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내지 대학 초년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철학 입문서. 

철학에 흥미를 갖는 독자들이 한번 쯤 가볍게 읽어보기 좋은 책인 것 같다.  

교육부 장관을 역임한 철학교수인 뤽 페리 스스로 소개하듯 그의 '우파 공화주의자'로서의  

입장이 책 곳곳에 스며들어있기 때문에 주의해서 읽어야 할 부분들도 꽤 많이 있다.  

하나만 예를 들자면 자칭 '휴머니즘'의 전도사로서 68 혁명 전후의 현대 프랑스 철학을 

도매금으로 묶어 반인본주의로 치부하면서 비판 아닌 비판을 하는 부분 등등. 

참조 : 68년 5월을 상기할 것인가, 땅에 묻을 것인가(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6142)

아래는 얼마간 떠밀려서 하게 된;; 대략적인 책의 요약(스압).

 

뤽 페리, 사는 법을 배우다 



왜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가? 왜 철학이 사는 법을 배우는 일과 동일시되는가? 뤽 페리는 이 탁월한 철학입문서에서 철학의 가장 중심적인 문제를 무엇보다 인간의 유한성, 반드시 사멸한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유한성 + 자신이 유한한 존재라는 의식은 모든 철학적 질문의 핵심이다. 종교가 구원의 문제를 담당한다고 할 때, 철학이 무엇인지 알려고 할 때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그가 제안하는 것은 종교와 철학을 비교하는 것이다. 종교가 약속하는 구원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그것을 의심하는 자들에게는 그러나 종교는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철학의 역할이 생겨난다. 종교가 신뢰confiance(믿음fides)와 겸허의 미덕을 중요시하고, 자유로운 사고를 비난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반면, 철학은 타자나 신의 도움없이도 오로지 자기 힘으로, 자신의 이성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주장한다. 믿음과 정반대의 길을 가는 철학자들을 종교는 악마diable(dia-bolos떼어놓는 자)의 포로가 되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철학의 입장에서 신앙은 위안을 주지만, 그 대신 우리가 얻는 평안보다 잃는 명철함이 더 많다.

가령 에피쿠로스는 철학을 ‘영혼의 의학’이라고 정의하면서 그 최종목표가 죽음이 두려워 할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는 데 있다고 보았다. 또한 에픽테토스 같은 사람도 철학의 궁극적 문제가 결국 단 하나의 주제, 죽음의 공포로 귀결된다고 보았다. 몽테뉴 역시, 철학하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대체로, 그리스 철학자들은 과거와 미래가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가장 대표적인 두 가지 악이라고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지금 여기 있는 존재만이 유일하고 실재적인 존재이며, 과거는 이미 흘러갔으니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존재하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불가역성에서 비롯한 공포와 불안이 있는 한, 인간은 결코 자유롭게 사고하거나 행동할 수 없고, 따라서 인간은 무엇보다 스스로 자신을 구원해야만 하는 것이다.

뤽 페리는 철학의 세 가지 근본적 차원을 세계에 대한 이해(이론), 정의에 대한 욕구(윤리), 구원에 대한 추구(지혜)에서 찾는다. 그리고 이 테오리아, 윤리, 구원이라는 범주를 통해서 스토아철학, 기독교, 근대철학, 탈근대(니체), 해체주의 철학 등을 개관한다.

