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와 정치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진태원 옮김 / 이제이북스 / 2005년 5월
구판절판


히브리 국가는 내부의 적대가 화해 불가능하게 악화되지 않은 동안은 극도의 시련을 딛고 재구성될 수 있었다. 내부의 적대가 광란으로 타락했을 때 그것은 몰락했다. 그러나 이 내부의 적대는 어디서 유래하는가? 제도들이 경쟁적인 야심을 촉발하는 권력들을 병립시키고, 권리와 부의 불평등을 허락할 뿐만 아니라 영구적으로 고정된 어떤 삶의 유형-이는 [그 고정성 때문에] 인간의 욕망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과 정의 및 시민적 복종을 동일화하는 한에서, 이는 무엇보다도 제도들 자체로부터 유래한다. 이런 의미에서 제도들은 항상 양가적이다. 곧 어떤 조건에서 제도들은 자신들의 내적 취약성을 교정하지만, 또 어떤 조건에서는 인민과 국가를 폭력 속으로 밀어 넣는다....제도들이 타락하는 것과, 인민이 자신의 올바른 이익을 지각하지 못하는 "난폭한 대중"으로 전환되는 것은 동일한 과정의 두 측면이다-65쪽

권리라는 통념은 오직 어떤 현행성에, 따라서 어떤 활동성에만 상응한다는 점을 알아두자. 그리하여 "인간들은 권리상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며, 그렇게 존재한다"는 식의 정식은 여기서는 아무 의미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인간들은 실제로는, 그들을 평등하게 해 줄 어떤 역량 관계(어떤 유형의 국가)가 개입하지 않는 한 불평등한 역량들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일반화해서 말하면, 인정되고 행사될 수 있는, 또는 반대로 그렇지 못할 수 있는 행위 능력으로서의 "이론상의" 권리라는 관념은 부조리나 신비화에 불과하다...권리의 통념은 처음부터 의무라는 통념과 관련하여 정의되지 않는다. 더욱이 권리가 표현하는 역량은 시초에는 "반대항"이나 "상관자"를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역량은 필연적으로 사실적 한계들을 가진다.-93쪽

연속 생산의 원리는 인간 개인들 및 정치 체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두 가지 경우에 실존은 자연적 생산으로서만이 아니라, 개체들의 구성소들 및 이 구성소들을 연결하는 역량의 재생산으로 사고되며, 이러한 재생산은 개체가 외부 세력들("운세")에 저항할 수 있게 해준다...사실 고립된 개인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을 보존할 수 없는데 반해, 국가는 잘 구성되기만 한다면, 자신의 고유한 힘들로써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따라서 개인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이익을 추구하는 가운데 국가의 보존을 원하게 만들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국가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에게 시민적 복종의 기본 조건인 안전을 제공함으로써 개인들을 보존해 주어야 한다.-100쪽

단지 양적인 의미(시민들의 "거대한 숫자")만이 아니라 질적인 의미(거대한 숫자의 개인들의 집합적 행동)에서의 다중 그 자체는 국가의 분석을 규정하는 개념이 된다...다중의 역량은 화합의 역량일 뿐 아니라 불화의 역량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제 다중의 적대에 대한 균형과 중화, 상대적인 "중립화"의 문제는 더는 단순한 "통치"의 관점이 아니라 다중의 "정념들/수동성들"이라는 요소에 따라 제기된다. 다중을 통치하게 해 줄 지주는 다중 바깥에서 발견할 수 없으며, 이는 홉스가 상상한 형태[리바이어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105쪽

우리가 서술한 내용은, 모든 유한자에게 고유한 악덕들을 평민들에게만 한정시키는 사람들에게는 조롱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한다. 우중에게는 아무런 분별력도 없으며, 우중은 공포를 느끼지 않으면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다. 그들은 지배되는 경우에는 비굴하지만 지배할 경우에는 거만을 떨며, 그들은 일체의 진리 및 판단과 무관한 존재들이다 등등.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하나의 공통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 권력과 교육이 우리에게 환상을 만들어 내는 것 뿐이다...마지막으로 우중이 일체의 진리 및 판단과 무관한 존재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데, 왜냐하면 국가의 주요 업무들은 그들 모르게 수행되며, 그들은 그들로부터 은폐시키는 게 절대 불가능한 몇 가지 사실로부터 그러한 업무들을 파악해 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자신의 판단을 중지하는 것은 비범한 노력을 요구하는 덕목이다. 따라서 시민들에게 그릇된 판단과 잘못된 해석을 하지 말도록 요구하면서도 모든 것을 시민들 모르게 수행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이다.-106쪽

스피노자가 사고하는 결정 메커니즘들은 이중적인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한편으로 "국가 장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정치 권력의 진정한 담지자로 구성하는 것이다. 각 정체의 "주권자"는 상이한 양상에 따라 이러한 장치의 기능적 통일성과 동일화되는 경향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장치 자체의 "민주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112쪽

"동류同類"-우리 자신을 그와 동일시할 수 있고, 우리가 "이타주의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다른 개인, 종교에서는 이를 "이웃들"이라 부르고 정치에서는 "동료 시민"이라 부른다-는, 이미 주어져 있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자연적으로 실존하는 게 아니다. 반대로 이는 스피노자가 "정서적 모방"이라 부르는, 그리고 개인들의 상호 인정 속에서만이 아니라 개인적 정념들의 불안정한 집합체로서의 "다중"의 형성에서도 작용하는 상상적인 동일시/정체화 과정에 의해서도 구성된다. 사람들은 비록 "동일한 본성"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동류"는 아닌 것이다! 사람들은 동류로 생성된다. 그리고 동일시/정체화를 촉발하는 것은 "외부 원인", 곧 정서적 대상으로서의 타자의 이미지다. 그러나 이 이미지는 지극히 양가적이다. 곧 이것은 매력적이면서 혐오스럽고, 안심시키면서도 위협한다. -130쪽

