정념론을 새로운 학문적 토대 위에서 개혁하는 것이며, 이는 정념에 대한 데까르뜨의 정의에서부터 잘 나타난다.
데까르뜨는 먼저 영혼의 분할이론에 기초하고 있는 정념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방식을 비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영혼은 열등한 부분과 우월한 부분, 감각적인 부분과 이성적인 부분 사이의 싸움터가 아니라 하나의 불가분한 실체다. 이는 불가분적인 영혼과 가분적인 물체를 엄격히 구분하고, 기능(faculté)의 구분 이외에 일체의 영혼의 분할을 인정하지 않는 데까르뜨의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필연적으로 비롯하는 결과다. 따라서 그에게는 전통적인 영혼 내의 갈등이라는 문제 역시 영혼과 신체 사이의 갈등의 문제, 또는 신체의 운동을 표현하는 정념과 영혼의 활동을 나타내는 의지 사이의 갈등의 문제로 제기된다.
데까르뜨에게 표상은 일반적으로 사물을 정신에게 표상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표상의 하나인 정념의 종별성은 사물, 대상에 대한 인지적 정보를 제공해 주는 데 있지 않고,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데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데까르뜨는 정념을 “지각(perceptions) 또는 감각내용(sentiments) 또는 영혼의 동요(émotions)”(『정념론』 27절)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정념이 지각이라는 것은 영혼의 활동인 의지와 구분하여 정념이 영혼에게 수동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념이 감각내용이라는 것은 지성의 지각과 달리 정념은 혼잡하고 모호한 지각이라는 점을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영혼의 동요라는 것은 인지적인 표상과 달리 정념의 특성은 영혼의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에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처럼 정념은 표상, 즉 사유의 일종이라는 점에서 영혼 안에 존재하지만, 정념을 발생시키는 원인은 영혼이나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외부 대상과 정기들의 운동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정념이 발생하는 최초의 원인은 외부 대상이 우리의 감각기관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 다음 이 자극에 따라 발생한 신경기관 내의 정기들의 운동이 뇌 안의 송과선(glande pinéale)을 자극한다. 그리고 끝으로 이 송과선을 통해 영혼 내에서 정념이 발생하기 때문에, 정기들의 운동은 정념 발생의 마지막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자신과는 상이한 본성을 지닌 것에 의해 수동적으로 발생하는 사유의 양태들이라는 데서 정념(passion), 즉 수동이라는 이름이 유래한다. 따라서 데까르뜨에서 정념들은 외부 대상 내지는 인간 자신의 신체의 운동을 원인으로 갖고 있지만, 영혼에 속하는 사유양태들로 정의될 수 있다.
이러한 정념의 발생과정에 대한 설명에서 중요한 것은 데까르뜨가 정념발생의 원인을 신체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데까르뜨가 전통적인 정념론의 문제점을 정념의 성격과 원인의 혼동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곧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스꼴라철학에 이르는 정념론은 정념의 원인을 영혼 자체에서 찾고 이에 따라 정념을 의지의 표현으로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데까르뜨에 따르면 이는 정념의 본성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서나 정념의 유용성을 올바르게 활용하는 데서 장애가 될 뿐이다.
1-3) 정념의 분류와 열거
데까르뜨의 방법의 이념에 비추어볼 때 정념의 분류와 열거는 정념론을 하나의 학문으로 확립하는 데서 핵심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데까르뜨의 보편수리학(mathesis universalis)의 이념은 모든 학문대상의 동질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각 학문영역에서 확실성을 수립하는 절차가 올바른 순서에 따라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형이상학과 자연학에서처럼 정념론에서도 이 보편적인 방법론이 적용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곧 정념의 분류나 열거로 표현된다.