먼저 스토아학파를 살펴보자. 기원전 4세기 무렵 제논이 창시한 이 학파는 클레안테스, 크리시포스 등으로 계승되고, 이는 후대에 키케로 등에 의해 간접 전승되며, 로마시대에 다시 유행하게 된다(세네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1) 스토아 학파의 테오리아는 무엇보다 우주의 질서를 관조하는 것이다. theoria는 to theion 혹은 ta theia orao, 즉 신성theion을 본다orao, 신적인 사물들theia을 본다는 의미이다. 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세계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이라고 할 때, 스토아 전통에서의 세계의 핵심은 조화와 질서, kosmos였다. 우주의 구조는 각각의 요소나 기관이 전체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며, 신적일 뿐만 아니라 이성적인 것logos이다. 여기서 신적이라는 것은, 인격신이 모든 경이로움을 ‘창조’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은 그 경이로움을 창조하거나 발견하는 존재가 아닌 단순히 그것을 발견하고 관조하는 존재일 뿐이라는 뜻이다. 경이로움으로 현현하는 신성은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는 비인간적인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스토아 학파와 달리 세계가 카오스와 혼돈이라고 보았으나, 키케로는 다음과 같이 쓴다. “에피쿠로스가 마음껏 비웃게 내버려두자. (...) 그러나 이 세계보다 더 완벽한 것은 없다. 세계는 의식과 지성과 이성이 있는 살아있는 존재다”(<신의 본성에 관하여>, 1권) 이처럼 스토아 학파는 자연이 조화로운 것이기 때문에 인간 역시 자연을 전범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각자의 것을 각자에게 - 이러한 공정성의 이론은 로마 법체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었고, 삶의 궁극적인 목적 중 하나는 우주의 질서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의 신성은 내재성 속의 초월성이다. 2) 스토아 학파의 윤리학은 코스모스를 모범으로 삼는 정의로 요약된다. 이에 따르면 공정성은 무엇보다 정확성의 문제가 된다. 자연은 가장 아름다운 통치자이며, 자연은 무엇보다 인간의 의지와 관련된 선과 악, 공정과 불공정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는 오늘날 생태학의 생각과도 유사한 셈이다(한스 요나스). 도덕적 과제는 존재 혹은 자연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고대인들이 탁월성이라고 이해한 어떤 분야의 미덕은 자연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성향의 실현, 잠재태에서 행동으로 옮겨가는 것을 뜻한다. 3) 스토아 학파의 구원론은 지혜에 대한 사랑에서 지혜의 실천으로 가는 것, 죽음은 과정이고 인간은 영원한 우주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성립한다. 아렌트(<문화의 위기>)에 따르면 철학이 등장하기 이전의 고대인들에게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운명에 도전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하나는 번식이라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덧없는 시간과 망각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서사의 주인공이 될 만한 영웅적이고 영광스런 업적을 글로 남기는 것이었다(투키디데스, 헤로도토스). 그러나 양자 모두 한계를 갖으며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려는 세 번째 방법이 등장한다. 바로 사고와 행동을 정확하게 실천하여, 비록 불멸은 아닐지언정 어떤 인간적 형태의 영원에 도달하는 현자가 되는 것이다. 현자에게는 죽음은 단지 종말이 아니라 신성이 깃든 우주 안에서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변화나 과정에 불과하다. 에픽테토스의 말처럼 철학은 “신처럼 살고 신처럼 죽는 것을 배우는 것”(Les stoiciens, 900)이며 “죽은 뒤에 너는 지금의 네가 아니겠지만, 세계가 필요로 하는 또 다른 어떤 것이 되어 있을 것이”(Les stoiciens, 1030)다. 이는 각자의 우리 자신의 신적인 부분, 즉 지성을 통해 신적인 우주에 연결될 수 있고 각자의 daimon을 잘 돌봄으로써 불사에 관여하게 된다는 플라톤의 생각(티마이오스 90b-c)과 역시 좋은 삶을 관조하는 삶으로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불멸에 관한 생각을 일정 부분 해체하면서 동시에 스피노자적 전통으로 연결될 수 있는 생각이다. 구원의 추구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지혜의 몇 가지 훈련이 필요하다. 인간을 억압하는 두 가지 악, 과거에 대한 집착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억제하고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통스러웠던 과거 모든 일을 생각하지 마라. 다만, 현재의 순간마다 너 자신에게 물어라. 내가 정녕 견딜 수 없고 참을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그럴 때, 진정으로 네가 직면할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임을 잊지 마라”(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8권) 지나간 과거나 오지 않은 미래가 아닌 현재에 충실하라고 권고하면서 희망이야말로 가장 큰 불행이라고 비판한다는 점에서 스토아 학파의 생각은 티벳 불교의 교리와 유사한 점이 있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계획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가? 오히려 세네카가 말하듯이 “살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삶은 흘러가 버린다.”(또한 과거와 미래에 집착하는 태도는 니체의 말에 따르면 짐 나르는 짐승의 그것이며, Amor Fati와 반대되는 것이다) 좋은 삶은 희망도 공포도 없는 삶,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화해하는 것이다. 이때 삶의 목표는 단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고 우리에게 허락된 아름다움과 기쁨을 만끽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소유욕을 버리고 초탈한 자세를 갖는 것 역시 불교 정신과 맞닿아 있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전미래적 구원의 사고, 즉 운명적 재앙이 닥쳐온다 해도 이미 준비된 상태에 있을 것이라는 고도의 정신 상태가 요구된다. 현재를 살면서 과거와 미래에서 비롯하는 원망과 후회, 고뇌를 초탈하기 위해서는, 유한자인 우리는 항상 최후의 순간이 닥칠 수 있다는 전체적이고 충만한 의식을 가지고 매 순간을 만끽해야 한다. 전 생애가 하나의 순간처럼 되게 하려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 지향하는 이상이다. 