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발제(pp. 33~53, 국역 : 69~102쪽)
믿음의 객관성
이러한 관점에서 상품 물신주의commodity fetishism에 대한 마르크스의 기본 공식은 재독해의 가치가 있다. 인간 노동의 산물이 상품의 형태를 갖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관계는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취하게 된다. 하지만 이 문제는 60~70년대에 알튀세르의 반-인간주의에 의해 폐기되었다. 알튀세르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상품 물신 이론이 인격들(person)과 사물들 간의 순진하고 이데올로기적이고 인식론적 토대가 없는 대립에 기초해있다고 그것을 비난했다. 그러나 라캉적 독법은 마르크스의 이 공시에 새로운 비틀림을 줄 수 있다.
이미 보았듯이 봉건제에서의 인간 관계는 이데올로기적 믿음belief의 미신의 그물망을 통해 매개되고 신비화된 주인과 노예의 관계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는 주체들이 중세의 종교적 미신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믿으면서 합리적 공리주의자로 행동한다. 마르크스 분석의 요점은 주체 대신에 사물(상품) 자체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곧 주체들은 더 이상 믿지 않으며, 사물 자체가 그들을 위해 믿는다. 믿음은 내적이고 지식은 외적인 것이라는 통상적인 테제에 맞선 라캉의 명제는, 믿음이야말로 근본적으로 외적인 것이며, 사람들의 실생활에 구현된다는 것이다(티벳의 기도하는 물레prayer wheel의 예).
정신분석psychoanalysis은 심리학psychology이 아니라는 라캉의 기본 명제는 바로, 가장 내밀한intimate 감정들도 그 진정성이 손상되지 않은 채로 타인에게 전이되고transferred 위임될delegated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고전비극에서 코러스가 맡은 역할을 생각해보자. 이들은 관객들 대신 공포와 연민을 느껴준다. 보다 정확히는 관객들은 코러스를 매개로 연극이 요구하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또한 원시 사회에서 ‘곡하는 사람’의 예, 텔레비전 쇼에서 쓰이는 미리 녹음되어 있는 웃음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사운드 트랙에 포함된 이 웃음소리는 단순히 우리가 언제 웃을지를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텔레비전에서 구현된 큰 타자the Other가 웃어야 하는 우리의 의무를 덜어주기 위해 필요하다. 바로 이러한 소타자(타인)the other의 중개 덕에 우리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믿음의 이러한 객관적인 지위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유명한 농담에 나오는 스스로를 옥수수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법은 법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사회적 영역과 관련하여 끌어낼 수 있는 교훈은, 믿음은 단순히 정신 상태나 내밀한 상태가 아니라 항상 우리의 실제 사회 활동 속에 물질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믿음은 사회 현실을 규제하는 환상을 지탱한다. 카프카의 경우, 그는 비합리적인 세계 속에서 어떤 과장되고 환상적이며 주관적으로 왜곡된 방식을 통해 현대의 관료주의와 그 속에서 개인의 운명을 표현한다고 평가된다. 이 평가는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는데, 이는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관료제 자체의 리비도 기능을 규제하는 환상을 표현articulate(국역; 분절)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과장 자체라는 사실이다. 이른바 카프카의 우주는 사회적 현실에 대한 환상-이미지가 아니라, 사회적 현실 자체의 한복판에서 작동하고 있는 환상을 무대화(mise en scène)하는 것이다. 우리는 관료주의가 전능하지 않음을 알지만, 관료기계 앞에 우리의 실제 행동은 그것이 전능하다는 믿음에 의해 통제되어 있다.
통상적인 이데올로기 비판과 달리 정신분석적analytical 접근은 무엇보다 사회현실 자체 안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겨냥한다. 우리가 사회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최종층위에서 결국 윤리적인 구성물이다. 그것은 ‘마치 ~라는 듯이’as if에 의해 지탱된다. 믿음이 상실되는 순간 사회적 장의 구성물은 와해된다. 이는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개념을 발전시키기 위한 주요 참조점이었던 파스칼에 의해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습관이야말로 가장 근거있고 가장 믿을만한 증거를 제공한다.”). 파스칼은 ‘정신을 무의식적으로 이끄는 자동운동’이라는 무의식에 대한 라캉적 정의를 제공하고 있다. 법이 지니고 있는 이와 같은 구조적으로 무의미한 특성으로부터, 법은 정당하고 훌륭하거나 이롭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이 법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한 동어반복은 법이 지닌 권위의 악순환을 보여주는데, 법의 권위에 대한 최종적인 토대foundation는 그것의 언표과정process of enunciation에 있다.