데까르뜨의 방법은 우선 가장 단순한 것, 가장 기초적인 것을 찾고 이로부터 복잡한 것, 파생적인 것을 연역하도록 요구한다. 정념론에서 가장 기초적인 것은 여섯가지 기초정념들, 즉 놀람, 사랑과 미움, 욕망과 기쁨, 슬픔으로 제시된다. 이 여섯가지 정념들은 말 그대로 기초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다른 기초정념들로 환원되거나 포섭되지 않은 자율성을 지니고 있으며, 각각 자신의 하위 정념들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여섯 가지 정념들 사이에 위계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이것들을 분류하고 제시하는 순서는 존재한다. 이에 따르면 가장 먼저 제시되는 정념은 놀람이고, 그 다음 사랑과 미움이 뒤따르며, 마지막으로 욕망과 기쁨, 슬픔이 제시된다. 이러한 순서는 세 가지 기준에 의거하고 있다. 정념을 열거하는 첫 번째 기준은 새로움 또는 단순성이다. 여기에서 새로움이란 이제까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어떤 것이 우리에게 처음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항상 영혼을 놀랍게 만든다. 영혼의 변화가 모든 정념의 공통적인 특성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런 의미의 놀람은 정념의 가장 절대적인 기준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것은 아직 우리에게 이로운 것인지 해로운 것인지 알려져 있지 않고, 따라서 자신의 반대항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가장 단순한 것이기도 하다. 이 첫 번째 기준에 따르면 최초의 기초정념은 놀람(admiration)이다.
두 번째 기준은 우리에게 이로운 것인가 해로운 것인가이다. 여기서 이로움과 해로움은 대상 자체의 객관적인 성질에 따라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 부합하는지 아닌지에 따라 판별된다. 우리에게 부합하는 것으로 표상된 대상은 우리가 그것을 사랑하게 만들고 해로운 것은 그것을 미워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 기준에 따른 기초정념은 사랑과 미움이다. 사랑과 미움이라는 정념은 놀람에 비해서는 복잡하지만, 아직 시간과 관련을 맺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욕망과 기쁨, 슬픔에 비해서는 단순하며, 따라서 두 번째 순서에 위치하게 된다.
마지막 세 번째 기준은 시간이다. 이는 욕망과 기쁨, 슬픔이라는 세 가지 기초정념을 분류한다. 데까르뜨는 과거 및 현재보다는 미래가 정념에 고유한 시간성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중에서 미래와 관계하고 있는 욕망을 맨 앞에 위치시키고 있다. 욕망 다음에는 현재와 관련을 맺고 있는 기쁨과 슬픔이 따라나온다. 데까르뜨는 이 여섯가지의 기초정념들을 기준으로 다른 여러 정념들을 설명하고 있다(69절 이하). 당대의 정념 분류법의 표준을 제시해주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분류기준은 욕구하게 하는 것(concupiscibilis)과 성마르게 하는 것(irascibilis)의 두 가지 종으로 정념을 분류하고, 이 두가지 종들에 각각 6개와 5개의 하위정념을 귀속시켜 총 11개의 정념을 기본정념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분류법과 비교해 본다면 데까르뜨의 정념론은 두 가지의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그의 정념론은 욕구와 성마름이라는 영혼의 분할이론에 기초한 전통적인 종적 구분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리고 둘째,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달리 정념들 사이에 일체의 파생관계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1-4) 정념의 기능
데까르뜨 정념론의 또다른 독창성은 정념의 긍정성을 강조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정념은 배제되거나 될 수 있는 한 억제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데까르뜨는 정념을 영혼과 신체의 연합체인 인간의 고유성에서 비롯하는 자연적 조건으로 간주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재의 보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데까르뜨가 제시하는 정념의 기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데까르뜨 정념론의 두 가지 중요한 구분을 잘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먼저 정념과 의지의 구분이 있다. 데까르뜨에 따르면 정념과 의지는 각각 영혼의 수동과 능동을 나타낸다. 즉 정념이 자신과 상이한 존재론적 질서에 속하는 신체의 운동이 영혼에 산출한 결과로서 신체의 운동에 대한 영혼의 수동성을 나타낸다면, 의지는 영혼의 고유한 힘, 능동성을 나타낸다. 이 두 가지 구분이 갖는 첫번째 의미는 영혼에게는 정념을 발생시키거나 제거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점이다. 어떤 외부대상이 위협을 할 때 정기들의 운동에 따라 영혼에는 두려움의 정념이 생겨날 수밖에 없으며, 우리에게 해로운 대상이 표상될 때 미움의 정념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이는 신체가 영혼에 직접 작용할 수 없듯이, 영혼 역시 신체에 직접 작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번째로 이는 영혼의 활동이 신체에 속하는 정기의 운동에 의해 결정거나 구속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체와 결합되어 있다는 자연적 조건 때문에 영혼은 정념을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반면 영혼은 신체의 운동과 정념의 발생 사이의 습관적 인과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영혼이 지니고 있는 이 힘이 곧 의지의 능동성이다. 데까르뜨에게 의지의 능동성은 영혼이 신체의 직접적 요구를 표현하는 정념들의 힘에 좌우되지 않고, 삶을 잘 보존하기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행위들을 수행하게 할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능력의 요체는 신체의 직접적 요구와 정념 사이의 자연적 인과관계를 변화시켜 정념이 의지의 명령에 따르게 만드는 데 있다.