두려움과 고뇌를 극복함으로써 얻게 된 평정에 도달하면, 현자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순간의 영원과 완벽한 행복 속에서 신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 한갓 정적주의나 운명론으로 들리는 이러한 태도는 바로 조화로운 세계라는 스토아 학파 특유의 세계관과 우주론에서 발원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후 그리스 철학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가 다루어진다. 기독교의 1) 테오리아가 갖는 첫 번째 특징은 스토아 철학이 신적인 것으로 여겼던 우주의 조화로운 구조, 즉 로고스가 예수라는 개인과 동일시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 또는 개인에 대한 특별한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이후 인권에 대한 철학을 예비한다. 스토아철학자들이 사용한 logos는 성경에서는 말씀으로 번역되며, 신성theoin이 한 명의 인간으로 축소되며, 신성을 관조하는 통찰orao 역시 변하게 된다. 두 번째 특징은 신앙이 이성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것이다. 구원의 관건은 주도적인 사고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신뢰의 문제가 된다. 즉 믿는 자만이 그 단순한 마음을 통해서 신을 볼 수 있다. 가령 아우구스티누스가 철학자들을 빗대어 지식인들, 고매한 자들은 추론에 몰두한 나머지 오만하게 굴다가 신성을 보지 못한다(“자신의 지식을 대단하게 여겨 한껏 오만으로 부푼 그들은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가난하니, 너희 영혼이 내게 와 쉬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세 번째 특징은 철학자의 이해가 아니라 단순한 사람들의 겸허함을 중시하는 것이다. 이 겸허함은 이중적인데, 한편으로는 예수와 더불어 하찮은 인간의 지위로 축소된 신적인 로고스의 객관적 겸허함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을 위해 이성을 포기한 인간 사고의 주관적 겸허함이다. 바울이 그리는 신은 전지전능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는 허약하고 불쌍한 신이다. 겸허하게 자신을 낮추고, 또 자신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을 낮추라고 가르침으로써 기독교의 신은 허약하고 왜소한 모든 이들을 대변하는 신이 되었던 것이다. 네 번째 특징은 이성보다 겸허와 신앙을, 스스로 하는 사고보다는 타자에 의한 사고를 우선하면서 철학은 소멸하지는 않았을지언정 결국 종교의 시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나오는 다섯 번째 특징은 철학이 이제 더 이상 구원의 교리가 아니라 단지 종교의 시녀에 불과하기 때문에, 스콜라, 즉 하나의 학문일 뿐 지혜나 삶의 수련이 아닌 것으로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제 철학은 개념적, 비판적, 논리적 담론, 논증적인 훈련에 가까운 것이 되고 말았으며, 이는 신앙과 계시에 바탕을 둔 구원의 교리를 이성의 영역으로부터 분리한 기독교의 영향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2) 기독교 윤리학의 첫 번째 특징은 자유의지가 도덕의 기초가 되고 모든 인간의 존엄성이 평등하다는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리스 우주론에서 자연에는 근본적인 위계질서가 있으며, 각 존재가 속한 범주는 우수한 것부터 저열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준이 있다. 그리스의 도덕적 어휘 중 미덕의 개념은 타고난 재능, 천성과 관련된 것이었으며 그리스 세계는 귀족주의적 세계였다. 반면 기독교인에게 중요한 것은 타고난 재능이나 능력이 아니라, 그 자질을 어떻게 사용하냐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도덕의 문제에서 자유의지가 도입된다. 이 기독교의 주장은 매우 강력해서 비종교적인 근대 도덕, 근대 민주주의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의 유산이다. 두 번째 특징은 도덕적인 면에서 정신이 규범보다 중요하고, 법을 문자 그대로 준수하는 것보다 내면의 심판이 더 결정적이라는 생각이다. 도덕이 근본적으로 인간 내면의 문제가 되면서 외적 규범과 갈등을 빚을 동기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특징은 인간에 대한 근대적 개념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신도들은 신으로부터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피조물로서 같은 처지에 있는 형제라고 불리웠다. 모든 인간의 동등한 존엄성에 대한 사고, 모든 인간은 하나라는 신념이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야만barbar, 즉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방인과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던 그리스적 개념은 사라지게 된다. 더 나아가 기독교는 각 개인에게 불멸을 약속한다. 3) 기독교적 지혜의 첫 번째 특징은 예수가 신성의 화신이 되면서 신의 섭리도 그 의미가 변했다는 것이다. 기독교와 더불어 인간은 신의 섭리가 스토아철학에서처럼 비인간적이고 비개별적인 운명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듯한 인격신의 너그러운 관심에 들어있다고 믿게 된다. 이제 우주적 질서에 우리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한 신성의 명령에 따름으로써 우리가 얻는 구원 역시 개인적 현실이 된다. 기독교가 약속한 구원은 인간을 둘러싼 초월적 우주의 한 부분으로 얻게 되는 무의식적이고 우주적 영원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의식적인 불멸을 의미하게 된다. 두 번째 특징은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 즉 신 안에서 사랑하기만 한다면 인간은 영혼과 육신의 부활을 할 수 있다는 복음이다. 세 번째 특징은 사랑이 기독교의 기적이자 힘의 원천이라는 것, 사랑에서 고통을 찾아낸 불교나 그리스 철학에서 사랑이 문제였다면, 기독교에서는 사랑이 해답이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집착으로서의 사랑을 비판하면서도 집착의 대상이 신적인 것 또는 신 자체라면 그 사랑을 부정하지 않았고, 신 안에서 피조물이 그 자신의 유한성을 벗어나 영원으로 갈 수 있다고 보았다. “네 마음에 드는 영혼이 있다면, 주님 안에서 그들을 사랑하라. 영혼은 원래 흘러가고 움직이는 것이나, 주님 안에서는 흔들리지 않고 확고하게 서리라. (...) 주님께 힘껏 매달려라, 그러면 공고함을 얻으리니.”(고백록, 4권 10장)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전체, 현재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인간의 부활은 기독교 구원론의 요체이다. 부활은 이성의 힘을 벗어나 인간의 머리로 헤아릴 수 없는 계시가 내포한 신비의 부분이다. 기독교는 추상적이고 무의식적인 구원이 아닌 구체적이고 의식적인 구원을 약속하고 인간이 유한성을 극복하고 불멸에 도달하는 승리의 복음을 전해준 셈이다.