따라서 유일하게 진정한 복종은 바로 ‘외면적인’ 복종이다. 확신에서 비롯된 복종은 이미 우리의 주체성을 통해 매개된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복종이 아니다. 이러한 전도는 외면적인 사회적 권위와의 관계를 넘어서 믿음의 내적 권위에 대한 복종에도 적용된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를 믿는다면 이는 끔찍한 모독이며, 반대로 오직 믿음의 행위 자체만이 그의 선함과 지혜로움을 통찰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믿어야 할 충분히 좋은 충분히 좋은 이유를 발견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이미 믿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을 입증해줄 이유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에 대한 외면적인 복종은 외적 압력, 비이데올로기적인 야만적 권력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이 이해불가능하고 이해되지 않는 한에서, 그리고 외상적이고 비합리적인 특징을 보유하고 있는 한에서 복종하는 것이다. 이 외상적이고 통합되지 않은non-integrated 특징은 법의 전체적 권위를 숨기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법의 실정적인positive 조건 그 자체이다. 이것은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초자아superego 개념의 근본적 특징이다. 초자아는 외상적으로, 무의미하게senseless 경험되는, 다시 말해서 주체의 상징적 우주 속에 통합될 수 없는 명령이다. 하지만 법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관습은 그것이 받아들여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평성 전체whole of equity이다'라는 그 외상적인 사실(라클라우, 무페가 발전시킨 개념인 바 법이 우연성contigent에 기반한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억압되어야만 한다. 법의 의미, 정의나 진리의 토대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이고 상상적인 경험을 통해서 말이다.
그런데 카프카의 『심판』의 끝부분에 K와 신부가 나누는 대화의 끝부분에서도 이와 같은 공식화fornulation가 발견된다(“모든 것을 진실로서 인정해야 하는 건 아니오. 그저 필연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오”). 따라서 억압되는 것은 법의 모호한obscure 기원이 아니라, 법은 진실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필연적인 것으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법 속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필연적이고 구조적인 환영은 전이transference의 메커니즘을 나타낸다. 전이는 법의 외상적이고 비일관적이며inconsistent 어리석은 사태 이면에 진리와 의미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즉 전이는 믿음의 악순환을 가리킨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이유는 이미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가령 파스칼의 내기wager(신에 존재에 대한 내기의 합리성)에 대한 단상을 생각해보자. 파스칼의 대답은 이러하다. “이성적인 논증은 접어두고, 그저 이데올로기적인 의식ritual에 네 자신을 맡기고, 무의미한 제스처를 반복해서 무뎌져라. 그리고 마치 네 자신이 이미 믿고 있다는 듯이 행위하라act. 그러면 믿음이 저절로 생길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전향conversion을 얻기 위한 그러한 절차는 카톨릭에만 국한되지 않고 보편적으로 적용되는데, 가령 ‘내기’라는 주제는 마르크스주의에도 적용된다(부르주아 지성인은 부르주아적 편견에 샤로잡혀 있고 노동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믿을 수 없다. 그는 우선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해야 하고, 자신의 쁘띠 부르주아적인 편견과 정념을 진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는 자신들이 마치 노동계급의 사명을 믿는다는 듯이 행동했고 당에 열성적이 되었다. 그들은 믿음에 충만한 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파스칼의 ‘관습’custom을 평범한 행동주의적 지혜(믿음의 내용은 행동에 의해 조건지워진다)와 구별시켜주는 것은 믿음 전의 믿음이 갖는 역설적인 위상이다. 관습을 따르면서 주체는 그것을 알지 못한 채로 믿는 것이다. 즉 파스칼의 관습에 대한 독해에서 행동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점은 외재적인 관습이야말로 주체의 무의식을 지탱하는 물질적 토대라는 중요한 사실이다. 