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가도 변함없는 경찰과 건설자
본의 철거폭력
60년대 밤섬 폭파부터 80년대 상계동, 97년
전농동, 2003년 청계천, 2009년 용산까지 똑
같다.
이꽃맘 기자 iliberty@jinbo.net / 2009년01월20일 18시05분
1997년 7월 25일 저녁 6시 포크레인 3대가 주민들이 있는 철탑 쪽으로 접근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5층에 있던 주민 5-6명이 포크레인을 향해 돌을 던졌다. 동시에 한쪽에서는 철거반원들이 철탑에 있는 주민들을 향해 최루탄을 발포했다. 잠시 후 '쿵'하는 소리와 함께 철탑 입구의 2중문 중 바깥쪽 문이 부서졌다. 그리고 인화 물질 등으로 인해 철탑은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윽고 더 이상 불길을 피할 수 없게 된 주민들은 5층 철탑에서 뛰어내렸다.
똑같다. 위 글은 12년 전인 1997년 전농동에서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싸우던 철거민 박순덕 씨가 18m 철탑 위에서 떨어져 사망한 그날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2006년 5월부터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싸움을 벌인 용산4구역 철거민들이 한강로변 건물 옥상에 망루를 쌓은지 채 25시간만의 살인진압 과정에서 6명 불에 타 숨졌다. 테러와 맞서는 경찰특공대가 컨테이너 박스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망루 꼭대기로 몰린 철거민들은 경찰특공대의 등장에 공포에 질렸고 불이 났다. 망루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4명의 철거민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살인진압을 피해 망루 꼭대기에서 뛰어 내렸다가 끝내 숨졌다.
12년이 지나도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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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 갔다 온 김종률 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백동산 용산경찰서장이 서울지방경찰청에 경찰특공대 투입을 요청하고 경찰청장으로 내정된 김석기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최종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김종률 의원은 “촛불 때부터 강경진압을 지시해 왔던 김석기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진두지휘한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의 과잉진압은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금은 서강대교 밑에 풀만 무성한 밤섬은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여의도보다 인구가 많이 사는 섬이었다. 당시 여의도는 말이나 키우는 곳이었다. 밤섬엔 40여 세대의 주민 150여명이 사는 섬이었다. 박정희 쿠데타 세력이 집권한 직후 김현옥 서울시장이 밤섬이 홍수때 한강 범람의 주범이라며 다이너마이트로 섬을 모두 폭파해 버렸다. 사라진 섬 위로 다시 모래톱이 쌓여 지금의 모습을 만들었다. 당시 서울시는 홍익대 옆 산비탈로 밤섬 주민들을 강제이주시켰다.
80년대 초엔 전두환 정권이 88올림픽에 방해가 된다며 상계동 주민들을 무더기로 내쫓았다. 주민들은 겨우내 언 땅을 파고 비닐을 깔고 거적을 위에 덮고 이주대책 마련을 요구하며 버텼지만 소용없었다.
세월이 흘러 2005년 농민집회에서는 전용철 씨가 경찰에 머리를 맞아 사망했다. 2006년 포항에선 하중근 씨가 경찰에 맞아 사망했다. 얼마 전 법원은 전용철 씨에 대해 국가 책임을 인정했다. 하중근 씨 사건은 재판 진행중이다. 그럴 때마다 경찰은 요구에 못 이겨 재발방지를 약속하지만 지켜진 적은 없다.
철거민 투쟁에선 ‘깡패’라 불리우는 철거전문 용역직원의 폭력은 일상이 됐다. ‘도시및환경정비법’에 따라 재개발조합의 조합원 절반만 찬성하면 내려지는 ‘합법적’인 관리처분에 따라 강제철거는 시기를 가리지 않는다. 최소한의 인간 생존권을 위해 한겨울 철거는 못하도록 국무총리령으로 못박은 ‘동절기 강제철거 금지’는 이들에게 휴지조각이다.
빠른 재개발을 위해 건설사는 철거전문 용역직원을 고용해 강제철거한다. 시간이 돈이니까. 깡패들의 폭력에 경찰은 눈을 감거나, 아니면 용산 사건처럼 먼저 나서서 철거를 자행한다.
뉴타운으로 지정된 상도동. 지난해 10월 상도 4동에는 건설회사에서 고용한 용역직원들이 밀어닥쳤다. 사람이 살던 집 세 채는 그날 모두 사라졌다. 집안에 소화기를 뿌리며 등장한 용역직원들은 지붕을 넘어 창문으로 들어왔다. 그 집에 살던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끌려 나오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날 30여 명의 철거민이 병원에 실려갔다. 상도5동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같은 달 용산 5가에선 두 아이의 엄마가 경찰에 의해 강제연행됐다. 건설사가 업무방해로 신고했다는 이유였다. 남은 두 아이를 돌봐 줄 사람은 없었다.
이런 폭력사태는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며 했던 청계천 일대 철거과정에서도 반복됐다. 지난 2003년 11월 30일. 그때도 겨울이었다. 당시 서울시는 경찰과 공무원, 용역직원 등 1만8천여 명을 동원해 이주대책을 요구하는 노점상 700여 명을 강제로 몰아냈다.