이제 기독교 이후 휴머니즘과 근대철학이 등장한다. 고대 우주론의 붕괴와 종교적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두 가지 위기와 함께 태어난 근대세계는 뉴턴, 갈릴레오 등의 과학 혁명을 배경으로 한다. 과학적 발견을 통해 이전까지의 세계상이 붕괴된 후 근대인들은 우주나 신의 도움없이 홀로 남아 새로운 지표를 찾아 나서야만 했다. 1) 세계는 코스모스가 아니라 혼란스럽게 끊임없이 충돌하는 카오스이기에, 지식은 테오리아의 형태를 더 이상 취할 수 없었고, 질서나 조화, 선, 미 등의 가치는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근대과학의 과제는 이제 세계의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혼란스런 우주에 의미를 부여할 새로운 규칙을 능동적으로 세워야만 했다. 사고는 이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자연 현상을 인과적으로 연결하고 설명하려는 작업, 종합의 방법(칸트), 실험적 방법(클로드 베르나르, <실험의학입문>)을 의미한다. 근대적 사고는 인간을 코스모스와 신성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이론과 도덕률, 구원의 교리 모두 인간 개념을 바탕으로 새롭게 정립되어야 했다. 17~8세기 철학자들이 동물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인간과 동물의 구별에 힘을 쏟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 지점에서 루소가 중요하다. 루소 시대에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기준은 두 가지 고전적 기준이 있었는데, 하나는 지성(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적 동물’), 다른 하나는 감수성, 애착심(데카르트), 사회성 등이었다. 루소는 데카르트처럼 동물을 정교한 기계를 닮은 것으로 보았지만, 기계에 없는 지능과 감수성, 의사소통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루소가 독자적으로 파악한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자유 또는 완성가능성이라는 개념이다. 동물은 자유나 스스로 완성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항상 같은 원인에 똑같이 반응하며 살아간다. 반면 인간은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자연적 본능의 프로그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 무한히 변하는 역사를 능동적으로 만들어가는 능력이 있기에 스스로 자신을 규정할 수 있는 존재이다. 동물은 자연의 명령에 꼼짝없이 복종하지만, 인간은 자연의 명령이 통하지 않는 미확정의 여지가 있다. 인간의 반자연적 성격, 비동물적인 인간의 의지는 다른 한편으로 인간만이 실로 악마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의미한다(고문). 이처럼 자유를 인간과 동물의 차이로 정의함으로써 세 가지 결과가 따라나온다. 첫째로 동물과 달리 인간에게는 이중의 역사성이 있다는 것, 한편으로 우리가 교육이라고 부르는 개인의 역사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문화와 정치로 대변되는 인간 사회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면 그 존재에 선행하고 그 존재를 결정하는 인간 본성이나 본질, 인간성의 정의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의 모토, “존재는 본질에 선행한다”는 말은 루소의 핵심이 그대로 들어 있다. 세 번째 결과는 인간은 자유롭기에 어떤 자연적이고 역사적인 결정론적 규정에도 얽매임없이 도덕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가 언젠가 루소를 도덕 세계의 뉴턴이라고 부를 때, 이는 루소가 자유에 대한 사고를 통해 뉴턴이 물리학에서 했던 역할을 근대 윤리학에서 했다는 의미이다(또한 뉴턴의 세계에서 원심력과 구심력이 서로 대항하듯이 루소의 세계에서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가 끊임없이 길항한다). 루소의 영향을 받은 칸트와 프랑스 공화주의자들은 윤리적 미덕이 사심없고 공공의 선과 이익, 보편성을 지향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사고를 제기한다. 자연을 모방하거나 전범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싸우고, 본성적인 이기심과 씨름해야 하기 때문에, 도덕에는 명령적 형태가 요구되며, 칸트는 이를 정언명령으로 나타냈다. 가령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당시,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자연이 주는 재앙의 의미에 대해 사유하게 되었다. 더 이상 고대인들이 생각한 것처럼 자연은 선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제2의 자연, 공동의 가치를 구현하는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로 구성된 자연인 목적의 왕국(칸트)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적 차원에서 자유에 대한 새로운 생각은 고대의 귀족주의적 세계에 대립한 세 가지 특징, 형식적 평등과 개인주의, 노동에 대한 가치 부여를 가져왔다. 미덕을 자연이 아니라 자유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본다면, 민주주의가 성립될 수 있으며, 개인주의는 이러한 추론의 결과이다. 또한 일하지 않는 인간은 단지 가난한pauvre 인간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실현할 수 없는 불쌍한pauvre 인간이기도 하다. 귀족주의적 우주에서 노동이 노예나 하는 비천한 활동이었다면, 근대세계에서 노동은 인간이 자신을 실현하는 본질적 동력이자 스스로 교육하는 수단이었다(헤겔, 마르크스).