마렉 카니에우스카Marek kaniewska의 영화 <다른 나라Another country>의 공로는 ‘그것을 모른 채로 믿는 것’의 불안정한 지위를 공산주의적 전향과 관련해서 지적했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두 캠브리지 대학생을 주인공으로 하는데, 이 둘은 각각 쥬드라는 공산주의자와 가이라는 부유한 동성애자이다. 쥬드는 가이의 매력에 반응이 없는 유일한 학생이었고, 정확히 그 이유로 인해 쥬드는 가이의 전이적 동일시transferential identification의 대상이 된다. 영화의 대단원을 보자. 숨막히는 향락에 대한 두 가지 반응은 쥬드의 포기renunciation, 즉 그의 공개적인 공산주의 선언과 가이의 극도의 쾌락주의이다. 가이의 쾌락주의는 파국을 맞게 되고 가이는 자신이 지탱할 수 없는 상황을 해소하는 열쇠가 쥬드와의 전이적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두 가지 세부묘사에 의해 드러나는데, 첫 번째 상황은 가이가 쥬드야말로 이성애주의와 동성애에 대한 비하 등 부르주아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요컨대 가이는 자신의 비일관성, 자신의 결여lack를 전이시킬 주체를 잡은 것이다. 두 번째 상황에서 그는 쥬드에게 전이의 메커니즘을 폭로한다. 즉 가이는 쥬드가 마르크스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인 게 아니라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마르크스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즉 쥬드는 마르크스가 역사의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지식의 담지자bearer라고 미리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마르크스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특징 때문에 가이는 쥬드에 대한 전이로부터 쉽게 헤어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태는 정반대이다. 이러한 두 가지 특징은 그저 어떻게 “속지 않는 자가 길을 잃는les non-dupes errent”(라캉)지를 확인시켜 줄 뿐이다. ‘알고 있는자’인 가이는 전이에 빠져있다. 쥬드에 대한 비난은 오직 쥬드와 그의 관계가 전이적인 관계(전이가 작동하기 때문에 분석가analyst에게서 나약함과 실수를 발견하면서 즐거움을 찾는 분석주체analysand의 경우처럼)라는 배경 하에서만 의미를 돌려받는다. 가이가 전향하기 직전 극도의 긴장 속에 있음은 쥬드에 대한 그의 응수에서 잘 드러난다(“나 같은 놈에게 완전한 경솔함만큼 좋은 위장이 또 있을 것 같아?”). 이는 인간적인 차원에서만 특별히 드러나는 기만deception에 대한 라캉의 정의이다. 인간은 진실 그 자체를 이용해서 타자를 속인다. 모두가 가면 뒤에서 진실한 얼굴을 찾는 세계에서 그들이 길을 잃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실 그 자체의 가면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가면과 진실을 일치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 일치는 동료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커녕 상황을 견딜 수 없이 만들고 말 것이다. 성공적인 의사소통의 필수조건sine qua non은 외관과 그 감추어진 이면 사이의 최소한의 거리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열려진 유일한 문은 초월적인transcendent ‘다른 나라’가 존재하리라는 믿음과 공모 속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면과 실제 얼굴 사이에 근본적인 간극gap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알튀세르의 비판가, 카프카
따라서 상징적 기계(자동운동)의 외면성은 단순한 외면성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내적 인 신념이 미리 무대화되고 결정되는 장소이다. 우리는 종교적인 의례ritual의 기계에 복종하면서 이미 그것을 알지 못한 채로 믿는다. 우리 믿음은 이미 외면적인 의례 속에 물질화되어 있는 것이다. 파스칼의 신학에서 가장 전복적인 핵심은 바로 이러한 내밀한 신념과 외부적인 기계 사이의 단락short-circuit이다. 물론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관한 이론에서 파스칼적인 기계의 가장 현대적이고 정교한 판본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이론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와 이데올로기적 호명interpellation 사이의 연관을 사유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약점을 갖는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어떻게 자신을 내면화internalize할 수 있으며 어떻게 어떤 대의cause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믿음의 효과를 산출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국가장치들의 외부적인 기계는 그것이 오직 주체의 무의식적인 경제 속에서 외상적이고 몰상식한 명령으로 체험되는 한에서만 그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그저 이데올로기의 상징적 기계를 의미meaning와 진리의 이데올로기적 체험으로 내면화시키는 이데올로기적 호명 과정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파스칼로부터 이러한 내면화는 구조적 필연성에 의해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배울 수 있다. 