또다른 중요한 구분은 정념과 내적 동요(émotions intérieures) 사이의 구분이다. 데까르뜨는 전통적인 영혼의 분할론을 비판하기는 하지만, 그 역시 영혼이 겪는 두 가지 동요를 구분하고 있다. 하나는 외부 물체의 작용에 의해 야기된 외적 동요, 즉 정념이며, 다른 하나는 영혼 자신의 힘에 의해 생겨난 내적 동요다(『정념론』 147-148항). 내적 동요는 정념과 마찬가지로 영혼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지닌 감정의 하나이면서 동시에 외부 대상이 아니라 영혼 자신을 원인으로 지닌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영혼이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개념적 장치가 된다.
데까르뜨에 따르면 영혼이 자신의 정념들을 제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자신의 정념들에 대한 영혼의 반성이다. 자신의 정념들에 대한 이러한 반성은 정념으로서의 기쁨, 즉 슬픔을 맞짝으로 갖고 있는 기쁨이 아니라, 정념들의 성격에 따라 좌우되지 않고 내적 평정을 유지하는 데서 오는 기쁨, 즉 지적 기쁨을 낳는다. 그리고 이러한 지적 기쁨은 영혼이 정념들에 좌우되지 않고 정념들을 잘 사용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준다. 데까르뜨가 “다른 모든 미덕의 열쇠”(『정념론』 161항)로 간주한 관대함(générosité)이 미덕이면서 동시에 감정으로서의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내적 동요 덕분이다.
2. 기회원인론과 정념의 일반화: 말브랑슈의 정념론
말브랑슈의 정념론은 『진리탐구』(1675)에서 체계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의 정념론은 데까르뜨의 이원론적 관점을 좀더 철저하고 일관되게 밀고나가면서 이를 기독교적 관점과 화해시키려고 한 점이 특징이다. 즉 말브랑슈는 데까르뜨가 영혼과 신체의 연합이라는 세번째 시초관념을 통해 정념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을 비판하면서 기회원인론의 관점에서 정념을 일반화하고 원죄론의 관점에서 정념의 유용성의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
2-1) 기회원인론과 영혼과 신체의 연합의 부정
말브랑슈 정념론의 이론적 기초는 기회원인론에 있다. 앞서 본 것처럼 데까르뜨는 사유와 연장이라는 두 가지 시초관념 이외에 영혼과 신체의 연합이라는 세번째 시초관념 위에서 자신의 정념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세번째 시초관념이야말로 말브랑슈의 기회원인론의 주요한 비판대상이며, 이 비판이 그의 정념론의 기초를 이룬다. 말브랑슈가 세번째 시초관념에서 문제삼고 있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이질적인 두 실체인 영혼과 신체의 상호작용, 따라서 정신과 물체 사이의 인과관계라는 점이다. 데까르뜨의 형이상학적 원리를 충실히 따르려는 말브랑슈에게 이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론적 후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념이라는 현상이 어떤 식으로든 영혼과 신체의 연관성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말브랑슈는 이원론의 틀을 유지하면서 이 연관성을 해명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게 된다.
말브랑슈의 해결책의 요체는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먼저 말브랑슈는 기회원인론을 통해 신체만이 아니라 영혼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을 과감하게 탈실재화하는 길을 제시한다. 기회원인론에 따르면 인과적 힘은 신에게만 존재할 뿐이며, 일체의 유한한 존재자에게는 독자적으로 운동을 일으킬 만한 힘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외부 물체의 인과 작용에 의해 우리의 신체가 변용되고 이것이 다시 정기들의 운동을 통해 송과선에 전달되고, 그 결과 영혼 안에 어떤 정념이 발생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외양에 불과하다. 말브랑슈에 따르면 이는 사실은 각각의 경우마다 작용하고 있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비가시적일 뿐만 아니라 비가지적인 것으로 남아있는 신의 의지의 연속적인 활동의 표현일 뿐이다(『형이상학과 종교에 관한 대화』 7권 13장).