데카르트의 코기토 역시 인식론에서 또한 근대철학의 기원에 있음은 간과될 수 없는 사실이다. 고, 중세 세계와 단절하면서 인식론, 윤리학, 구원의 교리 모두를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서 요청되었던 것은 ‘주체’였는데 이것이 대한 새로운 원칙을 제기한 것이 바로 데카르트였다. 고대 세계가 붕괴하면서 나타난 상실감과 의혹의 정조는 데카르트의 저작에서 새로운 철학을 구상함에 일조했다. 데카르트가 모든 사물을 의심하는 허구의 상황을 연출한 것은 진실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 도달하려는 노력이었다. 이제 주관성은, 이전처럼 사실과의 일치가 아니라 진실의 가장 확실한 기준이 되었다. 또한 데카르트의 사고, 과거 전통의 선입견과 믿음을 거부하고 모든 것을 백지 상태에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은 혁명에 대한 근대적 개념을 창출했다. 토크빌이 말했듯이, 1789년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 자코뱅은 “데카르트 학교를 졸업하고 거리로 뛰쳐나온 셈”인 것이다. 혁명가들은 구체제의 모든 유산과 결별하면서, 데카르트가 철학에서 이룬 것을 역사적, 정치적 현실에서 구체화한 사람들이었다. 인간이 궁극적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에서처럼 믿음이나 신앙이 아니라 자의식이 된다. 근본적 회의, 비판정신과 사고의 자유는 근대철학의 시초를 이룬다.