거기엔 항상 무의미성과 외상적인 비합리성의 오점과 잔여가 붙어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잔여물은 주체의 이데올로기적 명령에 대한 복종을 방해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법에 무조건적 권위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이 무의미한 외상의 통합되지 않는 잉여이며, 이는 이데올로기에 고유한, 이데올로기적 향락[단어를 분절해서 보면 의미의 즐김이라는 뜻도 가진다]joui-sense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의미 속의 쾌락enjoyment-in-sense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잉여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향락에 대해 카프카는 기계와 그것의 내면화 사이의 간극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줌으로써 일종의 알튀세르 비판을 미완성으로avant la lettere 전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카프카의 비이성적인 관료제는 바로 기괴하고 몰상식하고 맹목적인 장치들, 바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인 것이다. 어떠한 동일화, 어떠한 인정 - 어떠한 주체화- 도 발생하기 이전에 주체가 대면하게 되는 국가 장치 말이다. 카프카적 주체는 신비스런 관료적 존재자entity(법, 城)에 의해 호명된다. 이는 특이하게도 동일화/주체화 없는 호명이다. 카프카적 주체는 동일화할 만한 어떤 특징을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는 주체로서, 그는 큰 타자the Other의 부름이 지닌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호명에 관한 알튀세르의 이론에서는 간과된 차원이다. 동일화, 즉 상징적인 인정recognition/오인에 사로잡히기 이전에 주체($)는 타자의 중심에 있는 욕망의 역설적인 대상-원인 a, 타자 속에 감추어져 있다고 가정된 이 비밀을 통해 타자의 덫에 걸려드는 것이 아닌가? 바로 이것이 라캉의 환상 공식($◇a)이다.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현실 자체를 구조화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꿈과 현실의 대립 사이에서 환상은 현실 쪽에 위치한다는 라캉의 기본적인 테제로부터 출발하자면, 환상은 이른바 ‘현실’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토대이다.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에 대한 세미나에서 라캉은 이를 ‘불타는 아이’에 대한 유명한 꿈을 해석하면서 발전시킨다. 이 꿈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은 꿈의 기능 중 하나가 꿈꾸는 사람이 잠을 연장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테제에 있다. 현실로부터 외부 자극(알람, 노크소리, 연기냄새 등)에 노출되면 잠자는 이는 잠을 연장하기 위해 즉석에서 그 자극적인 요소를 포함한 꿈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캉의 독법은 정반대이다. 주체는 현실 속으로 깨어나지 않도록 잠을 연장시킬 만한 꿈을 구성해낸다. 그러나 그가 꿈속에서 조우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의 욕망의 현실, 라캉적 의미에서 실재Real이다. 위의 경우, 아버지의 근본적인 죄의식을 함축하는 “제가 불타는 것이 보이지 않나요?”라는 비난이, 외적 현실 자체보다 끔찍한 실재에 해당한다. 그는 꿈 속에서 예고되는 그의 욕망의 실재 속으로 깨어나지 않도록, 자신의 무지를 유지할 수 있도록 잠에서 깨어나, 이른바 현실 속으로 도피한 것이다. 현실은 우리가 욕망의 실재를 은폐할 수 있도록 해주는 환상-구성물이다.
이는 이데올로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현실 자체의 토대로서 기능하는 환상-구성물이다.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사회관계들을 구성하는 환영illusion은 어떤 감당할 수 없는, 실재적인, 불가능한 중핵(라클라우, 무페에 의해 적대antagonism이라고 개념화된 것, 상징화될 수 없는 외상적인 사회 분열)을 은폐한다. 이데올로기의 기능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자체를 어떤 외상적이고 실재적인 중핵으로부터의 도피처로 제공하는 것이다.