둘째, 말브랑슈는 신과 정신의 연합, 신체와 정신의 연합으로 연합 개념을 이중화한다. 이 두 가지 연합 중 사유라는 속성을 공유하는 신과 정신 사이의 연합만이 실재적 연합이며, 이 연합은 수동적인 정신에 대한 능동적인 신의 활동을 사고하기 위한 범형적인 틀을 제공해준다. 신에 대한 정신의 이러한 원초적인 수동성은 뒤에서 볼 것처럼 말브랑슈에서 정념 개념이 일반화되는 존재론적 근거가 된다. 이처럼 신과 정신 사이에는 무매개적인 연합관계, 또는 오히려 의존관계가 존재한다. 반면 데까르뜨가 정신과 신체의 연합이라고 부른 것은 항상 이미 신과 정신의 연합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 더 나아가 정신과 신체/물체가 전혀 상이한 이질적 실체인 데다가 정신에 비해 신체/물체의 존재론적 위상이 훨씬 낮기 때문에, 사실은 엄밀한 의미에서 연합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과 신체의 연합이라 불리는 것은 사실은 합리적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우연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것이 우연적이게 되는 만큼 전능한 신의 의지의 작용력은 더욱 더 강화된다.
이 두 가지 논변의 결과 영혼과 신체의 연합이라는 데까르뜨의 세번째 시초관념은 실재성과 합리성을 상실하게 되며, 정념의 본성에 대한 이해 역시 광범위하게 변모된다.
2-2) 정념의 재분류와 일반화
기회원인론이 낳은 주요 결과 중 하나는 정념의 재분류다. 말브랑슈는 형식적으로는 데까르뜨의 정념의 분류와 순서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다. 즉 그는 데까르뜨와 마찬가지로 놀람을 첫번째 정념으로, 사랑과 혐오(aversion)를 그 다음에 오는 정념의 쌍으로 제시하고, 마지막에 기쁨과 슬픔, 욕망의 정념들을 위치시킨다. 하지만 이런 외양과는 달리 데까르뜨와 말브랑슈의 정념 이해와 분류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존재한다.
말브랑슈에서 정념은 신체의 운동의 결과로 영혼이 겪게 되는 표상이라는 데까르뜨의 정의와는 달리 “정기들의 외재적 운동의 기회에 영혼이 자연적으로 느끼게 되는 모든 동요들”(『진리 탐구』 5권 1장)로 규정된다. 즉 기회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유한자들에게 일체의 인과적 작용력을 박탈하는 기회원인론의 결과로 정념은 외부 물체에 의해 신체가 변형되는 순간에 신에 의해 영혼 안에 생산된 심리 현상으로 규정된다. 이 정념에 대한 새로운 규정은 데까르뜨의 정념론에 대한 세 가지의 변형을 함축한다.