요컨대 근대적 사고의 핵심은 비종교적 도덕은 평화로운 공동의 삶을 위해 남을 존중할 것을 요구하며 부과하는 가치의 총체이다. 그러나 가장 고결한 도덕적 이상이 구현된다고 해도, 죽음을 비롯한 실존적 문제에는 해답을 주지 못한다. 이 세계에 조화로운 질서도 없고 신도 죽었다면, 어디서 구원을 얻어야 할까? 근대인이 구원을 추구한 것은 대략 두 가지 방향이었는데, 하나는 지상의 구원을 찾는 종교, 과학주의, 애국주의, 공산주의 등이었다(뤽 페리의 반공주의). 다른 하나는 추후 현대 철학에서 설명된다.

이제 탈근대주의, 니체의 경우를 살펴보자. 앞서 본 데카르트와 계몽철학자들은 비판정신이라는 최강의 힘을 손에 넣었는데, 이제 그것은 이성이나 인간중심적 이상의 원칙에도 적용되는 것이 된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그리고 니체는 의혹의 철학자로서, 고전적 휴머니즘의 환상을 파괴했다. 특히 니체의 눈에는 무신론자이며 물질주의자임을 자처하는 계몽철학자나 공화주의자 모두 어떤 신자로 보였다. 삶보다 우월한 어떤 가치가 있고, 사실을 판단할 때 그 이상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믿음이 종교적 신앙심과 다름없다고 본 것이다. 신이 아니라 인권, 과학, 이성, 민주주의가 신의 위치를 대신하게 되었기에, 계몽주의 휴머니즘은 여전히 종교의 본질적 구조에 갇혀 있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근본적으로 이상은 신학적 구조를 포함하는데, 언제나 현실세계보다 월등한 피안의 세계가 있고, 사람 자체보다 우월한 외적인 가치, 즉 초월적 가치를 설정하는 것이 그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이름으로 현실을 부정하는 자세를 니체는 허무주의라고 불렀다. 이상의 허구를 이용하여 인간을 삶 밖으로, 현실 밖으로 내쫓는 것이 허무주의이며, 니체 철학의 중심 주장은 초월이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현실 안에 있으며, 모든 판단은 삶의 일부분을 이루는 생명력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니체의 관심사는 칸트나 공화주의자들처럼 모든 인간이 평등한 세계나 목적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민주주의를 인간을 하찮은 존재로 축소시키고 가치를 폄하하는 쇠락한 형태라고 비판한다. 1) 니체의 테오리아는 아테오리아a-theoria였다. 그는 현실의 기초나 존재의 본질이 우주적이거나 신적인 것이라고 보지 않았고, 인식이라는 것이 관조나 종합의 문제가 아니었다. 니체에게 봄은 해체, 계보학을 의미한다. 니체가 보기에 진정한 철학은 사람들이 성스럽고 범접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가치와 사고의 겉모습 아래 감춰진 세속적 기원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니체는 존재에 대한 어떤 판단도 단지 그 판단을 내리는 자의 생명력을 드러내는 징후라고 파악했다(“사실이란 없다. 오로지 해석이 있을 뿐”). 계보학이 독려하는 해체 활동은 모든 가치의 이면에 심연이 있을 뿐이며, 세계의 실체를 포착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니체는 스토아 학파들이 상상한 세계와는 정반대의 세계를 생각했다. 세계는 무한한 에너지의 장, 무한하고 혼란스럽고 복합적인 힘과 충동의 구조로 간주했다. 그는 그리스인의 코스모스를 단지 인간을 위로하고 안심하게 만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고안된 거짓 세계라고 보았다. 근대의 과학적 합리주의 역시 혼돈 속에 있는 힘을 재통합하고 종합하려는 시도로서 고대 우주론의 환상을 따라가는 또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물론 세계가 완전히 혼돈 그 자체인 것만은 아니며, 니체는 힘들의 유형을 구분한다. 반동적인 힘과 능동적인 힘. 전자는 고전 철학과 과학의 동기였던 진리에의 의지와 민주주의이며 후자는 예술과 귀족주의적인 자연적 우주이다. 반동적인 힘은 다른 힘을 억압하고 그와의 대립을 통해 구현되고 긍정보다는 부정, 찬성보다는 반대에 속하는 힘이다(소크라테스의 문답법). 육체와 감성을 무시해 온 진리 추구에의 의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유효한 것이 되기를 희망하는 내재적으로 민주주의적인 과학 역시 반동적인 것이다(반동-진리의지-민주주의-지각세계). 반면에 능동적인 힘은 특히 예술에서 표출된다(예술-귀족주의-감각적이고 육체적 세계 숭배-능동적 힘). 여기서 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최근의 니체 해석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니체가 단지 삶을 더 자유롭고 쾌활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동적 힘을 버리고 능동적 힘만 수용하고, 이성을 버리고 감성과 육체를 해방하라고 주장한 것처럼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부 좌파 니체주의자(뤽 페리는 특히 들뢰즈를 염두해두는 듯)들은 단순하게 모든 생명력 중 능동적 힘을 살리고 반동적 힘을 제거하는 것이 니체의 궁극적 메시지라고 해석했다. 모든 규범이 금지하는 것이라면, 금지를 금지(68혁명의 구호 중 하나)하고, 부르주아 도덕을 해체하고, 육체와 감성을 해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68혁명 등의 아버지로 지목되기 힘들다. 