이 논리를 설명하기 위해 다시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6장)을 참조해보자. 라캉은 장자의 그 유명한 꿈(호접지몽)을 언급한다. 장자는 스스로 나비가 되는 꿈을 꾸고 난 뒤, 내가 장자가 되는 꿈을 꾼 나비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는데, 라캉은 이 질문은 두 가지 이유에서 정당하다고 논평한다. 첫째로, 그것은 장자가 바보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라캉은 바보를 자기 자신을 자신과 무매개적으로 동일시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기 때문이다. 바보는 자기 자신과 변증법적으로 매개된 거리를 취할 수 없는 사람이다. 예컨대 자기 자신이 왕이라고 믿는 왕, 자기가 왕인 것이 자신도 속해 있는 상호주관적 관계의 네트워크에 의해 왕권이 상징적으로 위임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직접적인 속성 때문에 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라캉적 의미에서 바보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다. 만약 이것이 다라면 주체는 그의 내용 전체가 타인들의 상호주관적인 관계들의 상징적 네트워크에 의해 마련된 하나의 공백, 빈 자리로 환원되어버릴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만약 이것이 전부라면 라캉의 결론은 주체의 근본적 소외일 것이다. 그러나 라캉의 후기 작업의 기본 테제는, 소외를 야기하는 상징적 네트워크인 큰 타자the big Other 바깥에서 어떤 내용들을 얻을 수 있는, 즉 일종의 실정적인 일관성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주체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다른 가능성은 환상에 의해 제공된다: 즉 주체를 환상의 대상과 등치시키기.(국역본에서는 누락됨) 스스로 장자가 되는 꿈을 꾸는 나비라고 생각할 때 장자는 어떤 점에서는 옳다. 그는 상징적 현실에서 장자였지만, 욕망의 실재 속에서 그는 나비였다. 나비가 되는 것은 상징적 네트워크 바깥에서 그의 실정적 존재를 일관되게 유지시켜준다. 테리 길리엄의 영화 <브라질>에서 우리는 그 반향을 발견할 수 있다. 언뜻 보기에 여기에서 만나는 것은 단순한 대칭적 전도일 수 있으나, 라캉이 지적한 것처럼 이러한 대칭적 관계는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장자는 깨어나서 자신이 나비가 된 꿈을 꾼 장자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꿈 속에서 그가 나비일 때는 깨어났을 때, 즉 그가 스스로 장자라고 생각했을 때는 스스로에게 물을 수가 없다. 알퐁스 알리아스에서 감변무도회의 예.
현실의 토대로서의 환상
이러한 문제는 우리는 오직 꿈 속에서만 잠을 깨우는 실재에, 즉 우리의 욕망의 실재에 다가갈 수 있다는 라캉의 테제로부터 접근해야 한다. 라캉이 이른바 현실이라는 것의 최종적 토대는 환상이라고 말할 때, 이는 절대로 삶이나 현실이 한낱 꿈이거나 환영illusion이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없다. 가령 일반화된 환영의 예로 SF소설에서 모두가 로봇인 세계와 에셔의 두 손이 서로를 그리는 유명한 드로잉을 떠올려보자. 라캉의 테제는 이와 달리 환영적인 반영이라는 보편적인 유희로 환원시킬 수 없는 끝까지 존속하는 잔여물, 견고한 중핵이 항상 남아 있다는 것이다. 소박한 리얼리즘과는 달리, 라캉은 우리는 오로지 꿈을 통해서만 이 견고한 중핵인 실재에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실 자체 속에서 행위 양태를 결정하는 환상-틀fantasy-framework로의 접근은 오직 꿈 속에서만 가능하다. 가령 이데올로기를 진짜 현실을 가리는 꿈과 같은 구성물로 간주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데올로기적 스펙터클을 제거하고 이데올로기적 꿈을 깨뜨리려는 시도는 허사이다. 이데올로기적 꿈의 위력을 깨뜨리는 유일한 방편은 꿈 속에서 자신을 알리는 욕망의 실재와 대면하는 것이다.