우리가 명령의 주체를 이런 의미에서 자유롭다고 상상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복종에서 생겨나는 선과 악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만 돌리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타자의 자유에 대한 상상은 [다른] 인간들에 대한 복종의 양가적인 효과를 배가시킨다. 그리고 이는 또한 왜 갖아 안정된 국가는 모든 시민이 통치자들을 "전능한 자들"로 생각하지 않고, (제도의 형태 자체 및 특히 제도의 기능 때문에) 그들의 결정이 실제로 일반적 필연성에 따라 규정된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를 지니고 있는 국가인지 설명해 준다-137쪽

만약 우리가 신을 필연적인 것으로, 곧 비인격적인 자연 전체로 인식한다면, 신의 "분노"에 대한 모든 공포는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신에 대해 지니는 사랑은 <윤리학> 5부가 "신의 지적 사랑"이라 부르는 것, 곧 사실상 인식이자 인식의 욕망인 것이 된다.(5부 정리 20, 22~23) 이렇게 되면 우리는 신을 명령의 주체로 지각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허구적인 상상에 따라 자유로운 주체들이나 자신들의 창조주에 복종하고 불복종하는 피조물들로 생각하지 않고, 우리에게 가장 유용한, 따라서 가장 필수적인 자연적 존재들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것이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정념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최대한 해방시켜 준다. 스피노자가 우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4부 정리 70~73)

[1]신을 필연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2] 상호 유용성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고 우정을 추구하라는 이 두 가지 관념은 직접적인 윤리적 함의를 지닌다...이러한 관계는, 사랑과 이성이 공포와 미신을 지배하게 됨으로써 복종이 자신의 효과들 속으로 경향적으로 소멸하는 관계다
-138쪽

각자는 다른 사람들의 역량을 활용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전시키기 시작하며, 따라서 객관적인 연대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어떤 개인도 다른 개인들과 엄밀하게 "유사하지"는 않으며 각자는 자신의 고유한 "기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중은 교환들(재화의 교환은 그 일면에 불과한, 넓은 의미의 교환)의 동의어, 그리고 환원 불가능한 독특성들 사이의 자유로운 교통의 동의어가 된다...이는 사실은 자신들의 고유한 집합적 "기질"을 변화시키기 위한 개인들의 (미리 지정될 수 없는 목적 없는) 노력과 일치한다. 여기서 만약 우리가 정치체의 "보존"이라는 스피노자의 통념을 한 가지 의미, 곧 보수적인 의미(!)로 해석한다면 이는 명백한 오류다.....국가와 종교, 도덕이 제도화하는 복종 그 자체(및 그것에 상응하는 "법"에 대한 표상과 함께)는 불변의 기정사실이 아니라, 진행 중인 이행의 축이다. 좀더 정확히(왜냐하면 어떠한 진보도 보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면, 이것은 교통 양식 자체의 변혁을 결정적인 계기로 삼고 있는 어떤 실천의 쟁점-어떤 투쟁의 쟁점이라고 할 수도 있을까?-이다....사실 가장 효과적인 교통 형태는 합리적 인식에 따라 실현되는 형태다. 정념들 자체는 나쁜 것이지만(슬픔의 원천인 명예욕, 야심, 굴종) 정서들을 서로 투쟁시키고 대중을 규율하기 위해서는 정념들에 의존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개별적 이성 자체로는 너무 취약하기 때문이다.(<윤리학> 4부 정리 55, 58) 그러나 인식은 교통의 지속적인 완전화[개선] 과정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역량을 증대시킨다. -142쪽

곧 만약 어떤 사람도 결코 혼자서 사고하지 않는다면, 실질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참된 관념의 보유자들이 어떤 개인들이든 간에-점점 덜 혼자서 사고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모든 개인은 다른 관념들과 연결될 수 있는 적어도 "하나의 참된 관념"(이 관념이 자유와 행위 역량의 동일화의 맹아를 포함하고 있는 유용성에 대한 관념일 뿐이긴 하지만)을 가지고 있다.(<윤리학> 2부 정리 43, 47)... 사회적 삶이 교통 활동이기 때문에, 인식은 이중적으로, 곧 그 조건들 및 결과들에 의해 실천적이다. 만약 우리가 스피노자와 함께 교통은 무지와 지식, 미신과 이데올로기적 적대의 관계들-여기에는 인간 욕망이 투여되어 있다-에 따라 구조화되며, 이 관계들은 신체들의 활동 자체를 표현함을 인정한다면(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는 한에서), 우리는 또한 스피노자와 함께 인식은 하나의 실천이며, 인식(철학)을 위한 투쟁은 하나의 정치적 실천임을 인정해야 한다....이로써 우리는 왜 스피노자식 민주주의의 본질적 측면은 처음부터 교통의 자유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또한 "정치적 신체"[정치체]이론은 왜 단순한 권력의 물리학도 아니고, 대중들의 복종의 심리학도, 법질서를 형식화하기 위한 수단도 아니며, 가능한 최대 다수가 가능한 최대한을 인식하기(<윤리학> 5부 정리 5~10)을 구호로 내건 집합적 해방의 전략에 대한 탐구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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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뮤지션 2007-05-07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곧 만약 어떤 사람도 결코 혼자서 사고하지 않는다면, 실질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참된 관념의 보유자들이 어떤 개인들이든 간에-점점 덜 혼자서 사고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대도 이 부분을 읽으면서 무릎을 탁 쳤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