니체는 패거리 본능을 비판했고,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 등 모든 형태의 혁명적 이데올로기에 반대했으며, 성적인 절제를 필수적이라고 여겼으며, 과도한 낭만주의와 열정의 방만을 비판했다. 오히려 니체는 무정부주의나 육체의 해방, 성 혁명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힘들을 강화하고 거기에 통제된 위계질서를 부여하는 것, 그가 ‘위대한 양식’이라고 부른 것을 주장했다. 반동적 힘까지도 포함한 종합적 힘에 조화와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삶이 왜소해지거나 허약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니체는 생각했던 것이다. 2) 그렇다면 비도덕주의자로서 니체에게 어떤 도덕이 가능한가? 사실 니체의 반박애주의적 열정은 광기에 가깝기도 하다. 니체의 도덕은 곧 좋은 삶이란 가장 조화롭고 강렬하고 우아한 삶, 이성을 존중하고 무의미한 소모를 하지 않는 수학 공식처럼 엄격한 삶이었다. 힘의 의지 역시 주의깊게 해석되어야 한다. 이는 권력이나 높은 지위를 탐내는 욕망이 아니라, 허약하지 않은 생생하고 강렬한 삶을 원하고 내면적 분열을 피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러한 의지는 춤추는 사람처럼 가볍게 천진하게 살 수 없게 하는 두려움, 후회, 원한 등이 해소된 전범적인 삶, 위대한 양식 안에서 실현된다. 과도한 열정의 낭만주의(바그너, 쇼펜하우어, 슈만, 브람스)를 비판하는 니체가 말하는 위대한 양식은 한편으로 고전주의적 사고의 특징을 갖고 있다. 3) 니체에게 구원의 교리는 우선 영원회귀 개념에서 드러난다. 그는 가치있는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을 판단하는 현세적 기준을 제공하며, 우상도 신도 없는 구원의 교리를 추구하고자 한다. 영원회귀는 가치있는 순간과 그렇지 못한 순간을 선별하는 원칙이다. 내가 이것을 수없이, 영원히 반복되더라도 하고 싶었던 것이 확실한가를 자신에게 물어보라는 것이다. 치졸한 순간, 갈등과 죄의식, 나약함, 거짓, 자기기만의 순간이 영원히 반복되기를 누가 바라겠는가? 즉 니체는 진정으로 기쁘고 사랑과 명철함, 평정을 경험했던 순간들을 선별하여 후회도 원망도 없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와 유사하게, 영원회귀의 교리는 좋은 삶이란 과거나 미래에 얽매이지 않는 온전히 홀가분한 상황에서 현재와 영원 사이에 어떤 차이도 없다는 완성된 느낌으로 매 순간을 충만하게 살아가는 삶이라고 가르친다. 니체에게 구원의 교리로 중요한 것은 또 아모르파티amor fati, 운명애이다. 오직 있는 그대로의 것만을 원하는 것. 니체에게 구원의 교리는 조금 덜 희망하고, 조금 덜 후회하고, 조금 더 사랑하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현재를 긍정하고 가장 삶을 사랑한 신, 포도주와 축제와 환희의 신, 디오니소스처럼. 그런데 이 운명애와 영원회귀의 윤리가 상충되는 것은 아닌가? 우선 이에 대해 운명애는 영원회귀의 매우 선별적인 요구가 적용된 후에야 가치있는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니체 철학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다. 뤽 페리는 니체의 아모르파티에 대해 비판한다. 현실이 사랑스러울 때 사랑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과연 현실이 몹시 고통스러울 때도 운명애가 가능한가? 아도르노가 말한 것처럼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를 쓰는 것이 가능한가? 인류가 저지른 죄악을 포함한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사랑은 또 하나의 새로운 이상이 되어 허무주의의 또 다른 모습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니체의 해체 이후의 현대철학은 더 이상 니체 이전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우선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가 열어놓은 해체의 길을 따라가는 첫 번째 가능성이 있다(알튀세르, 라캉, 푸코, 들뢰즈, 데리다). 그런데 이는 니체가 그러했듯이, 현실에 대한 냉소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 뤽 페리는 니체 이후의 해체주의라는 이름으로 포괄한 철학이 니체와 동일한 모순에 빠졌다고 본다. 이 지점에서 하이데거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가 보기에 세계화와 자본주의의 근본 문제는 부익부빈익빈의 심화가 아니라, 인간을 역사로부터 소외시키고 의미와 목적성을 박탈한다는 점에 있다. 현대를 특징짓는 것은 기술의 지배이며, 17세기 과학의 비약적 발전 이후 민주주의 삶의 곳곳에 퍼져나갔다. 과학적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더 나아가 지배하겠다는 인간의 열망으로 나타난다. 