반유태주의 경우. 이른바 반유태주의적 편견을 벗어나서 유태인들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유태인의 이데올로기적 형상에 어떻게 우리의 무의식적 욕망이 투자되었는지를 대면해야 한다. 객관적으로 유태인이 다른 사람들을 재정적으로 착취한다든지 소녀들을 유혹한다든지 하는 사실을 확증한다고 해도, 이것들은 반유태주의의 실제적인 뿌리와는 관련이 없다. 가령 라캉이 든 예로 병리적으로pathologically 질투심이 많은 남편에 대한 라캉의 명제를 생각해보자. 남편이 자신의 질투심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한 사실이 정말이더라도, 그의 질투가 병리적이고 편집증적paranoid 구성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따라서 반유태주의에 대한 제대로 된 대답은 ‘유태인은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게 아니라 ‘유태인에 대한 반유태적인 관념은 유태인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것이다. 유태인의 이데올로기적 형상은 우리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체계의 비일관성을 봉합stitch up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 이전의 일상생활의 수준을 고려하는 것으로는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불식시킬 수 없다. 예컨대 1930년대 후반 독일의 전형적인 개인을 예로 들어보자. 반유태주의적 선전물의 홍수에서 살고 있는 그는 집에 돌아오면 선량한 이웃인 [유대인] 스턴씨를 만나 친하게 지낸다. 과연 이러한 일상의 경험은 이데올로기적 구성물로 환원될 수 없는 저항을 제시해 주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그것과 현실 사이에 아무런 대립도 느끼지 못할 때,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가 현실 자체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 양태들을 결정하는데 성공할 때에만 비로소 우리를 사로잡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예를 든 독일인의 경우, 만약 그가 훌륭한 반유태주의자라면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형상과 일상적인 경험의 간극, 어긋남discrepancy 자체를 반유태주의를 위한 논증으로 돌릴 것이다. 즉 오히려 자신의 본성을 숨기는 이중성이야말로 유태인의 근본적인 습성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더욱 무섭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처음 보기에 모순되는 듯한 사실도 이데올로기 자체를 위한 논증으로 기능할 때 비로소 이데올로기가 정말로 성공을 거두는 것이다.
잉여가치와 잉여향락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와의 차이이다. 주류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이데올로기적 응시는 사회적 관계의 총체totality를 보지 못하는 부분적partial 응시이다. 이와 달리 라캉의 관점에서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그것[이데올로기] 자신의 불가능성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설정된 총체totality을 지시한다. 이는 물신주의에 대한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개념을 구별해주는 차이와 동일한데, 마르크스주의에서 물신은 사회적 관계들의 실정적 네트워크를 은폐하는 반면, 프로이트에서 물신은 상징적 네트워크가 그 주변으로 분절되는articulated 결여(거세)를 감춘다.
실재를 ‘항상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으로 간주하는 이상,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를 연역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탁월한 이데올로기적 절차는 거짓된 영원화와/나 보편화이다. 이때 이데올로기 비판은 이러한 거짓 보편성을 폭로하고 일반적인 인간 이면에서 부르주아적 개인을, 보편적인 인간 권리 이면에서 자본주의적 착취를 가능하게 하는 형태 등을 탐색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라캉의 입장에서 우리는 가장 ‘교활한’ 이데올로기적 절차를 영원화의 정반대 쪽, 즉 성급한 역사화에서 발견해야 한다. 정신분석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상투적 비판, 정신분석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핵가족 삼각형의 중요한 역할을 고수하는 것은 가부장적 가족이라는 역사적 형태를 보편적 인간 조건으로 변형시킨다는 비판을 생각해보자. 하지만 오히려 가족 삼각형을 역사화하려는 시도는 가부장적 가족을 통해 예고되는 견고한 중핵을, 법의 실재를, 거세의 바위를 회피하려는 시도가 아닌가? 성급한 역사화는 우리로 하여금 다양한 역사화/상징화를 관통하여 동일한 것으로 돌아오는 실재적인 중핵을 보지 못하도록 한다. 이는 20세기 문명의 도착적perverse 이면을 가장 날카롭게 보여주는 현상인 강제수용소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현상을 구체적인 이미지와 결부시키고 구체적인 사회질서의 산물로 축소시키려는 시도들은 모든 사회체계 속에서 항상 동일한 외상적 중핵으로 돌아오는 우리 문명의 실재를 외면하려는 시도들인 것이다.