먼저 이는 정념들을 신의 원초적 사랑의 양상들로 파악하는 것을 뜻한다. 외부 대상이 우리의 지성이나 감각에 나타나고 이것이 정념을 촉발할 때, 우리의 의지는 이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보이면 이를 추구하고, 나쁜 것으로 보이면 이를 회피한다. 그런데 말브랑슈에 따르면 의지에 의한 이러한 추구와 회피의 작용은 실은 자기자신에 대한 신의 사랑의 표현에 불과하다. 즉 신이 자기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것을 의지하게 되며, 따라서 우리가 좋은 것을 추구하고 나쁜 것을 회피하는 것은 신이 설정한 선 일반에 대한 우리의 자연적 이끌림의 표현이다. 바로 이 때문에 말브랑슈는 의지를 “우리를 비규정적이고 일반적인 선으로 향하게 하는 자연적 운동 또는 인상”(『진리 탐구』 1권 1장)으로 정의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런 정념 이해는 사랑을 모든 정념의 원형으로 제시하게 된다. 즉 놀람은 데까르뜨와 마찬가지로 첫번째 순서에 놓이지만, 말브랑슈에게 이는 “불완전한” 정념으로 간주된다. 놀람은 선에 대한 관념이나 감각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어떤 새로운 것에 대한 놀람만을 표현하기 때문이다(『진리 탐구』 5권 7장). 그리고 데까르뜨에서 사랑과 미움에 해당하는 정념인 사랑과 혐오는 사실은 사랑의 두 가지 표현에 불과하다. 혐오는 사랑의 부정적 표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기쁨과 욕망, 슬픔이라는 나머지 정념들 역시 말브랑슈에 따르면 각각 “기쁨의 사랑, 욕망의 사랑, 슬픔의 사랑”으로 나타난다. 슬픔은 우리가 추구하는 선이 우리에게 금지된 상태를 표현하며, 따라서 슬픔은 이러한 금지를 벗어나 선을 추구하려는 우리의 의지, 즉 사랑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또한 기회원인론은 데까르뜨가 능동적인 것으로 간주했던 의지를 근원적으로 수동적인 것으로 만드는데, 이는 곧 정념의 일반화를 가리킨다. 데까르뜨는 영혼의 상이한 능력을 구분하면서 의지에 능동성을 부여하고 지성에게는 수동성을 부여했다. 반면 말브랑슈에게는 기회원인론의 결과로 인간의 의지는 능동성을 결여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인식과 의지 모두는 인간 영혼 안에서 각자가 맡고 있는 기능에 따라 분화되기 이전에 신의 능동적인 작용의 수용이라는 공통적인 특성에 따라 규정된다. 따라서 말브랑슈에서 정념은 매우 일반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이는 아르노와의 논쟁을 통해 잘 드러나듯이 말브랑슈가 관념을 자체적인 인과적 작용성을 보유한 신의 본질의 일부로 간주하는 데서 비롯하는 결과이기도 하다.
2-3) 정념의 기능
말브랑슈에게 정념의 기능, 정념의 유용성의 문제는 그의 종교철학, 특히 원죄론의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데까르뜨와 마찬가지로 말브랑슈도 정념의 자연적 유용성을 긍정한다. 즉 인간이 영혼으로만 이루어진 존재자가 아니라 신체와 결합되어 있는 한 정념은 불가피하게 생겨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정념은 우리의 신체를 보존하는 데 유용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정념이 유용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조건은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신체에 대한 통제력을 지니고 이를 신이 설정한 질서를 추구하는 데 잘 활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 이후의 인간들은 원죄 때문에 신체에 대한 이러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오히려 신체의 감각적 욕구에 좌우되어 선 일반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지니게 된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욕구(concupiscence)다. 말브랑슈에 따르면 욕구는 “원죄에 의해 생겨난 자연의 무질서”(『진리 탐구에 대한 8번째 해명』)로서, 모든 인간은 원죄 때문에 처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고 이에 따라 욕구의 운동에 좌우된다. 아담도 역시 그의 후손들과 마찬가지로 영혼과 신체가 결합된 존재였으나, 원죄를 범하기 전에는 감각적 자극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영혼이 원하는 방향대로, 즉 신이 설정한 질서에 따라 신체를 잘 통제할 수 있었다. 따라서 말브랑슈에 따르면 모든 악덕은 원죄 이후에 생겨난 이러한 신체의 반역에서 비롯하며, 반대로 미덕은 오직 신이 설정한 질서를 잘 따르는 데 있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미덕은 그때그때의 상황에서 질서가 요구하는 행동을 그대로 수행하는 것(이는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다)이 아니라, “질서를 잘 따르려고 의지하는” 것이다. 즉 의지적 노력이야말로 미덕을 특징짓는 핵심적 요소다.
하지만 원죄에 의해 사람들이 욕구에 따르게 되었다면 어떻게 미덕을 지니는 것이 가능한가? 말브랑슈에게 이는 답변하기가 쉽지 않은 질문이다. 원죄 이후의 인간에게 습관 개념과 욕구의 개념이 일종의 악순환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더 그렇다. 신체와 정신 모두가 행동을 용이하게 해주는 습관에 따라 작용하고, 원죄 이후 이 습관은 욕구를 강화하는 쪽으로 형성되어 왔다면, 어떻게 이 악덕의 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말브랑슈는 그리 낙관적이지는 않지만, 원죄를 지니고 있는 모든 인간들은 항상 자신 안에 또한 질서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이 유덕한 활동의 능력을 교육을 통해 잘 길러낸다면 욕구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질서에 대한 사랑의 습관을 기를 수 있으리라는 것이 그의 희망어린 답변이다.