계몽주의 시대 과학적 시도만 해도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와 해방적 관심이 우세했으나, 현대에 와서 이 과학은 기술로 이행하는데, 다시 말해 목적없는 과정으로서 기술이 득세하고 수단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며, 도구적 합리성이 지배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계보학적 자세와 기술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생각했는데, 니체는 그가 보기에 기술의 철학자로서 서양 형이상학의 정점에 위치하는데, 니체가 바로 세계 의미의 상실, 힘에의 의지를 우선하고 이상의 소멸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현재의 위기 속에서 기술 세계의 도전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오직 권위주의 체제뿐이라고 확신하고 나치에 복무하기도 한다. 니체 이후의 현재 철학은 공허한 박식과 전문화된 관심으로 축소된 철학이 되거나 휴머니즘을 사유하기 위한 철학이 되거나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물질주의(유물론)의 사고(스토아, 니체, 스피노자 등)에서 보기에 희망은 좌절, 무지, 무력을 의미하고, 조금 덜 희망하고, 조금 더 사랑하라는 가르침, Carpe Diem에서 구원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뤽 페리는 인간이 자연과 역사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된 존재라는 물질주의적 사고를 비판하며 루소와 칸트의 노선, 자유와 완성 가능성의 힘을 긍정하고 지지하려 한다. 그가 보기에 물질주의는 심오한 철학적 주제들을 다루지만 자신을 대상으로 삼지 않고, 초월과 자유, 이상 등을 논한다. 1) 뤽 페리는 현대 휴머니즘의 근본 과제는 계보학과 물질주의적 해체에 빠지지 않고 다시금 초월성을 새로이 사고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는 인간에 대해 초월적인 고대적 초월성 개념과 중세의 초월적 개념이 아니라, 칸트와 후설을 거쳐서 내려오는 내재성 속의 초월을 논의한다. 이는 니체 이후의 비형이상학적인 초월성인데, 후설의 지평 개념은 이를 잘 설명해준다. 이는 최종적 총체, 지고의 존재를 보증하는 기본적 근거에 우리가 도달할 수 없음을 뜻하며, 후설이 예를 든 것처럼 어떻게 바라보아도 세 면 이상 볼 수 없는 육면체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단지 지평에서 지평으로 이동하며, 이는 인간은 유한하며 의식은 언제나 무엇에 대한 의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가치는 형이상학적이거나 신학적 권위에 위해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그 수용은 나의 의식 내면에서 일어나는 과정이다. 현대 휴머니즘은 나의 주관성에 자리잡은 있는 그대로의 초월성을 조명하는 현상학을 시도한다. 니체 이후 현대 휴머니즘의 테오리아는 자기성찰과 자기비판에 집중된 인식이론이다. 2) 현대 휴머니즘의 윤리는 신성의 인간화 경향과 인간의 신격화 경향의 교차로 특징지어진다. 사람들은 더 이상 조국이나 혁명 같은 이상에 목숨을 걸지 않으며 단지 다른 인간을 위한다. 3) 구원의 문제. 우선 현대의 휴머니즘에서는 자기중심의 편협한 정신을 벗어나 타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판단함으로써 보편성에 도달하는 확장된 사고가 요구된다(네이폴 예시). 또한 이 확장된 사고는 세계문학이 도달한 보편성의 경지처럼 인간성 자체와 결합하는 특수성과 보편성 사이를 매개하는 고유성 또는 개성을 통해서 사랑의 지혜를 불러온다. 사랑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타인의 고유성을 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장사지내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스토아 철학이 제안하는 집착을 버리는 방법, 기독교의 종교적 답변, 그리고 다른 어떤 것이 있을 것이다. 사랑의 지혜는 각자가 스스로 찾아야 하고, 불교나 기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각자 나름대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하며, 매일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는 언젠가 헤어질 날이 찾아올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지금 여기서 함께 해야 할 일들을 기쁜 마음으로 찾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런 지혜는 형이상학과 종교의 환상에서 벗어난 현대의 휴머니즘에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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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10-03-01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첨 보는 책인데 재밌겠어요. 역시 출판사는 성향에 맞게 기파랑. -_-

바라 2010-03-02 23:12   좋아요 0 | URL
네~ 글자도 크고 난해한 개념어도 별로 없어서 잘 읽히는 편인 거 같아요~ 기파랑이 그런(?) 성향이 있나요? 한번 재미있게 읽어볼 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