결국 마르크스주의는 상징화를 비켜가는 실재의 잔여물, 잉여대상을 설명하지 못했다. 이는 잉여향락이라는 라캉의 개념이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라는 개념을 따른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놀라운 사실이다. 잉여가치 개념이 잉여향락의 구현물인 라캉의 대상 a(objet petit a)의 논리를 예견한다는 증거는 자본론 3권에서 마르크스가 사용한 공식을 통해 제공된다. “자본의 한계는 자본 자신,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다.” 이 공식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읽힐 수 있다. 우선 통상의 역사적-진화론적 독법은 그것을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너무 조일 정도로 자라나면 이따금씩 허물을 벗는 뱀의 은유를 대략적으로 따른다. 생산력이 발달해 생산관계의 틀이라는 사회적 외투보다 더 커지는 시기가 온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처음엔 생산력의 급속한 성장을 가능케 하는 것이지만 어떤 시점에서 그것의 발전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력이 자신의 틀보다 더 성장하여 새로운 사회관계의 형태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 자신은 이러한 단순한 진화론적 발상과는 거리가 멀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가 생산과정이 자본에 포섭되는 형식적 과정과 실질적 과정을 다루는 단락을 읽어보는 것으로 족한데, 형식적formal 포섭은 실질적real 포섭을 앞선다. 자본은 먼저 자신이 설립한 생산과정을 그대로 포섭하고 그 이후에야 생산과정과 생산력이 조화를 이루도록 생산력을 구현하면서 단계적으로 변화시킨다. 이렇게 보면 위에서 언급한 단순한 발상과는 대조적으로 생산관계의 형식이 생산력의 발달, 즉 내용의 발달을 추동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더 나은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는 시점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경우,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일치하는 때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가 이전의 다른 생산양식과 다르다. 이전의 생산양식의 경우, 우리는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이 고요하게 운동하는 조화로운 시기에 관해 말할 수 있으나, 자본주의의 경우 이러한 모순, 힘/관계의 불협화음이 그 개념 자체(사회적 생산양식과 개인적, 사적 소유양식 사이의 모순)에 포함되어 있다. 요점은 자본주의를 영원히 발전하도록 추동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내재적 한계, 내적인 모순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상태는 그 자신의 존재 조건들을, 자신의 한계를 영원히 혁명화하는 것이다.
잉여향락을 규정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역설이다. 이는 단순히 어떤 정상적이고 근본적인 향락에 붙은 잉여분이 아니다. 왜냐하면 향락 그 자체는 오직 잉여 속에서만 나타나며, 구조적으로 항상 '과잉'excess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 잉여분을 빼버리면 향락 자체를 잃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잉여가치와 욕망의 대상-원인인 잉여향락 사이의 상동관계이다. 근본적인 무능력의 외적 형태로서 - 무매개적 이행, 한계와 과잉, 결여와 잉여의 일치(국역본에서 누락) -의 과도한 힘을 통해서 자신을 해소하고 재생산하는 근본적 장애물의 위상학은 바로 라캉이 말한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결여를 구현하는 잔여물인 대상 a의 위상학인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마르크스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정치경제학 비판』서문에서 통속적 진화론적 변증법의 관점으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관해 기술하면서 마치 자신이 그것을 모른다는 듯이 말한다. 이러한 진술이야말로 어떻게 마르크스가 잉여 향락의 역설에 대처하지 못했는지를 감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닌가? 역사의 아이러니한 복수는 오늘날 이러한 진화론적 변증법에 부합하는 듯이 보이는 사회, 현실 사회주의로 나타난다.
1) 물신주의 : 일반적으로 인간의 생산물이 독립적인 실존을 갖는 것으로 되고, 알게 모르게 그 창조자로 돌아가는 것을 억압하게 되는 과정. 종교는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물신주의의 첫 번째 형태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신과 같은 종교적 존재자를 인간에 의해 창조되었으나, 그들의 눈에 독립적인 형태를 갖게 된 것으로 결론짓는다. 신들은 다른 세계의 힘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자기소외 또는 물신주의의 가장 중요한 세속적인 근원은 상품 생산에 의해 나타난다. 상품들, 인간에 의해 창조된 상품들은 그들의 눈에 독립적이고, 연결되지 않았으며, 때로는 억압적인 형태를 갖는다. 노동과 노동의 산물 간의 관계는 전도된다. James Russell, Marx-Engels dictionary, Conn. : Greenwood Press, 1980, p. 38.