3. 정념에서 정서로: 스피노자의 정서론
우리가 본 것처럼 데까르뜨와 말브랑슈는 심신이원론에 기초하여 자신들의 정념론을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한편으로 정신과 신체가 자율적인 질서에 따라 존재하며, 따라서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도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긍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코나투스론을 통해 이를 일원론적으로 통합하고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정서론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 그는 정서의 문제를 코나투스라는 존재론적 기초 위에서 다루고 있으며, 둘째, 정서의 문제를 역량의 증대와 감소 및 수동성과 능동성의 문제와 결부시켜 논의하고 있다.
3-1) 정서론의 존재론적 기초: 코나투스
스피노자의 정서론은 코나투스(conatus) 이론에서 출발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든 유한한 존재자는 자신의 역량에 따라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는 노력으로서의 코나투스를 자신의 현행적 본질로 갖는다. 인간의 경우 이는 충동(appetitus), 또는 충동에 의식이 결합된 욕망으로 표현된다. 이처럼 코나투스를 유한 양태의 현행적 본질로, 그리고 욕망을 인간의 본질로 정의하는 것은 정서론과 관련하여 세 가지 주요한 의미를 갖는다.
먼저 코나투스론은 데까르뜨와 말브랑슈와 달리 일원론적 관점에서 정념 또는 정서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존재론적 기반을 제시해준다. 데까르뜨는 정념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형이상학과 자연학의 이원론적 관점 대신 영혼과 신체의 연합이라는 세번째 시초관념을 도입했다. 하지만 그는 신체의 작용과 영혼의 작용을 매개해주는 송과선이라는 신비스러운 가설을 도입함으로써 후배 철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말브랑슈는 기회원인론을 도입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정신과 신체의 존재론적 통일성을 함축하는 코나투스 개념에 근거하여 데까르뜨의 문제설정을 변화시키고 있다. 즉 코나투스는 정신과 신체 중 어느 한 쪽의 존재 및 활동 역량이 아니라 이 양자를 통해 동시에 두 가지 형태로 표현되는 동일한 역량이다. 그리고 이처럼 유한자가 지니고 있는 존재 및 활동 역량의 증대와 감소를 표현하는 것이 바로 정서들이다.
둘째, 스피노자에게는 데까르뜨 및 기회원인론자들을 포함한 당대의 데까르뜨주의자들의 정념론의 근본 문제였던 영혼과 신체의 상호작용이라는 문제가 더 이상 하나의 문제로 제기되지 않는다. 그 대신 그에게는 정서의 능동성과 수동성의 문제가 근본 문제로 제기된다. 데까르뜨에서 정념의 문제는 영혼에 신체가 작용한 결과의 표현, 곧 ‘영혼의 수동’의 문제로 제시되었다. 이는 곧 영혼과 신체, 정념과 의지의 반비례 관계를 나타낸다. 반면 “관념의 질서와 연관은 사물의 질서와 연관과 같다”(『윤리학』 2부 정리 7)는 스피노자의 평행론에 따르면 사유와 연장 사이에는 일체의 인과적 상호관계가 존재하지 않지만, 양자는 동일한 존재론적 통일성을 표현한다. 따라서 스피노자에서는 데까르뜨와 달리 정신의 능동과 수동은 신체의 능동과 수동과 비례한다. 이에 따라 스피노자 정서론에서는 영혼에 대한 신체의 작용, 즉 정념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과 신체를 통해 동시에 표현되는 존재 및 활동 역량을 증대하고 능동적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셋째, 정서는 수동성만을 함축하지 않으며 능동성도 함축하고 있다. 이는 스피노자가 역량(potentia)의 표현으로서 코나투스를 유한한 존재자들의 본질로 규정함으로써, 유한자들에게 능동성의 존재론적 근거를 마련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유한자들은 신의 본질의 표현으로서 코나투스를 자신의 본질로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유한자들은 실체와 같이 본질과 실존이 일치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항상 수동적이고 예속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으로 능동화의 경향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정념들의 능동화는 적합한 인식, 즉 이성의 활동을 요구하며, 역으로 적합한 인식의 두 가지 유형으로서 제 2종의 인식과 제 3종의 인식은 정서들의 능동화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정서론의 또다른 특징은 정서와 이성의 지속적인 결합을 추구한다는 데 있다.