"겨울철 강제철거가 금지 되어 있음에도 갈 곳 없는 철거민들을 몰아붙인 건설자본에 의한 살인이며, 생존권과 주거권을 위해 저항하는 철거민들에게 경찰특공대까지 투입해 강제진압을 자행한 공권력에 의한 살인이다" -용산철거민살인진압대책위 성명 中
2009년판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
은공
[기자의눈] 탐욕이 낳은 도심 난개발, 사람을
죽였다.
이정호 기자 / 2009년01월20일 14시45분
“아버지는 난장이었다. … 우리 다섯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도 천국을 생각해 보지 않은 날이 없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공'에서>
도시빈민의 삶을 통해 경제성장의 그늘에 대한 아픔을 그려냈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공'은 도시재개발로 살던 곳에서 쫓겨난 가족의 운명. 끔찍한 주변 상황과 비극적 죽음을 그렸다. 소설은 절망 속에서도 지켜가는 사랑에 대한 믿음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조세희 선배는 부끄럽다고 했다. 2002년 12월 한강의 찬바람이 몰아치는 여의도 바닥, 죽창을 든 농민들의 집회 현장에 낡은 카메라를 들고 선 60대의 조세희 선배는 시위 농민들보다 더 많이 물대포에 맞아 흠뻑 젖은 몸으로 카메라를 챙기면서 "부끄럽다"고 했다.
난소공이 나온지 30년이 됐는데도 가난한 이의 삶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난소공은 인쇄만 100쇄를 넘겨 단행본 소설로는 기록적인 100만 부 판매를 앞두고 있었다. 그래서 EBS 지식채널e는 '부끄러운 기록'이란 이름으로 조세희 선배의 난소공 100쇄를 재조명했다.
1978년 6월 첫 출간된 이 소설은 1996년 4월 100쇄, 2005년 11월 200쇄를 넘겼다. 2007년 9월 100만부, 2008년 11월까지 통산 105만부가 팔렸다. 잡지사 기자였던 조세희는 도시재개발로 철거를 앞둔 달동네 서민을 찾아 나섰다. 판자집에서 마지막 밥을 먹던 가족 위로 철거용역들의 포크레인이 내리찍히는 현장을 목격한 조세희는 참혹한 현장을 사진으로 찍은 뒤 동네 문방구로 가 대학노트 한 권을 샀다. 공원 벤취에 앉아 대학노트에 미친듯이 써 내려간 것이 '난소공'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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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일 오전 7시경 서울 용산동 4가 한강대로변 재개발지역의 불이 붙은 건물에 철거민들이 매달려 있다 [출처: 빈곤사회연대] |
오늘도 경찰은 영하의 겨울 강바람이 몰아치는 용산에서 살인진압을 자행했다. 건설회사도, 경찰도, 서울시도, 심지어 언론조차도 보상금 더 받으려고 화염병에 짱돌을 든 폭도라고 말한다. 경찰 진압으로 사람이 죽기 직전 20일 새벽 방송사들은 전날 농성 철거민들의 새총과 화염병과 짱돌에 집중했다. 경찰은 농성자들이 시너를 뿌린 뒤 진압해오는 경찰에게 화염병을 던져 불이 났다고 말한다. 그래서 진압이 불가피했다고 말한다.
아직 현장감식도 채 끝나기 전 20일 낮 12시에 용산경찰서장은 기자들 앞에 공식브리핑을 열어 사망자가 <경찰 1명, 농성자 4명>이라고 했다. 불과 2시간만에 불타 버린 옥상에서 싸늘한 농성자 시신 한 구가 더 나왔다.
검찰이 사건 직후 수사본부를 차리고 21명의 수사관을 동원해 수사에 들어갔지만 "농성자의 화염병 투척이 발화 원인"이라는 경찰의 20일 발표에 실체적 진실을 보탤 수 있을까. 경찰이 특공대원을 태운 무게 10톤의 컨테이너를 들어 올리면서 농성자들이 설치한 망루와 충돌한 것이 화재 원인이라는 현장의 시민들 목격담을 얼마나 추적해볼지.
물론 원인은 건물주와 땅주인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재개발 정책이다. 서울시가 19일에도 한강변에 초고층 아파트 건설계획을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바람 길과 조망권까지 고려한 개발을 하겠다고 했다. 지금의 저층 아파트 밀집상태를, 초고층 아파트를 뛰엄뛰엄 지어 조망권을 확보하겠다고 했다. 서울시는 '뛰엄뛰엄'에 방점을 찍었지만, 이 나라 부동산 역사는 언제난 '초고층 아파트'에 찍은 방점대로 흘러왔다. 도심 난개발이 국민 6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철거민은 '몇푼의 보상금'을 노리고 화염병을 들지 않는다. 어떤 바보라도 그렇게 하진 않는다. 화염병 처벌은 몇푼의 보상금보다 훨씬 무겁기 때문에 계산이 안 나오는 장사다. 이번 용산의 세입자 상인들은 철거 건에 임시 주거와 생계를 위한 임시 시장이라도 만들어 달라고 했다.