2)전이übertragung는 정신분석에서 무의식적인 욕망이 어떤 형태의 대상관계 - 특히 분석적 관계 -의 틀에서, 어떤 대상에 대해 현실화되는 과정을 가리킨다.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확연히 체험되는 유아기적 원형의 반복이다. 분석가들이 별다른 수식어 없이 전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대개 치료 과정에서의 전이를 말한다. 전통적으로 전이는 정신분석 치료의 문제가 드러나는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그것의 정착, 그것의 양태, 그것의 해석, 그것의 해결이 정신분석 치료의 특징을 구성하는 것이다. 장 라플랑슈. 장 베르트랑 퐁탈리스, 『정신분석 사전』, 임진수 옮김, 열린책들, 2005, p. 397. 프로이트는 처음에 전이를 억압된 기억의 회상을 방해하는 저항, 파괴되어야 하는 치료에의 장애물로 간주했으나 점차 견해를 바꾸고 긍정적인 요소를 파악했다. 라캉은 전이의 상상적 측면과 상징적 측면을 구분하고, 상징적 측면(반복)은 주체의 역사의 기표를 드러냄으로써 치료의 진전을 돕는 반면 상상적 측면(사랑과 증오)은 저항으로 작용한다고 본다. 또한 라캉은 전이를 안다고 가정된 주체 개념으로 이해한다. 분석주체가 분석가에게 투사하는 이러한 전이는 분석과정 전체의 버팀목이 된다. 딜런 에반스, 『라캉 정신분석 사전』, 김종주 옮김, 인간사랑, 1998, pp. 339~345.
3) 불타는 아이에 대한 꿈 ; 한 아버지가 아이가 죽은 후, 커다란 촛불들로 둘러싸여 아이의 시신이 놓인 방 옆에서 잠시 잠을 잔다. 이때 아버지는 아이가 침대 옆에서 자신의 팔을 잡고 비난조로 속삭이는 꿈을 꾼다. “아빠, 제가 불타는 것이 보이지 않나요?” 꿈에서 깨어보니 시신이 안치된 방 안에서 그곳을 지키던 노인은 잠이 들어 엎드려 있고 넘어진 촛불 옆에 아이의 수의와 한쪽 팔이 타고 있었다.
4) 자본주의에서의 노동과정은 자본의 자기가치증식과정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노동의 자본에의 형식적 포섭이다. 이전의 다양한 생산과정은 자본주의적 생산으로 전환되고, 상품소유자(노동력 소유자)의 생계는 화폐소유자(자본가)와의 계약에 의존한다. 자본가는 노동의 질과 강도의 정상적 기준을 지키도록 신경을 쓰며, 노동이 산출하는 잉여가치를 증가시키기 위해 노동시간을 가능한 한 연장하려 한다. 자본은 이미 수립된 가용한 노동과정을 인수(포섭)한다. 이 점에서 자본가의 관리 하에서의 임노동은 주인의 지배 하에서의 노예노동 및 장인의 규제 하에서의 도공의 노동과 단지 형식적으로만 차이를 지닌다. 형식적 포섭에서의 생산력이 점차 그 양적 측면에서 발전하고, 노동시간 연장을 통해 유지되던 잉여가치의 생산이 노동일투쟁에 의해 한계에 도달해서 등장하는, 특유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대규모 산업)에서는 다양한 생산행위자의 상황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노동방식과 노동과정 전체의 현실적 성격을 혁신한다. 이것이 실질적 포섭이다.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이 노동의 자본에의 형식적 포섭의 물질적 표현이며,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은 실질적 포섭의 물질적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다. 절대적 잉여가치는 상대적 잉여가치에 선행한다. 이 두 형태의 잉여가치에 상응하는 것은 자본에 노동이 포섭되는 두 가지 구분되는 형태의 자본주의적 생산이다. 두 가지 포섭형태에 대한 구분은 칼 맑스, 『경제학노트』, 김호균 역, 이론과 실천, 1988, pp. 88~106에서 직접적 생산결과에 관한 제과정 참조. http://waam.net/bbs/zboard.php?id=philosophy_sem&no=48
5) "나는 안다. 하지만... " 이것은 바로 부인disavowal의 공식이다. 프로이트는 외상적 지각의 현실성을 깨닫는 데 대한 주체의 거부를 구성하는 방어의 특정 양식을 나타내기 위해 Verleugnung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는 이 용어를 여성의 성기를 봄으로써 외상적 지각이 되는 거세 콤플렉스와 연결한다. 그리고 이 경험과 절편음란증은 여성의 거세에 관한 아이의 공포에 기인한다. 어머니의 팔루스가 결여되어 있음을 알게 된 절편음란광은 이러한 결여를 부인하고 팔루스의 상징적인 대체물로서 물신적 대상을 찾아낸다. 라캉은 이 작용을 억압 및 폐제와 구별하면서 부인을 성도착증 전체의 근본적인 작용으로 만든다. 딜런 에반스, 『라캉 정신분석 사전』, 김종주 옮김, 인간사랑, 1998, pp. 157~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