3-2) 정서의 정의와 분류
스피노자에게 정서(affectus)는 신체의 활동역량을 증진하거나 감소시키는 신체의 변용들(affectio)인 동시에 이 변용들에 대한 관념으로 정의된다(『윤리학』 3부 정의 3). 이 정의의 의미를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정의에서 동원되고 있는 스피노자 철학의 다른 두 가지 주요 개념, 즉 관념 및 변용과 정서의 차이점을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정서는 관념의 한 종류이지만, 인지적 기능에 따라 정의되는 일반적 관념과 달리 신체와 정신의 역량의 증대 및 감소를 나타낸다. 그리고 변용은 외부 물체가 우리의 신체에 작용을 미쳐 생겨난 신체적 상태를 가리키는 반면, 정서는 변용되는 사물의 존재역량의 증대나 감소, 그리고 더 나아가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과 결부되어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스피노자 정서 개념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역량의 증감 및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데까르뜨나 말브랑슈가 정념으로 간주한 것, 즉 놀람,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욕망 등이 스피노자에게는 정서의 한 부분, 즉 수동적인 정서로 한정됨을 의미한다. 또는 이 각각의 정서들은 수동성과 능동성의 분화 과정 속에서 사고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말브랑슈가 기회원인론을 통해 유한자들의 역량을 최소화한 데 비해, 스피노자는 처음부터 정서를 역량의 변화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는 점도 주요한 차이점 중 하나다. 그 결과 스피노자 철학에서 정서는 윤리적, 정치적 실천을 사고하기 위한 필수적인 범주로 제시된다.
스피노자는 정서 분류에서도 데까르뜨 및 말브랑슈와 큰 차이를 보여준다. 데까르뜨가 여섯가지의 기초정념을 제시한 데 비해(이는 말브랑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스피노자는 세 가지 기초정서를 제시한다. 이중 첫 번째는 욕망이며, 그 다음은 좀더 작은 완전성에서 좀더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을 가리키는 기쁨의 정서와 좀더 큰 완전성에서 좀더 작은 완전성으로의 이행을 가리키는 슬픔의 정서가 있다. 이 세 가지 중 욕망이 첫번째 순서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 인간의 코나투스, 인간의 현행적 본질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정서 분류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데까르뜨에게는 최초의 기초 정념으로 제시된 놀람이 아예 정서의 영역에서 배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보기에 놀람은 어떤 적극적인 원인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알려지지 않은 어떤 것에서 생겨난 것이며, 따라서 우리의 역량의 증대나 감소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하지만 놀람은 우리를 놀라게 한 외부 대상에 우리의 주의를 고착시키는 경향이 있고, 이에 따라 사물에 대한 부적합한 인식을 낳는다는 점에서 수동성의 한 요인이 된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데까르뜨가 두번째로 위치시킨 사랑과 미움을 주요 정서들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이는 사랑과 미움이 각각 외부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과 슬픔이며, 따라서 기쁨과 슬픔의 변형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랑(적어도 그 일부)과 미움은 기쁨과 슬픔을 제공해 주는 원인이 직접적으로 작용하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기억이나 유사성 등의 표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기쁨과 슬픔의 효과를 산출하기 때문에 가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3-3) 수동성과 능동성
스피노자 정서론의 독창성 중 하나는 능동적 정서의 존재와 역할 그리고 메커니즘을 설명한 데 있다. 스피노자의 정서론은 자연주의적 관점, 즉 어떤 정서는 그와 대립적이면서 그보다 더 강력한 정서에 의해서만 억제되거나 제거될 수 있다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윤리학』 4부 정리 7). 따라서 『윤리학』의 목표인 윤리적 해방(이는 『윤리학』 4부의 제목이 [인간의 예속에 관하여]이며, 5부의 제목은 [인간의 자유에 관하여]인 데서 잘 드러난다)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동적 정서에서 생겨나는 예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스피노자 정서론에서 이는 능동적 정서의 작용으로 설명될 수 있다.
스피노자는 능동을 “우리가 그것의 적합한 원인인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 또는 우리 바깥에서 일어날 때, 즉 우리의 본성에 의해서만 명석판명하게 인식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우리 안에서 또는 우리 바깥에서 따라나올 때 우리는 능동적”(『윤리학』 3부 정의 2)이라고 정의한다. 반대로 수동은 “우리가 단지 부분적 원인에 불과한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 일어날 때 또는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따라나올 때 우리가 수동적”(같은 곳)이라고 정의된다. 이 정의에 따르면 우리가 능동적인가 수동적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사건의 적합한 원인인지 아니면 부적합한 또는 부분적인 원인인지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는 다시 우리가 사물에 대한 참된 인식을 획득할 수 있는지에 의존한다.
따라서 스피노자에서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의 문제는 부적합한 인식에서 적합한 인식으로의 이행의 문제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부적합한 제 1종의 인식에서 적합한 인식으로의 이행은 공통 개념의 형성에 의존한다. “부분과 전체에 공통적인”, 따라서 항상 참된 공통 개념은 보편적 인식을 형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독특한 사물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게 해준다. 마찬가지로 정서의 문제에서도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은 내재적인 전환을 가능하게 해줄 일종의 보편적 매개를 요구한다. 신을 향한 사랑(amor erga Deum)이 바로 이러한 매개의 역할을 담당한다. 앞서 본 것처럼 사랑 자체는 외부 원인에 의해 촉발된다는 점에서 수동적인 정서다. 더 나아가 보통의 사랑은 쉽게 반대의 것, 즉 미움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상과 예속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신을 향한 사랑은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지속적인 정서일 뿐 아니라, 이것의 반대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 역량의 증대라는 사랑의 정서를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정서다. 따라서 신을 향한 사랑은 수동적인 정서로서의 보통의 사랑이 능동적인 사랑, 즉 신의 지적 사랑(amor intellectualis Dei)으로 전환될 수 있게 해주는 매개로 간주될 수 있다.
3-4) 신의 지적 사랑
사람들은 보통 신의 지적 사랑이라는 개념을 “인간이 신을 지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이를 “신에 대한 지적 사랑”으로 번역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잘못된 생각이다.
첫째, 신의 지적 사랑은 보통의 사랑처럼 주체-객체 관계에 있는 외부 대상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지 않는다. “외부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3부 정리 13의 주석)이라는 사랑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사랑은 상상적이며, 따라서 지적 사랑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아울러 바로 이 점에서 신의 지적 사랑은 신을 향한 사랑과도 구분된다. 곧 신을 향한 사랑은 여전히 상상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사랑이지만, 신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과 대립하는 정서로 전도될 수 없으며, 따라서 최대의 기쁨을 가져다 준다. 이에 비해 신의 지적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며, 이 때문에 항상 능동적이다.
둘째, 신의 지적 사랑은 신을 향한 인간의 사랑만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을 뜻한다. 그리고 이는 좀더 근원적인 자기자신에 대한 신의 사랑의 두 측면을 이룬다.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한에서의 신은 인간들을 사랑하며, 따라서 인간들을 향한 신의 사랑과 신을 향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5부 정리 36의 주석) 이는 자기원인으로서의 신(1부 정의 1, 정리 11)이라는 정의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결과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잘못은 세번째 측면에 있다. 스피노자에서 신의 지적 사랑은 제 3종의 인식, 곧 독특한 사물들의 본질에 대한 인식의 구체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5부 정리 36에서 스피노자가 말하고 있듯이, “신을 향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인간정신의 본질에 따라 설명될/펼쳐질 수 있는 한에서의” 자기자신에 대한 신의 사랑이다. 스피노자가 바로 덧붙이듯이 이는 “곧 신을 향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신이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무한한 사랑의 일부”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각각의 개별 정신의 신을 향한 사랑은 자기자신에 대한 신의 사랑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보편화의 운동이며, 반대로 자기자신에 대한 신의 사랑은 개별적인 영혼의 지적 사랑으로 표현되는 개별화의 운동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처럼 각각의 영혼의 지적 사랑이 가장 보편적인 신의 사랑, 곧 능동화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신의 지적 사랑은 보편적인 인식을 목표로 하는 두번째 종류의 인식을 넘어서, 합리적 인식과 능동적 정서가 결합되는 세번째 종류의 인식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